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폭력이 처벌로 해결될까
피해자와 가해자를 모두 살리는 회복적 정의에 눈뜰 때
이재영(한국평화교육훈련원 원장)
고등학교 1학년이었던 박 모 군은 같은 반 최 모 군에게 자신을 무시한다는 이유로 어느 날 학교 화장실에서 몇 차례 구타를 당했다. 제대로 방어하지도 못하고 일방적으로 얻어맞은 박 군은 그 후 계속해서 최 군의 괴롭힘에 시달려야만 했다. 반에서 다른 급우들이 볼 때 대놓고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방과 후에 단둘이 있는 자리에서만 때리고, 돈을 가져오게 하고, 늦게까지 집에 보내주지 않았다. 최 군이 다른 이유로 타교로 전학을 간 이후에도 계속된 괴롭힘은 점점 강도가 심해졌고, 담뱃불로 박 군의 털을 태우고 몸에 화상을 입힐 정도가 되었다. 급기야 최 군은 인터넷에서 본 동영상을 본떠서 성추행과 고문을 일삼기까지 했다. 6개월 이상 지속된 괴롭힘은 박 군의 친구가 박 군을 억지로 경찰서로 끌고 가 신고를 하게 하는 것으로 막을 내렸다. 박 군은 자신이 당한 일이 세상에 알려진다는 생각에 창피함과 걱정이 앞섰고, 최 군에게서 보복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피해자와 가해자가 한자리에 모이다
재판장과 피의자, 보호자가 모이는 평소와 달리, 이날 서울가정법원 화해권고실에는 가해자와 보호자, 피해자와 보호자, 친구, 담임교사, 상담사까지 자리를 같이했다. 어렵게 자리를 같이한 양측과 관계자들을 격려하며 화해권고가 시작되었고, 각자의 아프고 힘든 기억을 공유하는 시간을 가졌다. 가장 먼저 발언권을 얻은 피해자는 준비해온 종이 석 장을 꺼내 자신이 겪은 아픔과 분노를 하나하나 읽어 내려갔다. 최 군에게 이야기하고 싶었던 분노와 울분, 억울함을 눈물과 함께 쏟아놓았다. 모임 자리는 후회와 연민의 눈물로 가득 찼고, 누구도 쉽사리 말을 꺼낼 수 없는 무거움이 내려앉았다. 피해자의 이야기를 들은 가해자와 그 보호자들은 박 군이 어떻게 지내왔는지 알지 못한 채 자신들 입장에서 문제를 풀려고 했던 모습을 후회하며 예의를 갖춰 사죄했다. 그리고 가장 큰 위로와 도움이 필요한 박 군과 어머니의 요구를 받아들여 변상금을 지급하기로 기꺼이 합의했다. 담임교사도 제자의 아픔을 헤아리지 못한 것을 후회하며 사과했고, 박 군을 좀 더 이해하고 도와주기로 약속했다. 처음에 박 군이 가해자를 직접 만나는 것을 우려하고 반대하던 박 군의 상담사도 박 군이 용기를 내서 상대를 대면하고 마음속 이야기를 털어놓는 것을 보면서, 이제 박 군이 피해자의 심리에서 벗어나 생존자의 단계로 옮겨가고 있다는 사실을 반갑게 받아들였다. 마지막 발언 기회를 얻은 피해자는 가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원래는 가장 심한 벌을 받게 해달라고 했는데, 다 이야기하고 네가 반성하는 모습을 보니 이제는 네가 더 좋은 애가 되었으면 한다. 사실 그게 나에게도 좋은 거니까. 그리고 나에게 했던 일을 다시는 그 누구한테도 하지 않기를 바란다. 잘 지내라.” 그러자 내내 고개를 들지 못하던 가해자가 눈물을 흘리며 대답했다. “그래, 고마워. 그리고 미안하다. 다시는 그렇게 하지 않을게.” 이 말을 최 군이 그냥 처벌을 덜 받기 위해 꾸며낸 형식적 발언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자신의 잘못으로 생긴 피해와 아픔을 직접 듣고 그것을 인정한 사람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진심 어린 이야기임을 모두 느꼈기 때문이다.
엄벌주의, 무엇이 문제인가
피해자와 가해자 양측이 같이 만나 자신들의 문제를 직접 이야기하고 해결책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피해자-가해자 조정/화해 모임이라고 한다. 물론 전문훈련을 받은 조정자가 전체 과정을 진행한다. 이러한 시도는 ‘회복적 정의’라는, 범죄와 정의를 바라보는 새로운 패러다임에 기초한다. 제삼자(학교나 사법부)가 피해자의 이름으로 가해자를 처벌하는 것이 정의의 일반적 형태인데, 이는 ‘응보적 정의’의 패러다임에 기초한다. 응보적 정의는 가해자를 처벌함으로써 정의를 이루고 처벌을 강화하여 폭력을 없앨 수 있다는 엄벌주의(중벌주의)에 기인한다. 하지만 이러한 엄벌주의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심각한 왜곡 현상을 가져온다.
