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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교육의 중요성 다시 일깨운 ‘신촌 살인사건’

에바다. 2012. 5. 10. 11:45

   가정교육의 중요성 다시 일깨운 ‘신촌 살인사건’    


   김병태목사

   (성천교회 담임목사)


자식은 여호와께로부터 온 유산이요, 여호와께서 주신 상급이다(시 127:3). 그렇다. 자식은 부모의 영광이요, 면류관이다. 너무나 소중한 선물이요 축복이다.


그런데 자식을 길러본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무자식 상팔자야!” 자식 때문에 잠을 설쳐보고 눈물을 흘려본 사람은 공감할 것이다. 자식이 아니라 웬수 같다.


그러나 싫다고 내버릴 수도 없다. 지겹다고 호적에서 지울 수도 없다. 그야말로 잘못 키운 자식이야말로 평생 가시처럼 고통을 더해준다.


자녀, 부모의 자랑이요 면류관이 분명하다. 그러나 자식 때문에 수치와 고통을 당하고 눈물 흘리는 부모들을 보면 남의 일처럼 여겨지지 않는다. 여기에 부모는 과제를 떠안는다. 그것은 ‘잘 키워야 한다’는 큰 부담감이다. 이 거룩한 부담감을 어떻게 풀어갈 것인가?


첫째, 부모들은 자녀가 어울려야 할 사람을 분별해 주어야 한다.


부모가 자녀들을 위해 해야 할 일은 너무 많다. 평생 해도 끝이 없다. 그 가운데 하나는 유능한 멘토와 코치가 되어주는 것이다. 부모는 자녀들을 위해 바른 삶을 분별할 수 있도록 지도해 주어야 한다.


사람은 누구와 어울리느냐에 따라 인생이 결정되어 진다. 물들기도 하고,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기도 한다. 그렇기에 부모는 자녀들이 어울리는 사람들을 신경 써 주어야 한다.


얼마 전 신촌에 있는 어느 공원에서 참혹한 일이 벌어졌다. 공원 산책로에서 대학생 한 명이 무참하게 죽었다. 어떤 사람이 대학생 곁에 두 남자가 서 있는 것을 목격했다. 그들의 손에는 무엇인가 들려 있었다.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경찰에 신고를 했다. 10여분 후에 경찰이 도착했다. 그런데 살해된 대학생은 그 자리에 없었다. 경찰이 수색한 결과 그곳에서 조금 떨어진 공원 내 풀숲에 감추어져 있었다.


그런데 문제의 심각성은 여기에 있다. 피살된 대학생은 목과 가슴 등 40여 곳이 흉기에 찔린 채 죽어 있었다. 세상에 이렇게 잔혹할 수가 있는가? 어떻게 이런 잔인할 일을 저지를 수가 있는가? 그런데 더 가슴 아픈 일이 있다. 대학생을 살해한 범인이 누구인지 아는가? 16세 남학생과 15세 여학생, 즉 고등학생이었다. 그리고 18세인 대학생 한 명이었다. 너무나 충격적인 일이 아닌가?


이들은 온라인을 통해 만났다. 서로 가까워지면서 밴드를 결성하기도 했다. 이런 친분을 통해 그들이 한 일이 무엇인가? 무참한 살인행각이다. 정말 잘못된 만남이었다.


자녀는 그들이 만나는 사람에 의해 악하고 나쁜 삶으로 이끌릴 수도 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한다.


“지혜로운 자와 동행하면 지혜를 얻고, 미련한 자와 사귀면 해를 받느니라.”(잠 13:20)


둘째, 부모는 자녀들에게 도덕성 교육을 해야 한다.


요사이 아이들을 보면 ‘개념 없다’는 생각이 저절로 든다. 예절도 모르고, 질서도 없다. 심지어 ‘저래선 안 되지’라고 하면서도 간섭하기가 무서운 아이들이다.


이러한 아이들을 위해 부모는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가르쳐 주어야 한다. 도덕성 교육 말이다. 인간에게는 마땅히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이 있다. 부모가 자기 자녀에게 바른 가치와 도덕성을 교육하지 않는다면 흔들리는 아이들은 걷잡을 수 없다. 부모가 매를 잡고 훈육을 하지 못하는데 어느 누가 바른 길을 가르쳐 줄 것인가?


셋째, 부모는 자기 자녀의 경계선 세우기를 도와주어야 한다.


우리는 주변에서 경계선에 대한 인식이 없는 아이들을 많이 본다.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을 마구하는 반면, 마땅히 해야 할 일은 하지 않는다. 이러한 아이들에게 명확하고도 일관성 있는 규칙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의 영역을 부적절하게 침해함으로 해를 끼친다. 반대로 어떤 사람은 자신의 영역을 보호하지 못해서 해를 입는다. 경계선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탓이다.


사람은 하고 깊다고 다 할 수 없다. 하고 싶어도 하지 말아야 할 일이 많다. 가고 깊어도 가지 말아야 할 곳이 많다. 그렇기에 부모는 자녀에게 정지신호를 분명하게 인식시켜 주어야 한다. 우리 아이들이 정지신호를 지키지 않고 경계선을 함부로 넘나들 때 사회는 불안으로 치닫게 된다. 그러니 자녀들이 정지신호를 지킴으로 경계선을 넘지 않도록 지도해야 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학생인권조례’라는 발상에 깊은 탄식을 한다. 물론 학생의 자유와 권리를 억압하고 통제하지 말자는 좋은 의도이다. 그러나 결과는 어떤가? 학생들의 경계선이 여지없이 무너졌다. 자유와 인권은 걷잡을 수 없는 방종으로 오용되고 있다.


