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의 은혜/설교,간증,집회

영화배우 남궁원 장로

에바다. 2011. 11. 30. 10:52

            영화배우 남궁원
                “정치는 안 하길 정말 잘했지… 아들 총선 땐 팔 걷고 밀었어”
 

    남궁원(본명 홍경일)을 만나려고 건 전화를 받은 사람은 국회의원 홍정욱의 비서였다. 남궁원은 각종 행사에 초대받아 다니느라 회답이 더디다고 그는 말했다. 서울 방이동 자택에서 만난 날에도 남궁원은 대전에서 행사가 있었다.


   “가 보면 굉장히 호응들을 해요. 부산에 갔는데 사람들이 막 따라다니고. 이 늙은이한테 말이지. 나이 든 사람한테 그러는 거 난 처음 봤어. 사람들이 쫙 섰다니까. 사진을 찍어 달라 그래서 올 수가 없었어요.”


   1934년생인 그가 조각 같은 얼굴로 ‘꽃미남’ 배우 시대에 방점을 찍은 게 반세기 전이었다. 도무지 은막(銀幕) 밖으로는 나오지 않을 것 같던 그 잘생긴 배우는 팔순을 바라보는 나이에 안방 드라마로 돌아와서, 신인마냥 신을 내고 있었다. 그가 난생처음 도전한 TV드라마는 최고 21%의 시청률을 남기고 최근 종영했다.


   “집사람은 안방에서 보고 나는 딴 방에 가서 봤어요. 이야, 그거 볼 적에 두근두근거리지. 전국의 시청자가 보고 있을 텐데 얼마나 겁이 나. 별의별 생각이 다 들더라고. 기도가 저절로 나와. 끝나자마자 집사람한테 ‘여보 나 얼굴이 너무 늙어서 나온 것 같아’ 했더니 괜찮다 그러더라고. 그런 얘기를 들으면 좀 위안이 되고.”


   쫙 깔린 목소리로 희열을 드러내는 이 중후한 원로 배우의 천진난만함에 익숙해지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아들을 수식하는 데 이름을 내주고 빛바랜 필름처럼 살아온 남자는 모처럼 자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오후 2시에는 집을 나서야 한다고 홍 의원의 비서가 인터뷰 전 당부했다.


   -아들이 아버지 일정을 관리합니까.


   “홍 의원이 아무래도 신경을 많이 쓰는 편이에요.”


   -연기 활동은 국회의원 아들 때문에 자제했던 건가요.


   “그런 거 없어요. 이번에 TV 나올 적에는 아들한테 물어봤지. 그건 아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제3자로, 가족으로 의견을 구한 거예요. 내가 이 나이에 주연도 아니고, 또 영화만 사수하고 살았는데 어떡하느냐고. 홍 의원이 처음엔 부정적인 얘기를 했지. 날 위해서. 그래서 고민을 좀 했어.”


   아내 양춘자(70)씨가 “조연인 내가 나와도 되느냐”며 거실로 나왔다. 멀찌감치 앉았다.


   “이제 자꾸 섭외가 들어와요. EBS(교육방송)에서 한국 명화를 상영하면서 그 영화 관계자를 초대하는데 나한테 사회랑 해설을 해 달래. 영화배우가 하기엔 그것도 괜찮잖아? 나는 조용한 밤에 라디오에서 음악 틀어주면서 얘기해주는 것도 해 보고 싶어. 이 음성을 가지고 청취자들을 잠재우듯이. 옛날에 동아방송 평화방송 개국 때 나 보고 해 달라고 그랬어요. 그땐 바빠서 시간이 있어야지.”


   -원래 꿈이 외교관이었다죠.


   “어머니 기대가 컸어요. 날 의사 공부를 시키려고 했는데 나한텐 벅차고 생리에 맞지도 않았지. 한양공대 입학해서 유학 준비를 했어요. 미국 대학에 편지를 많이 했는데 콜로라도주립대학에서 풀스칼라십(전액 장학금)을 준다고 통지가 왔어요. 그걸 받아놓고 조금 있으면 떠나려는데 갑자기 어머니가 그렇게 된 거지.”


   자궁암 3기였고, 의사는 “수술해도 가망 없다”고 했다. 남궁원이 동창 아버지였던 이재명 아세아영화사 대표에게 영화 출연을 약속하고 받아온 돈으로 병구완을 했지만 어머니는 3개월 뒤 숨졌다.