첫째, 처벌의 목적은 처벌 자체가 아니다. 처벌의 목적은 가해자가 처벌을 통해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다시는 그런 행동을 하지 않도록 하는 데 있다. 하지만 많은 경우, 처벌은 가해자들이 자신에게 닥칠 처벌을 (할 수만 있다면) 최소화하는 데 초점을 두게 만든다. 하루아침에 범죄자 자식을 두게 된 부모는 최선을 다해 자식을 보호하려고 한다. 물론 자녀를 보호하려는 의도는 잘못이 아니지만, 가해자로 하여금 자신이 한 행위로 피해를 입은 사람들의 아픔을 알고 필요를 채우는 데 초점을 맞추지 못하게 하는 한계가 있다. 결국 왜 자신이 처벌을 받는지, 무엇이 상대를 그토록 아프게 했는지를 추상적으로만 이해한 채, 자신에게 주어진 벌을 받아들이게 된다. 대개 처벌을 받는 가해자들은 자신이 받는 비난과 처벌을 억울하게 생각하기까지 한다. 처벌 목적에는 문제가 없지만, 방법이 그 취지를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 피해자의 소외 현상이다. 정의를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하는 사람은 피해자다. 피해자가 자신이 입은 피해와 범죄로 빼앗긴 스스로에 대한 통제권을 회복하여 온전한 자아로 돌아오도록 힘을 실어주어야 한다. 그럼에도, 처벌 강화는 결과적으로 처벌 대상인 가해자에게 초점을 맞출 수밖에 없다. 학교 폭력 문제가 심각할수록 가해 학생의 처리 방법에 사람들의 관심이 쏠리고, 그 해결 과정에서 응당 지원받아야 하는 피해자의 필요는 소외되고 만다. 피해자의 필요와 요구를 듣고 그에 맞춰 해결책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처벌(통제) 권한을 가진 사람이나 집단의 편의에 의해 해결책이 쏟아져나오고 있는 것이다. 결국 어떤 해결책이 나오더라도 당사자인 피해자가 얻는 실익은 거의 없고, 혼자 떠안아야 하는 고통과 책임은 그대로 남는다.
셋째, 처벌 이후의 문제다. 처벌을 강화함으로써 더 강력하고 단호한 벌을 내릴 수는 있다. 하지만 처벌 이후 가해자의 변화에 대한 아무런 확신이나 보장이 없다. 벌을 받으면 다시는 그러지 않으리라는 순진한 믿음만으로 처벌이 이뤄진다. 물론 처벌 이후에 또다시 잘못하면 그때는 더 심한 벌이 기다리고 있다. 이런 식으로, 경범에서 시작하여 흉악한 중범으로 바뀌는 소위 재범자들이 양산된다. 이들에게 처벌이란 받기만 하면 되는 면죄 수단이요, 자신의 행동 결과를 직접 대면하지 않아도 되는 ‘편리한 장치’다. 자신의 행동이 미친 실제적인 영향을 단 한 번도 직접 보거나 듣지 못한 채 나쁜 사람이란 낙인이 찍히면, 그들의 선택은 오히려 협소해질 수밖에 없다. 청소년 범죄에서, 처벌 대상인 가해 소년이나 피해자 모두 다시 학교와 지역 공동체로 돌아와야 할 청소년들이다. 이들을 영원히 격리할 수 없다면 스스로 책임 있는 공동체 구성원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한다. 엄벌주의는 오히려 그 기회를 박탈하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사회 공동체가 떠안아야 한다.
회복적 정의
이에 반해 회복적 정의의 관점에서는 잘못된 행동(또는 범죄)을 단순히 학칙이나 법을 위반한 행위로만 보지 않는다. 회복적 정의에서 말하는 잘못은 관계를 훼손한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훼손된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더 많은 관심과 에너지를 집중한다. 회복적 정의의 관점에서는 피해자와 가해자가 모두 회복 대상이고 이들의 요구와 필요를 채우는 것이 정의를 이뤄가는 과정의 핵심이다. 이 과정이 적절하고 균형 있게 이뤄졌을 때 그 결과로 화해와 치유가 나타날 것이다. 회복적 정의의 특성을 아래와 같이 살펴볼 수 있다.
잘못된 행위는 인간관계를 훼손하고 그로 인해 발생한 피해는 필요를 발생시킨다. 그리고 그 필요는 누군가가 채워야 하는 필요이기에, 책임을 수반한다. 그 책임의 핵심은 피해를 회복하고 잘못을 바로잡는 것으로 이뤄질 수 있다. 이것이 회복적 정의가 가정하는 전제다. 이런 전제를 바탕으로, 회복적 정의는 세 가지 원칙을 갖게 된다.
