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 장로교 뿌리로 돌아가라
“말씀으로 돌아오라” 강력한 경고 순종하자
김석호 교수(대신대학교 실천신학)
위협받는 성경의 권위, 교회 뿌리 흔들어
하나님께 절대 순종할 때 유일한 권세 얻어
오늘의 위기를 은혜의 도구로 되바꿔놔야
한국의 장로교의 출발을 1885년 4월 5일 언더우드가 제물포에 들어온 것으로 여긴다면 어느덧 130년을 향해가고 있다. 그 후 한국의 장로교는 양적으로 전체 개신교의 약 60~70%를 차지하면서 급속한 부흥의 역사를 경험하였다. 그러나 부끄럽지만 오늘날 신자든 비신자든 장로교인이든 비장로교이든 공통적으로 한국교회를 비판하며 위기를 말하고 있다.
한국 개신교는 고작 130년에 불과하지만 2000년 기독교 역사와 500년 개신교 역사를 다 섭렵한 것 같다. 그것은 이미 서구교회가 범한 과거 기독교의 수많은 과오들을 이미 다 알고 있으면서도 그 전철을 밟고 있기 때문이다. 수많은 교단 분열, 셀 수 없는 이단들의 출현, 권력과 물질의 영향으로 인한 세속화, 교회와 성직자의 도덕적 타락 등 피를 흘리는 전쟁을 제외하고는 분란과 추태들이 거의 다 재현되고 있다. 무엇부터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공허하고 혼돈스럽다. 과연 고개 숙여 존경할 만한 목회자와 마음으로부터 박수칠 만한 교회는 있는가?
장로교의 뿌리가 흔들리고 있다. 장로교를 형성케 한 칼빈의 기독교강요, 그리고 기독교강요를 형성케 한 수많은 교부들의 교리와 저서들, 이들의 궁극적 기초가 되었던 성경의 권위가 위협받고 있다. 금년은 한국장로교가 100주년이 되는 해다. 여러 가지 의미를 부여할 수 있지만 무엇보다 장로교의 뿌리부터 찾아야 한다. 이를 위해 현재 한국교회를 위협하고 있는 몇 가지 근본적 문제들을 짚어보고자 한다.
흔들리는 성경의 권위를 견고히 하라
먼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권위에 대한 위협이다. 오직 말씀(Sola Scriptura)이라는 구호는 널리 알려져 있지만 정작 그 의미는 너무도 쉽게 간과되고 있다. 오직 성경이란 의미를 좀 더 깊이 살펴보기 위해 성경의 권위에 대한 위협을 세 가지 정도로 분류해 본다. 첫째 성경의 비평적 해석으로 인한 성경 권위의 무오성에 대한 위협, 둘째 사람(목회자)과 교회를 목적성으로 여김으로 인한 성경 권위의 유일성에 대한 위협, 그리고 교회내의 각종 행사와 프로그램의 치중으로 인한 성경 권위의 우선성에 대한 위협이다.
현대의 다양한 성서비평은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인간의 감동으로 된 하나님에 대한 말씀으로 인식시켰고 그 결과 성경의 권위가 실추되고 무오성이 의심받게 되었다. 물론 일면에서 이성적 과학적 역사적 학문성을 통한 해석으로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내용들을 보다 확실하게 해주는 긍정적인 면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2000년 전 있었던 일과 신앙고백, 그리고 교리들을 현대 비평적 시각으로 재해석하려는 시도에는 무리가 따를 수밖에 없었다. 이는 자칫 성경을 부정할 뿐만 아니라, 성경을 통해 신앙고백과 교리들을 형성케 하시는 교회의 역사 안에 계시는 하나님을 부정하는 어리석음을 범할 수 있다.
바른 교리와 신앙은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기반하고 있다. 물론 시대적 사회 환경의 변화는 교리적 특성들을 다르게 발전시킬 수 있지만 인간의 이성적 합리성과 과학적 실증성 더 나아가 역사적 교훈성을 바탕으로 성경을 해석하고 나아가 이 땅에서 신앙의 윤리적 유익성만을 강조하는 것은 인간의 연약함과 죄악성을 간과한 것이다. 인간의 이성과 역사적 실증들은 불완전한 것이다. 불완전한 것으로 완전한 것을 증명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어리석은 짓이다. 이는 칼빈이 기독교강요 초판 처음과 완결판 제1권 제1~2장에서 강조한 것들이다. 모든 선과 의는 오직 완전하신 구원주요 창조주인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며, 부패한 본성을 가진 인간에게서는 오직 죄와 허물만이 나온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지할 때 경건은 시작된다고 칼빈은 지적하고 있다.
성경은 오직 성경 자체와 그 저자인 성령으로만 그 권위와 무오성이 증명된다. 칼빈은 성령과 말씀은 결코 분리되어질 수 없는 유일한 권세를 가진 것으로 증거한다.