   “내가 그때 엄마 끼고 드러누웠어요. (초상나면) 병풍 치잖아요. 그 뒤에 들어가서 어머니를 끌어안았는데 다리 만지면 뜨끈뜨끈하고 하루가 지나도 뜨겁고 그래. 그러니까 엄마 콱 붙들고 있는 거지. 3일을 먹지 않고 붙들고 있었다니까. 친척들이 ‘저 새끼 죽는다’ ‘제 엄마가 데려가려고 그런다’면서 떼어놓으려고 하는데 내가 떨어져야지. 그래서 어쩔 수 없이 5일장을 지냈어요. 9월 9일, 참 더웠다고. 그런데도 시신에서 냄새 한 번 안 났어요.”


   -그러고 영화사에서 연락을 받았죠.


   “너무 밤을 새워서 귀에서 소리만 나고 내 정신이 아니었지. 어머니가 살아계신 것 같을 정도로. 그런데 영화사에서 촬영 날짜 잡았으니까 오라는 거야. 나도 참, 돈을 받았고 약속을 했으니 어이는 없지만 안 지킬 수도 없고. 아버지하고 상의를 했지. 아버지가 그러더라고. 딴따라는 애비 에미가 죽어도 무대에서 그걸 못 멈춘다고. 그래도 약속이니까 갔지.”


   -초반엔 선배 김진규 신영균과 후배 신성일 등에 밀려 빛을 못 봤습니다.


   “연기력도 물론 부족했지만 성일이가 연기력이 좋아서 떴던 것도 아니잖아. 걔도 발 한번 움직이려면 그렇게 어색하고 그랬는데. 김진규 신영균씨는 악극단이다 연극이다 이런 거 다 한 사람들이라 달랐지. 난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게 좀 있었어요. 그러다가 내가 만든 게 ‘007’(첩보영화) 붐이에요. 그걸론 날 따라올 사람이 없었지. 멋있게 양복 입고 해외 돌아다니고. 전쟁물이 나오면서 군복 입은 것도 어울렸고. 그 다음엔 멜로드라마가 나와서 뭐 섹스 많은 영화에도 좀 출연하고.”


   -그런 신성일이 더 주목을 받았으니 질투심이 나진 않았습니까.


   “그런 거 몰라요. 성일이를 내가 또 귀여워했고. 지가 영화배우 되기 전엔 처음 서울 와서 고생도 많이 했지. 우리 집에서 자기도 하고 정말 형제같이 지냈어요. 성일이가 하는 청춘물은 나랑 분야도 달랐으니까 잘나가는 거 좋았지. 나는 성일이같이 확 올라가고 이런 건 없고 천천히 됐어요. 남궁원(南宮遠)이란 이름이 그래서 그런가 봐. 남쪽에 있는 먼 궁궐 같이.”


   그는 70년대에 만개했다. 대종상 백상예술대상 청룡영화상 등 국내 시상식과 각종 국제영화제에서 상이 쏟아졌다. 인천상륙작전을 소재로 한 영화 ‘오! 인천’을 촬영하러 온 007 시리즈의 감독 테렌스 영은 미국행을 제안했다.


   “가고도 싶었죠. 가서 내가 자리 잡고 우리 가족을 부르면 좋지 않을까 했어요. 그런데 당장 내가 다 돌보고 있으니 주춤하게 되더라고. 가족이 단출하면 같이 가서 해보겠지만 아이들이 학교 다니는데 내가 외국 가서 있으면 어떻게 되나. 그래서 떠나질 못했어요.”


   -후회 안 합니까.


   “후회는 하나도 없고 다만 한 가지, 내가 60살 가까워졌을 적에 ‘미국 가서 공부 좀 했으면 좋겠다’ 그랬어요. 신학 공부를 해서 목사가 되고 싶었다고. 그런데 내가 미국 가면 가족을 돌봐줄 사람이 없는 거야. 저 사람 하난데 몸도 좋지 않고. 그게 하나 아쉬워.”


   66년 12월, 그는 얼굴에 붕대를 감고 합작 영화를 찍으러 홍콩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영화 ‘하얀 까마귀’ 촬영 중 소품이던 폭탄이 터져 얼굴을 40바늘 가까이 꿰맨 상태였다. 아내 양씨는 그 미국 항공기의 유일한 한국인 승무원이었다. 한눈에 반한 남궁원은 양씨에게 전화번호를 받아냈다. 항공기가 경유한 일본 도쿄에서 두 사람은 만났다. 이 만남에 대해 양씨가 입을 열었다.


