우리는 원치 않게 광야 한복판에 설 때가 있다.
광야는 죽을 만큼 힘든 곳이며,
살소망이 끊어지는 곳이기도 하다.
우리는 광야에서 도무지 알수 없는
마구잡이로 휘몰아치는 시련과 역경을 경험하게 된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내가 당하고 있는 고난과 처절한 시련들이
다른 사람에게는 별로 일어나지 않는것이며
나에게만 너무 자주 빈번하게 일어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와같이
영문을 알지 못하는 고난을 오래동안 당할때
이후에 내가 어떤 모양[그릇]으로 만들어질지..
나에게 어떤 유익과 복이 임할지.. 알수 없다.
아니, 알고 싶지도 않다.
다만 우리가 분명히 알수 있는 것은
지금 일어나는 일로 인해 너무 고통스럽다는 것이다.
이럴때 우리는,
하나님을 볼수 없다.
하나님을 들을수도 없다.
하나님을 만질수도 없다.
차라리
"언제까지라거나, 무엇때문이라거나" 알수만 있다면
넉넉히 견디고 참을수 잇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침묵하신다.
사실은 침묵하심이 아니라 침묵하심처럼 보일뿐이다.
너무 우리의 신음소리가 커서
하나님의 청아한 음성이 들리지 않는 것이다.
산모에게 해산이 임박하면 산통이라는 것이 찾아 온다.
산통이 최고조에 달하면
산모는 죽을 힘을 다하며 고통을 호소한다.
산통이 빨리 끝나기를 애절하게 갈망한다.
아무리 힘을 주어도 태아는 꿈쩍도 않는것 처럼 보이고
사선을 넘는 통증이 온 몸을 휘감는다.
온 몸이 땀으로 뒤범벅이 되고
얼굴에는 실핏줄이 터지기도 한다.
이때는..
남편도 밉고,
태어날 아이에 대한 기대도 사라지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저 빨리 고통이 끝나기만을 바랄뿐이다.
1분 1초가 하루 같은 순간이다.
그때 노련한 의사가 하는 말이 있다.
"조금만, 더~ 힘주세요"
"그래도.. 자궁이 조금씩 열리고 있습니다."
그렇다.
하나님이 침묵하는 그 시간에
하나님이
아무일도 않하시는 것처럼 느껴지는 그 시간에
마치 하나님으로 부터 잊혀진듯 보여지고
버림 받은듯 느껴지는 그 시간에도
하나님은 우리의 등 뒤에서 일하신다.
아주 서서히 조금씩 말이다.
우리의 막힘도 조금씩 열리고 있다.
다만 우리가 당하고 있는 고통이 너무커서
하나님의 개입을 감지할수 없을뿐이다.
그러니 우리의 등 뒤에서
비밀히[차근 차근히] 일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잠잠히 기다리자.
우연이 없다.
목적없는 연단 또한 없다.
자궁에서..
생명이 나오는 것이, 신기하고 경이롭듯이..
처절한 광야의 고통을 지나..
우리는,
하늘의 생명으로
충만한 믿음의 사람으로 거듭나게 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절묘하고 신묘막측한 시나리오시다.
우리는 광야에서
죽을 산통을 겪고 난후에 속사람이 성숙해 지며
주님을 닮은
작은 예수로 거듭 태어나는 영광을 얻게 될 것이다.
-하늘목장 칼럼에서 옮김-
♡주의 사랑으로 오늘도 행복하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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