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의 은혜/신앙,시사,목양 칼럼

부봉교회 이현속(李鉉續) 장로

에바다. 2012. 1. 13. 13:36

 

 

                평양 형무소에서 옥사한 이현속 장로
 

   이현속(李鉉續, 1896~1945) 장로는 경상남도 함안군 산인면 부봉리에서 아버지 이수목과 어머니 하구류 사이에서 출생하였다. 어린 시절 마을에서 운영하는 한문서당(漢文書堂)에 다니면서 한문을 터득하였다. 가난한 농촌에서 자란 이현속은 가을 하늘만 쳐다보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어서 “누가 이 하늘을 만들었을까!”하는 질문을 늘 품고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부모님으로부터 나라가 망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바로 그날이 1910년 한일병탄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 후 함안 장날에 아버지를 따라 장에 갔다가 긴 칼을 차고 다니는 일본 헌병을 보고 그만 질겁하고 말았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가정을 이루게 되면 어느 정도 안정된 생활을 하게 될 것으로 생각하였고 그해 12월 중매로 같은 면에 사는 홍선이 양과 결혼식을 올리고 신방을 꾸몄다.


   막 시집을 온 신부는 새벽에 울리는 종소리를 듣고 “저 종소리가 무슨 소리입니까?”하고 물었다. 부봉리에는 부봉교회가 있었기에 교회에서 치는 종소리라 설명하자 교회에 같이 다닐 것을 간청했다. 따라서 부부는 부봉교회 새벽기도회에 첫 교회 출석을 하였으며, 이때 그는 예수를 믿으면 가족이 큰 복을 받을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이현속은 처음부터 어찌나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던지 들녘에 나가면서 그가 부른 찬송소리가 그렇게 은혜가 되었다고 한다. 부봉교회는 그를 집사로 임명을 하였으며, 그는 집사로 임명을 받자 해마다 겨울 농한기가 되면 진주 선교부에서 운영하는 달(月)성경학교를 매년 다녔으며, 3년차가 되자 달성경학교에서 진주 달 성경학교 수료증을 받게 되었다. 이렇게 그의 신앙은 해가 갈수록 성장하였다. 하지만 그가 사는 곳은 가난한 지역이라 전도사가 부임해도 곧 도시로 나가기 일쑤였기 때문에 강단이 빌 때마다 짧은 성경지식을 갖고 설교하던 것이 계기가 되어 그 교회 영수로 임명을 받고 더욱 열심히 교회를 섬기었다.


   이현속은 1925년 1월 18일 부봉교회 교인들과 부봉리에 사는 친구들의 축하를 받으면서 장로장립을 받았다. 이미 진주 선교부에서 실시한 달(月)성경학교를 수료 하였지만 장로가 된 후에는 정식으로 성경학교를 다녀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진주성경학교 2학년에 편입을 하고 수업을 받는 한편 부봉교회 장로로서 열심히 봉사를 하였다. 진주성경학교 3년 과정을 이수하고 졸업을 하자 진주 선교부에서는 그를 1927년 3월 창영군에 있는 영산교회로 파송하였다. 뒤이어 1928년 4월에는 진양 문산교회로 전도사로 부임하여 사역을 하였다. 그가 가는 곳마다 교회가 부흥되자 진주 선교부에서는 다시 그를 하동교회로 파송을 하였다. 그런데 하동교회 주변에는 기도처로 화계교회, 악양교회, 적양교회, 북천교회 등의 교회가 있었는데 그가 순회 선교사로서 교회를 관리하였다. 1933년 9월에는 산청 덕산교회에 시무하면서 생초교회를 개척하기도 하였다.


   이 무렵 진주 선교부에서는 그를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신학할 수 있도록 추천을 해 1935년 4월에 평양장로회신학교에 입학을 하게 되었다. 그는 기숙사에 기숙하면서 주일이면 평양에 있는 장대현교회를 비롯해서 평양 서문밖교회 등 여러 교회를 순회하면서 그 유명한 목사들의 설교를 듣고 많은 감동을 받았다. 평양장로회신학교가 방학을 하게 되면 그 긴 기간 그냥 보낼 수 없어서 1938년 7월에 산천군 생초면에 면 소재지에 생초교회를 개척 설립하였다. 이때 일제는 산청에 산청신사를 마련해 놓고 지역 교회 목회자들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하였다. 그러나 이에 불응했다 하여 거창경찰서에 연행되어 3일간 심한 고문을 받고 출감을 하였다.


   다시 9월이 되자 평양에 올라가 학교를 다니고 있는데 뜻하지 않는 비보를 듣고 그만 놀라고 말았다. 1938년 9월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열렸던 조선예수교 장로회 제27회 총회에서 신사참배 결의를 하였다. 이때 4개 선교부에서 파송 받아 나온 선교사들은 학교를 폐쇄하고 모두 선교부로 돌아가고 말았다. 여기에 친일세력에 앞장섰던 채필근 목사는 평양신학교란 이름으로 평양신학교 간판을 내걸고 문을 열었다. 그러나 이현속 전도사는 그 길로 평양장로회신학교에 자퇴서를 제출하고 진주 선교부에서 운영하는 배돈병원 및 배돈교회 전도사로 사역을 하였다.


   그런데 1940년 8월 19일 배돈병원과 배돈교회에서 전도사로 사역하던 이현속 장로는 신사참배를 반대했다는 죄목으로 1940년 8월 19일 사천경찰서에 수감되고 말았다.


   그해 12월 5일에는 부산경찰서로 부산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고 천황모독죄와 불경죄라는 죄명으로 형이 확정되어 1941년 7월 10일 평양형무소로 이감되었다. 독방에 수감된 이현속 장로는 매일 같이 감방에서 찬송을 불렀다고 한다. “환란과 핍박 중에도 성도는 신앙 지켰네”를 목이 터져라 부르면 감방을 지키고 있는 간수가 소리를 고래 고래 지르면서 야단을 쳤고 하지만 그는 뒤질세라 더 큰 소리로 찬송을 불렀다고 한다.


   결국 이현속 장로는 1945년 5월 23일 해방을 불과 3개월 앞두고 옥사하고 말았다. (2012.1.14. 한국장로신문 / 김수진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