첫째는 회복이다. 잘못된 행위 때문에 발생한 피해를 최대한 복구하는 것이다. 이 피해는 피해자가 겪은 물질적, 심리적, 시간적 피해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가해자도, 이 사건에 연루된 가족 공동체와 지역 공동체도 피해 대상이 될 수 있다. 한 사건으로 인한 피해를 최대한 회복하는 것이 회복적 정의가 강조하는 가장 중요한 원칙이다.
둘째는 책임이다. 누군가가 책임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책임을 질 때 그 목적에 가장 부합하게 된다. 처벌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자신의 행위가 미친 영향을 직시함으로써 자발적으로 인정하고 책임을 느낄 수 있는 기회를 가해자에게 주어야 한다. 회복적 정의는 가해자를 봐주자는 온정주의와는 다르다. 자발적 책임의 힘은 바로 자신이 한 행동의 결과와 영향을 정확히 이해하는 데서 출발한다. 따라서 책임을 진다는 것은 처벌을 달게 받겠다는 것보다 더 중요한 사실, 즉 자신이 야기한 피해를 정확히 이해하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제삼자에게서 받는 처벌보다 자신으로 인해 발생한 피해를 직접 듣고 인정하는 것만큼 힘든 처벌도 없다.
셋째는 참여다. 회복적 정의에서 말하는 정의를 이루는 주체는 처벌권을 가진 권력이나 힘 있는 제삼자가 아니다. 정의를 필요에 대한 적절한 대응으로 이해한다면, 그 필요를 가장 잘 나타내는 사람도 당사자고 가장 잘 대응해줄 수 있는 사람도 바로 당사자다. 당사자들이 직접 문제 해결의 주체로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받음으로써, 스스로 지킬 수 있는 약속을 하고 그 책임을 무한히 지는 것이다. 또한 어떤 사건으로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는 공동체의 참여를 통해, 범죄를 개인의 선택과 비행의 문제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연대 책임이 있는 공동의 이슈로 바라보게 만든다. 결국 어떤 사건이 발생해서 공동체가 깨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공동체가 해결에 함께 참여함으로써 공동체성이 강화된다.
평화 사역, 교회를 향한 호소
최근 언론의 주요 이슈로 등장하고 있는 학교 폭력의 심각성과 그 해결 방안에 깊은 우려를 느낄 수밖에 없다. 채 피지도 못한 어린 학생들이 또래의 괴롭힘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21세기 한국 사회의 현실에 분노한 성난 군중을 달래는 가장 간편한 방법은 일벌백계의 뜻을 천명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무언가 대책을 들은 군중은 다시 바쁜 일상으로 발길을 재촉하고 있다. 전에도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이런 학교 폭력 문제에 좀 더 강한 처벌이 얼마나 효과를 발휘할지 벌써부터 염려가 앞서는 것이 사실이다. 이제는 처벌에 앞서, 우리가 무언가를 놓치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야 한다. 교육·사법당국을 향하고 있는 우리의 손가락은 과연 정당한지 되새겨야 한다. 누군가의 책임 여부를 추궁하기 전에, 이제는 우리 사회 모든 분야의 적극적인 관심과 참여가 필요한 때다.
특히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이 땅의 그리스도인과 교회들은 말도 안 되는 이 현실 앞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누구보다 깊이 반성해야 한다. 새벽기도, 철야로 기도하는 성전 담벼락 옆 공터에서 지금도 삶과 죽음을 고민하고 있는 우리의 청소년들에게 교회는 눈을 돌려야 한다. 그들만의 천국이 모두의 천국으로 변할 수 있도록 새로운 준비를 시작해야 한다. 바로 평화 사역의 기치를 높이 들어야 할 때다. 이제라도 산상수훈에서 설명한 ‘화평케 하는 자’의 의미를 새롭게 정립하고, 구체적인 평화 사역자, 화해를 이끌어내는 조정자, 평화 교육자를 양성하는 일에 매진해야 할 때다. 더 이상은 이 땅의 청소년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생겨나지 않도록 교회는 지역 속으로, 그 삶의 치열한 현장 속으로 깊숙이 개입해야 한다. 기독교 조정자들을 더욱 많이 양성해야 할 이유다. 평화 사역이 앞으로 한국 교회가 나아갈 방향이 되기를 기대하자. (2012.2.22.Christianity Today Korea)
이재영은 미국 이스턴메노나이트대학(EMU)에서 갈등분쟁전환학으로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한국평화교육훈련원(KOPI) 원장으로 사역하고 있다. 갈등분쟁 해결과 회복적 정의 관련 조정자 양성 교육훈련을 해오고 있으며, 서울가정법원 화해권고위원으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