어느 여학생이 치마를 짧게 줄여 입었다. 40대 여교사가 “벌점을 줘야겠으니 교무실로 가자”고 하면서 손을 잡아끌었다. 그러자 학생은 여교사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그리고 선생님의 뺨을 때리고 머리채를 잡아채는 등 폭력을 휘둘렀다. 여교사는 충격으로 그 자리에서 실신했다. 119 구급차로 병원에 호송돼 치료를 받았다. 정말이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그런대 재미있는 현상이다. 학교에서는 선도위원회를 열어 여학생에게 ‘10일간의 출석정지와 전학 권고’를 결정했다. 학교당국으로서는 이 정도 밖에 할 수 없는 실태가 되었다. 그러니 부모 스스로가 노력해야 한다. 자녀의 경계선 긋는 교육을.


넷째, 부모는 아이들의 롤 모델이 되어야 한다.


부모는 아이들에게 최고의 스승이다. 그렇기에 자녀의 삶을 망치지 않으려면 바른 삶을 보여주어야 한다. 아이들은 배운 대로 살아간다. 그래서 부모노릇하기가 어렵다고들 한다.


어떤 사람이 아프리카의 성자로 불리는 슈바이처 박사에게 물었다. “박사님, 성공적인 자녀 교육을 할 수 있는 방법 세 가지만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그러자 슈바이처 박사는 대답했다. “첫째, 본보기요. 둘째 역시 본보기요, 셋째도 본보기이지요.”


그렇다. 부모는 본을 보임으로 자녀를 교육해야 한다. 자녀교육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니다. 말로 하는 교육은 쉽다. 문제는 행동으로 보여주는 삶의 교육이다. 자식은 아비의 등을 보고 자란다고 하지 않던가!


다섯째, 당신의 자녀에게 건강한 날개를 달아주라.


공부에 찌들어 힘들어 하는 아이들을 보는가? 날개 꺾인 아이들을 말이다. 아이에게 건강한 날개를 달아주라. 그렇기 위해서는 자녀를 기대하라. 부모도 기대하지 않는 아이를 그 누가 기대해 줄 것인가? 설령 형편없는 아이라고 생각될지라도 기대를 저버리지 말아야 한다. 부모가 기대를 저버린 아이는 세상 한 모퉁이에서 절망의 눈물만 흘리고 있을 따름이다.


부모는 자녀들의 잠재성과 가능성을 인정해주어야 한다. 아이의 장점과 잘한 것을 찾아서 인정해주고 칭찬해 주라. 인정받지 못하고 칭찬받지 못한 아이의 자아상은 마구 구겨져 있을 따름이다. 아이를 향해 아낌없는 격려를 보내주라. 비록 실수를 할지라도 남들이 보내주지 않는 격려와 응원의 박수를 보내주라.


아인슈타인은 20세기 최고의 천재로 꼽힌다. 그런데 알고 있는가? 천재 아인슈타인이 네 살이 되도록 말도 제대로 못했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그 아이를 가리켜 저능아라고 말했다. 물론 학교에 가서도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다. 어느 날 선생님은 아인슈타인의 손에 쪽지를 들려 어머니에게 보냈다. “학생의 지적 능력으로는 앞으로 어떤 공부를 해도 성공할 가능성이 없음.”


얼마나 절망적인 일인가? 수치스럽기도 하고, 화가 치밀 수도 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의 어머니는 얼굴 한 번 찡그리지 않았다. 그리고 아인슈타인에게 웃으며 말했다. “걱정할 것 없다. 남과 같아지려면 결코 남보다 나아질 수 없는 법이다. 하지만 너는 남과 다르기 때문에 기필코 훌륭한 사람이 될 것이다.” 아인슈타인이 세계적인 물리학자가 될 수 있었던 건 바로 이런 어머니 덕분이 아닐까?


부모의 한계를 인정하고 하나님께 의존하라.


최근 스트레스를 줄이는 ‘숲 태교’에 대한 바람이 불고 있다. 뱃속에 있는 아이에게 자연의 소리를 들려주고 자연을 느끼게 만들어주기도 한다. 어디 그 뿐인가? 산모와 태아의 인권을 좀 더 챙기자고 하면서 ‘인권 분만법’에 관심을 갖기도 한다.


이렇듯 자녀교육을 위해 애쓰고 헌신을 기울인다고 해도 결코 ‘인간 부모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는 없다. 부모의 헌신적인 노력에 비해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절망한다. 오죽하면 부모 자리를 내놓고 싶다고 하겠는가?


목숨을 걸고 아이를 낳아 숨어서 양육했던 모세의 부모를 생각해 보라. 애굽의 왕에게 들키기라도 하면 즉각 사형될 수 있다. 그러나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아이를 지켜주고자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개월 밖에 숨겨줄 수 없었다.


자식을 아무리 사랑하지만, 자식을 위해 무엇이라도 하고 싶지만, 인간 부모로서 한계를 느낀다. 그래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입을 수밖에 없다. 방치나 무관심은 아닐지라도, 하나님이 양육하시도록 우리의 자녀를 하나님의 손에 부탁해야 한다.



-크리스천투데이 사설/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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