추락한 하나님의 권세를 견고히 하라
성경의 권위에 대한 둘째 위협은 목회자나 성도들의 회중인 교회가 그 요인이 되고 있다. 칼빈은 어디에도 인간과 교회 자체에 권세가 있다고 말하지 않았다. 기독교강요 초판 6장은 오직 모든 권세를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에 두면서 목회자나 성도 그리고 교회 안에 임마누엘하시고 내주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께 있다고 강조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누구시고 그 뜻이 무엇인지를 교훈하는 성경만이 권위와 능력이 있다는 ‘권세의 유일성’을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칼빈에게는 교회의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교황에게 권위를,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하여 교회의 예식과 전통의 권위를 중시하는 가톨릭이 하나님의 권세와 영광을 탈취하는 도둑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많은 목회자들이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도구나 은혜의 통로로서가 아니라 스스로 권세있는 자로 여기며 말하고 행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다. 나아가 각각의 직분이나 당회, 제직회나 공동의회의 이름으로 권세를 주장하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각 직분과 모임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순종할 때만 하나님의 권세가 나타난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구현되어질 때 하나님의 권위와 영광이 드러난다. 하늘의 땅과 모든 권세를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셨지 우리에게 주시지 않았다. 우리에게는 모든 권세를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 끝날까지 임마누엘 하시기에 그 분께 순종하면 그 권세는 우리 안에서 자유롭게 마음껏 구현되어지고 더 나아가 밖으로 증거되어 진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목회자나 성도 또는 각종 모임들을 보려하지 말고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 안에서 내주하시며 역사하시는 하나님만 바라보고 그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 교회는 직분이나 인간관계, 각종 회의의 결정으로 구현되는 곳이 아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도구이지, 하나님이 교회의 영광을 위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성례의 본질과 거룩성을 회복시켜라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에 대한 세 번째 위협의 요소는 은혜라고 여겨지는 각종 프로그램과 행사들이다. 각종 행사와 프로그램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듣고 구현하기 위해서 진행되기 보다는 관습과 전통에 따라 우선순위가 뒤바뀌는 경우가 많다. 교회는 예배의 공동체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데 그 목적이 있다. 오직 우리는 하나님을 믿음으로만 섬기며 믿음으로만 그분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 이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 하나님의 말씀이 모든 행사와 프로그램의 중심에 있어야 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집중되어야 한다. 그런데도 오늘날 말씀이 없는 행사와 프로그램이 얼마나 많은가. 눈에 보이는 화려한 볼거리로, 귀에 들리는 아름다운 소리로, 입을 즐겁게 하는 맛있는 음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육체적 존재이기에 앞서 영적 존재이기에 오직 말씀과 기도로만 거룩해 질 수 있다. 그래서 영이신 하나님을 닮아갈 수 있다. 교회는 이런 영적인 활동을 목적으로 하는 곳이기에 하나님의 말씀이 항상 우선되어야 한다. 말씀은 우리의 삶을 유익하게 하는 수단이 아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행복을 위한 목적으로 살지 않는다. 비록 이 땅에서 육체적으로는 고난과 역경의 모습으로 살지라도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서 산다.
칼빈은 경건한 자들은 현재 코앞을 바라보기 보다는 눈에 보이지는 않는 미래의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집중하여 묵상하는 자들로, 이 땅에서 영광을 누리기보다는 오히려 그리스도와 같이 십자가의 고난에 참여하는 자들이라고 했다. 또 남들의 시선을 받는 주인공이나 모든 것을 갖춘 주인이기보다는 언제든지 떠날 준비를 하며 몇 가지만으로도 자족할 줄 아는 나그네의 삶을 사는 자들이라고 묘사했다.
하나님이 우리 눈에 보이게 준 영적인 것은 오직 성례 밖에 없다고 어거스틴과 칼빈은 가르쳤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친히 재정하신 것은 오직 성찬과 세례뿐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공적으로 이 세례와 성찬을 중시 여기고 성례의 본질과 거룩성을 살리는데 무엇보다 주력해야 한다.
1559년에 칼빈의 지대한 영향을 받고 제네바에서 그의 조국으로 돌아온 존 낙스는 1561년 12월 5일 5명의 목사와 36명의 장로와 함께 스코틀랜드장로교총회를 조직해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를 채택함으로 장로교 역사의 출발을 알렸다. 이 신앙고백서는 성경이 교회가 아닌 성령의 조명 가운데 해석되어야 하며 성경만이 무오하고 절대적 권위를 가진다고 진술하고 있다. 장로교의 핵심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장로교라면 성경의 무오성과 권위를 유일하고 가장 우선적으로 여기는 칼빈의 가르침을 채택한 장로교의 뿌리로 돌아가야 한다. 작금 교회 안팎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들도 하나님의 섭리 중 하나라고 확신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그 말씀에 불순종하였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사사와 선지자들을 보내서 경고하시고 이방 민족을 통해 심판하셨다. 이는 이스라엘 민족의 회복을 위해 말씀으로 돌아오라는 가장 강력한 은혜의 도구였다. 그렇다면 한국교회에서 나타나고 있는 수많은 위기와 위협의 징조들도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말씀으로 돌아오라는 하나님의 은혜의 도구임이 분명하다. 하나님은 인류의 역사 이래로 당신의 뜻을 이루시지 않은 적이 없다.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였던 요한 크리소스톰은 그 당시 지진 속에서 살아남은 백성들을 향해 “땅이 흔들림은 하나님의 권능이 나타남이며, 땅이 잠잠해져 우리가 살아남음은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남이라”고 고백했다. 모든 역사의 흥망성쇠는 하나님의 섭리이다. 다만 우리는 이 아픔과 심판을 통해 하나님께 돌아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라는 분명한 메시지를 깨달아야 한다. (2012.2.27. 기독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