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혁명을 말한다
정연철목사
(삼양교회)
과거 교회가 세상을 이끌던 시대가 있었다. 교회가 선봉에 서서 시대적 지평을 열고, 세상은 그런 교회의 말을 지지하며 따랐다. 그러나 지금은 완전히 반대다. 세상이 지평을 열고, 교회가 그 뒤를 따라간다. 이런 모습을 믿음의 눈으로 애써 부인하려해도 안타깝게도 부인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몇 만, 몇 천이 모이는 대형교회가 곳곳에 수두룩한데 왜 교회가 힘을 잃고 있을까? 도대체 무엇이 문제일까?
원인을 말하자면 여러 가지다. 기복적이며 현세적 이기주의 현상, 반이성적 열광주의, 목회자들에 대한 불신, 교회의 분열과 배타적인 양상, 교회의 기업화 등 지금까지 알려진 이유가 다양하다.
그러나 이런 것들보다 더 가슴을 저미게 만드는 현상이 있다. 바로 이런 현실을 보고도 애통해 하지 않는 무기력증이다. 거룩을 향한 갈망이 식어지고 있는 우리 마음이 문제다. 궁극적으로 우리는 세상과 맞서 싸우겠다는 복음의 혁명정신을 잃어버렸다.
개혁과 혁명은 다른 말이다. 개혁은 시간을 두고 서서히 바꾸어가는 것을 말하고, 혁명은 급격하지만 완전히 변혁하는 것을 말한다. 지금 우리가 연약해 진 것은, 시대적 충돌을 위한 혁명적 에너지를 퍼붓기보다, 그런 행동들을 신비주의적 일탈로 여기며 그저 근본만 퇴색되지 않을 범위 내에서 시대적 사명을 찾곤 했기 때문이다.
사실, 지금까지 기독교 역사들은 개혁을 지향해 온 경우가 많았다. 세상과 충돌하기보다는 세상을 온건하게 타일러 온 것이다. 그토록 암흑기였던 중세시대조차 급진적인 혁명보다는 개혁 쪽을 택해 왔다. 다행히 지금까지의 시도는 성공적이어서 기독교를 세상 속에서 세상과 제법 잘 어울려 지낼 수 있도록 만들어 왔다.
그러나 그런 온건한 개혁정신으로 인해 우리는 또 다른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더 이상 뜨겁지 않게 된 우리는 이제 거꾸로 세상으로부터 복음과 상관없는 열기를 공급받아야 하는 현실에 직면하게 되었다. 언제부터인가 세상은 연약해진 우리 기독교를 개혁하겠다고 나서고 있고, “은과 금이 내게 있으니 세상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어라”고 외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도전에 교회는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슬피 울어도 가슴을 치지 않고서”(마 11:17) 유순히 세상에게 길들여진 공동체가 되어 버렸다.
이제는 온건한 개혁만으로는 부족하다. 세상 전체를 부정하고 시대를 뒤엎으려는 혁명이 위험한 것인지, 힘없는 현실로 인해 세상과 타협하며 사는 것이 위험한 것인지 냉철하게 판단해야 할 때가 되었다. 지금의 교회는 세상의 틀을 완전히 벗겨내고 새롭게 거듭나야 한다. 이 시대를 향한 간절함은 개혁보다는 오히려 혁명 쪽이어야 한다.
우리 가슴에 이 시대를 향한 갈급함이 남아 있는가?
우리의 가슴 속 열망이 식어버리는 순간, 기독교는 천박한 수준으로 전락하게 된다. 기독교는 세상에 비위를 맞추며 살지 않는다. 성령으로 충만히 채워지게 되면, 가슴이 뜨거워 몸부림쳐지는 것이 정상이다. 현실에 안주하기보다 현실 너머의 세계를 바라보며 달려가는 것이 정상이다. 거기에서 기독교는 어쩔 수 없이 세상과 충돌하게 된다.
고무적인 소식이 하나 있다. 몇 해 전부터 인도네시아에서 기독교 혁명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 시사 주간 <타임>지는 무슬림 인구가 지배적이었던 인도네시아에서 기독교가 급격한 성장을 통해 세력을 확산해 가고 있다고 보도했다. 아직까지도 인도네시아라고 하면 무슬림들이 지배적인 나라, 기독교 박해 국가라는 인식이 강하다. 그러나 공개적인 기독교 야외 집회가 열릴 정도로 최근 분위기는 달라지고 있다.
인도네시아 중부 테망궁의 한 광장에서 주기적으로 수백 명의 사람들이 모여 혁명적인 집회를 벌이고 있다. 수도인 자카르타에는 미국 바이블벨트에서나 볼 수 있는 광경이 낯설지 않게 연출된다. 몇 년 사이 새롭게 지어진 대형교회들이 하늘 높이 솟아 있고, 교회가 아직 지어지지 않은 곳에서는 호텔이나 상점 등에서 예배가 드려지는 일도 흔하다. 자카르타를 비롯한 대도시에서는 주일예배가 쇼핑만큼이나 인기 있는 주말활동 중 하나가 되어가고 있다. 인도네시아 케이블 TV는 24시간 기독교 방송을 내보낸다. <타임>지는 이같은 변화를 ‘종교혁명’이라고까지 표현했다.
이 시대는 온건한 개혁이 아닌 뜨거운 혁명이 필요한 시대다. 세상과 함께 유순한 동행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성령과 함께 급진적 충돌이 필요한 시대다. 한 시대가 망하는 것은 현실이 위협적이어서가 아니다. 시대를 부여잡고 혁명적으로 부르짖는 자가 없기 때문이다.
이 시대의 엘리야는 바로 지금의 그리스도인들이다. 갈멜산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450대 1이 아니라 4만 5000대 1이라도 이 시대를 부여잡고 “하나님은 살아 역사하신다”라고 당당히 외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있다면 바로 그가 서 있는 곳이 영적 갈멜산이 된다.
기억하자. 우리는 이 시대를 위해 부름 받은 ‘왕 같은 제사장’들이다. 오늘 이 시대를 부여잡고, 혁명적인 기도로 뒤흔들어 보자. 눈물로 뒤흔들어 보고, 갈급한 부르짖음으로 뒤흔들어 보자.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 기도를 들으시고, 이 시대를 고쳐주실 것이다.
-기독신문논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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