   “그때는 비행기 타는 한국 분이 많지 않았어요. 그분들한테 사고가 있으면 내가 도와줘야지 누가 도와줘. 남편은 일행이랑 있었는데 카메라가 아직 도착을 안 했다는 거예요. 도와주려고 스스럼없이 전화번호를 준 거지. 홀딱 반해서 그런 건 아니었고.”


   -지금이니 그렇게 말하는 거 아닙니까.


   “아니, 처음에는 전혀 그런 게 아니었어요. 그렇게 유명한 분인 줄도 몰랐어. 얼굴은 붕대 투성이고 시커먼 모자, 시커먼 바바리에 안경을 썼으니 어디를 봐. 참 안 됐더라고. 동정심이었어, 오히려.”


   남궁원의 ‘음 …’하는 소리가 바닥에 깔렸다.


   -그래도 만나서 데이트를 했습니다.


   “데이트라기보다 나 있는 숙소로 찾아오셨더라고. 그때가 크리스마스 이브였어요. 직원 숙소가 옛날 무슨 귀족이 살던 집을 개조한 건데 아래층에 바가 있거든. 파일럿 할아버지가 마티니 두 잔을 우리한테 보내더라고. 한국에서 애인이 찾아왔구나 싶었던 거지. 그게 인연이 됐어요.”


   남궁원은 70년대 후반부터 닥치는 대로 영화를 찍었다. 한국 영화가 침체기에 접어들고 있었다.


   “항간에 그러더라고. 남궁원이가 돈이 아쉬워서 역할을 가리지 않고 했다고. 영화배우라는 게 장래가 보장되지 않잖아요. 결혼해서 아이들 낳고 그런 생각이 들어서 되든 안 되든 그냥 많이 했죠. 섹스 영화니 뭐니 결국 영화인데 뭐. 당시에는 한꺼번에 10편, 20편씩 돌아갔어요. 그러니까 하나가 조금 잘못돼도 딴 데서 커버가 됐지. 내가 신경 쓰는 작품들이 있다고. 그런 몇 작품은 열을 올려서 하고 나머지는 적당히 하고. 그런 건 또 손님도 별로 안 들어요.”


   그는 70, 80년대 고무도매상, 햄버거가게, 중식당, 월남국수집, 네덜란드 건설용역업체 한국지사, 민물장어집 등을 차례로 운영했다.


   “그러고 보니 부업 많이 했네. 고무도매상을 할 땐 내가 전북 군산의 공장에 가서 한 달을 살았어요. 고무를 팔려면 어떻게 만드는지 알아야 될 거 아냐. 오픈하고선 기간별로 판매량 분석해서 그래프를 그렸어요. 그러니까 저렇게까지 하는 배우가 어디 있느냐고 감탄을 하지. 햄버거 할 땐 미군 부대를 전부 다니면서 스터디를 하고 가게를 열었어요. 난 하면 그렇게 했다고.


   네덜란드 건설용역업체 한국지사장을 할 땐 장관 했던 사람, 포 스타(대장) 은퇴한 사람들이 지원했는데 내가 됐어요. 낙동강 하구, 김해공항 가는 길, 부산 제3부두, 이런 거 전부 우리가 했다고. 목포 새만금도 했고. 그렇게 번 돈이 바로 미국으로 간 거지.”


   -세 자녀를 모두 유학시킨 걸 보면 아버지의 치맛바람도 보통이 아닙니다.


   “첫째는 자식들 의지였어요. 내가 걔들 국민학교 다닐 적에 일본 같은 데 가끔 데리고 갔어요. 그래서 시야가 넓어져 있었어. 특히 아들은 어린애가 꿈이 굉장히 컸다고. 그래서 과감하게 보냈지.”


   20대 초반 미국 유학기 ‘7막7장’으로 조기 유학 붐을 일으켰던 아들 홍정욱은 언론사 사주를 거쳐 국회의원이 됐다. 그가 한나라당 후보로 출마한 2008년 총선에서도 남궁원은 팔을 걷어붙였다.


   -국회의원은 욕먹는 자리이고 국회는 이전투구가 심한 곳인데, 아들 생각하는 아버지면 뜯어말렸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이것이 시작인지 모른다고 생각해서 밀어줬어요. ‘사회에 획을 긋는 사람이 되라’는 게 내 기본적인 생각이니까. 지역구 주민에게 봉사 한 번 해보라는 뜻이었지 지위나 다른 생각은 안 하고.”


   양씨는 “지금도 그렇지만 나는 반대했다”고 했다.


   당시 홍 후보의 출마 지역은 동작구에서 중구로 옮겨졌다가 다시 서울 노원병으로 바뀌었다. 진보신당 노회찬 후보가 버티고 있는 곳에 연고도 없는 홍 후보가 내던져지듯 투입된 것이었다.


