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사마리아인의 법
‘착한 사마리아인 법안’이 다음 주 국회에 제출된다고 한다. 한마디로 이 법은 ‘위험에 처한 사람을 보고도 도움을 주지 않을 경우 처벌하는 것’이다. 이게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는 법이 아니다. 프랑스에서는 자기가 위험에 빠지지 않는데도 위험에 처해있는 사람을 구해주지 않으면 3개월 이상 5년 이하의 징역, 혹은 360 프랑 이상 15000 프랑 이하의 벌금에 처해진다. 프랑스 말고도 독일, 스위스, 네덜란드, 러시아도 이미 비슷한 조항을 둔 법률을 시행하고 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예수가 제자에게 비유를 들어 가르친 것인데 신약성경 누가복음에 나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다가 강도를 만났다. 이 사람은 옷이 벗겨지고 상처를 입은 채 죽어가는 상태로 길 옆에 버려져 있었다. 얼마 후 제사장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이 사람을 봤다. 그러나 못 본 채 무시하고 지나갔다. 다음에는 레위인이 이 사람을 발견했지만 역시 외면하고 그냥 지나쳤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은 이 사람에게 다가가 포도주와 기름을 적셔 상처를 씻겨주고 싸매주는 치료를 해주었다. 사마리아인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이 사람을 주막으로 데려가 밤새 간호하며 보살폈다. 다음날 사업상 길을 떠나야 했던 사마리아인은 주막 주인에게 은전 두 닢을 주고 부상당한 사람을 돌봐줄 것을 당부하면서 “만약 돈이 더 들면 돌아오는 길에 갚겠다”는 약속까지 했다는 내용이다. 착한 사마리아인 법이 만약 제정된다면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처벌 대상이다.
여담이다만 성경을 살펴보면 사마리아인은 그동안 유대인으로부터 '나쁜' 사람으로 인식돼 왔다. 따라서 그 시대에 예수가 그 사마리아인들을 착한 사람으로 묘사했다는 점은 매우 각별한 의미가 있었다.
지난 해 영국의 일간지 ‘인디펜던트’가 르포기사를 통해 사마리아인이 현재도 있는지 짚어봤다. 로마제국 말기에 사마리아인의 수는 수백만 명에 달했지만, 한 세기 전에는 불과 146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생활수준이 높아지고, 다른 종교에도 개방적인 자세를 취한 이후부터는 조금씩 구성원이 늘어 현재는 공동체가 750명 규모로 늘었다.
왜 민족 구성원의 수가 크게 줄었을까. 추정컨대 20세기 중반까지는 이어진 근친결혼 때문이 아닐까 싶다. 사마리아 민족은 근친결혼이 일상화되다시피 해 한 때 전체 공동체 인구의 7% 가량이 심각한 유전적 결함을 나타내기도 했다. 이 공동체의 폐쇄성을 보여주는 단면이다. 지금은 어떨까. 결혼하기 전에 꼭 유전자 검사를 거친다고 한다. 그래서 공동체의 유전자 이상 비율도 절반으로 감소했다고 한다. 사마리아인들의 폐쇄성은 유대인에 대한 종교적 경멸에서 비롯됐다. 유대교가 정통의 믿음으로부터 변질됐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이런 관념도 지금은 많이 누그러진 상태라고 한다.
사실 곤경에 빠진 이웃을 돕는 것은 인간의 당연한 도리이다. 이건 기독교만의 교훈이 아니다. 한 칼럼을 보니 불교, 유교 등 다른 종교의 가르침에서도 ‘착한 사마리아인’은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며 소개한 내용이 있다. 신라 성덕왕 때의 ‘노힐부득과 달달박박’ 이야기이다. “친구인 두 사람은 함께 출가해 백월산에 암자를 짓고 수행했다. 어느 초파일 밤에 젊고 예쁜 여인이 산에서 길을 잃었다. 여인은 달달박박의 암자에 찾아가 하룻밤 묵기를 청했다. 박박은 ‘절은 깨끗해야 하오’ 하고 거절했다. 여인은 노힐부득에게 갔다. 부득은 ‘여인이 묵을 곳은 아니지만 날이 저물었으니 어쩔 수 없구려’ 하고 받아들였다. 이튿날 ‘부득이 지난 밤 필경 파계를 했겠지’ 하고 박박이 찾았을 때 부득은 온몸이 금빛을 발하는 미륵불로 변해 있었다. 여인은 관음보살이었던 것이다. 뒤늦게 깨달음을 얻은 박박도 친구의 도움으로 성불했다.” 이런 내용이다.
착한 사마리아인 법의 제정에 대한 이견은 뚜렷하다. 우선 ‘법 제정보다는 주민들 스스로 신고정신을 키우도록 하면 어떨까’라는 의견이다. ‘처벌이 무서운 것’과 ‘곤경에 처하는 사람을 돕겠다는 환난상휼의 정신’이 서로 맞아떨어지면 모를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예상해봐야 한다는 지적이다. 예를 들어 누군가 조직폭력배에게 끌려가는 것을 본 사람이 통신수단이 마땅치 않아 신고하지 못하는 바람에 처벌당할 처지에 놓였다고 상정해 보자. 어쩔 수 없는 상황임을 구차하게 입증하고 소명하느라 애 먹어야 한다. 이 과정에서 ‘비겁한 사람’이라는 비난도 받아야 할 것이고. 전통적으로 도덕적·윤리적 영역에 속했던 부분인데, 이를 법적으로 강제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는 것이다.
다른 의견은 이렇다. 거리의 불법, 타인의 불운·불행을 못본체하고도 ‘현명한 처신’쯤으로 여기는 세태에 경종을 울려야 한다는 것이다. 2001년 헌법재판소는 대전에서 집단폭행당하던 한 청년을 도운 대학생에게 정상을 참작해 폭행혐의 기소를 유예한 검찰 처분에 대해 쐐기를 박았다. “사회정의에 반하는 중대한 잘못”이라면서 “곤경에 처한 사람을 도와주기 위해 폭행 제지에 나서는 시민의 용기는 법질서를 수호하고 건전한 사회기풍을 진작하기 위해 법이 보호해야 할 중요한 가치”임을 강조했었다. 상 줘야 할 사람에게 유죄의 의미가 함축된 기소 유예라니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방관자 사회, 법 제정에 관한 이견은 있지만, 이런 논란이 필요 없을 정도로 국민의 양심과 용기가 강대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은 하나가 아닐까 생각된다. (2010.7.29.소리/김용민 시사평론가)
인용 자료
경향신문 2010년 7월 29일자 “[여적] 착한 사마리아인법”
문화일보 2010년 7월 28일자 “[사설] 사회연대 위한 ‘착한 사마리아인法’ 적극 검토해야”
부산일보 2010년 7월 28일자 “[밀물썰물] '착한 사마리아인 법'”
연합뉴스 2009년 6월 8일 출고 “사마리아인들, 어디서 어떻게 살고있을까”
한국일보 2005년 11월 16일자 “[서화숙 칼럼] 어린이를 위한 착한 사마리아인의 법”
'말씀의 은혜 > 교회법·특별기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청빙위원회의 청빙은 청빙인가, 초빙인가, 아니면 채용인가? (0) | 2010.09.17 |
---|---|
담임 목사 청빙에 대한 몇 가지 제안 (0) | 2010.09.13 |
신약성경에 나타난 목사 청빙 (0) | 2010.09.08 |
신용회복, 개인파산, 회생제도 (0) | 2010.09.06 |
아름다운 교회와 추한 교회 (0) | 2010.08.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