   “그게 20일 전이야. 사무실 얻고 명함 찍고 그러니까 17일 남았더라고. 그걸로 선전한 거야. 우리 식구는 그랬다니까, 여기 대통령 나왔던 사람이 출마했다며? 이회창. 우리가 그 정도로 노회찬을 모른 거야. 그 센 사람을.”


   -접전 끝에 홍 후보가 43.1%를 얻어서 이겼습니다. 선생이 그렇게 열심히 뛰었다면서요.


   “사람이 표로 보이더라고. 차 타고 가다가 버스 정류장에 몇 사람이라도 서 있으면 뛰어내려서 (홍보)하고 와야지 속이 편하고. 하루는 밤에 먹자골목 대폿집에서 젊은 사람들한테 명함 주고 악수를 하는데 한 놈이 내 팔을 비틀더라고. ‘이 놈의 자식’ 하면서 멱살 잡고 끌어내서 보니까 다른 당 사람이야. 신고하려다가 관둡시다 했는데 다음날 오히려 남궁원이가 행패 부렸다고 난 거야. 증인들이 있어서 무마는 됐는데 아들이 ‘오후 9시 넘으면 나가시지 말라’고 당부하더라고.”


   -이대엽(11∼13대) 이낙훈(11대) 최무룡(13대) 신영균(15대) 신성일(16대) 등 동시대 배우들이 국회의원을 했고 선생은 선거를 여러 번 도왔는데, 직접 정치 할 욕심이 없었습니까.


   “정일권씨가 국회의장 할 때 (78년 10대 총선을 앞두고) 집권당(민주공화당)에서 공천을 받았었어요. 연예인 중 처음이었지. 이력서까지 다 써서 냈는데 집사람이 새벽에 찾아가서 울고불고 제발 빼달라고 그랬어요. 나는 하고 싶었지만 마누라가 그러는데 내버려뒀어. 그 다음부터는 딱 미련 버리고, 자식을 위해서 나는 끝난 거다 생각했어요.”


   “난 이 사람 정치하는 거 싫었어. 정치가가 너무 싫거든. 미안하지만 우리나라가 뜻있는 사람이 정치하기 어려운 나라라고 생각했어.”


   -정치인들이 치고받는 거 보면 화가 나죠.


   “아들한테 국회의원 왜 나가느냐, 그거 아깝다는 사람도 많았어요. 본인도 국회의원 하면서 참 회의를 느끼더라고. 그러니까 올바른 소리를 자꾸 하는데, 내가 ‘초선의원이다. 제발 얘기 좀 하지 말라’고 해도 끝까지 못 참더라고. 이번에도 한마디 하고 일본 가고.”


   홍 의원은 홍준표 한나라당 대표가 10·26 재보선 결과에 대해 “이겼다고 졌다고도 할 수 없다”고 하자 트위터에서 “이긴 것도 진 것도 아니라고? 안 보이는가 아니면 안대를 꼈는가?”라고 꼬집었다.


   -정치를 못한 데 대한 아쉬움이 없습니까.


   “안 하길 잘했다지 뭐. 최무룡씨도 감옥 한 번 갔다 오고, 신성일이도 들어갔다 오고, 이대엽이는 지금 가 있고. 그게 뭐냐고 전부. 나는 했으면 그 정도는 안 됐겠지만 배우가 국회의원 한두 번 한다고 정치가로 남는 게 아니잖아.”


   -홍 의원이 선생 닮았다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선생도 아버지를 닮았습니까.


   “우리 아버지는 더 잘생긴 것 같아.”


   -그런데, 남궁원 다단계 사기설은 뭡니까.


   양씨가 “나 때문에 험한 꼴 본 거”라며 말했다. “내가 원적외선 치료를 받는데 한 회사에서 집에 의료기를 놔 드리겠대. 대신 홍보를 해 달라는 거야. 그런데 그게 다단계였던 거예요. 속아서 엮인 거지. 민·형사 소송을 다 걸렸는데 형사는 무죄가 됐고, 민사는 책임이 조금 있다는 정도로 판결(선고유예)이 났어요. 이 사람 믿고 샀다는 거지. 그게 인터넷에 ‘남궁원이 다단계로 사기쳤다며?’ 하는 식으로 꼭 뜨더라고. 남편이 정말 성실하게 살았는데, 내가 그것 때문에 한이 맺히고 너무 미안해.”(2011.11.16. 국민일보 / 글 강창욱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