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의 은혜/신앙,시사,목양 칼럼

늦었지만 성찰의 때가 되었다

에바다. 2011. 1. 26. 18:13


    늦었지만 성찰의 때가 되었다 평소의 말씀과 삶이 너무 일치하지 않는 목회자의 설교를 듣던 한 사모님이 하루는 이불을 싸 가지고 교회로 와서 목사님께 "목사님 우리 강단에서 삽시다" 라고 했다는 일화가 있다. 얼마나 목회자가 일치된 삶을 살기가 어려운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단편적인 이야기다. 요즘 한국교회의 크고 작은 불미스러운 뉴스에 알만한 목회자들이 연류되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특히 보수와 개혁을 모토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우리 교단의 인사들이 거론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아인슈타인이 세상을 떠난 후 어떤 신문기자가 그의 부인과 인터뷰를 하면서 "부인, 아인슈타인인이 상대성원리를 아십니까?" 라고 물었다. "나는 모릅니다. 내가 어떻게 그 원리를 알겠습니까" 부인의 대답에 기자는 "그러면 아인슈타인에 대해 무엇을 아십니까?" 라고 다시 물었다. 그러자 부인이 이렇게 말했다."내가 분명히 아는 것은 그가 내 남편이라는 사실입니다. 나는 그가 열심히 연구했다는 것과 그의 진실한 인품을 압니다. 그런 까닭에 상대성원리는 모르지만 남편 아인슈타인을 사랑 합니다." 아인슈타인의 부인은 비록 상대성원리에 대해서 알지는 못했지만, 아인슈타인의 삶을 보면서 그를 신뢰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한국교회의 지도자의 신뢰성은 어떠한가? 불신자들이 오늘날 목회자와 크리스찬들의 삶을 보면서 과연 무엇을 느끼고 어떤 결론을 내릴 것인가? 지난 12월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 발표한 "2010년 한국교회의 사회적 신뢰도 여론조사결과"에 따르면 기독교를 전혀 신뢰하지 않는다는 대답이 18%, 별로 신뢰하지 않는다는 대답이 30.4%를 차지했다. 또한 가장 신뢰하는 종교기관에 대한 물음에도 기독교는 가톨릭(41%), 불교(33.5%),에 이어 20%에 그쳤다. 왜 기독교가 이처럼 신뢰를 받지 못할까? 그것은 다음의 질문에서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다. 기독교가 더욱 신뢰받기 위해 가장 먼저 바꾸어야 하는 점은 무엇이냐는 질문에 가장 높은 답변을 얻은 것은 교회 지도자들(28.3%)이었고, 어떤 부분이 개선되어야 하냐는 질문에는 언행일치(38.8%)를 가장 많이 꼽았다. 그것은 지도자들이 모범이 되지 못하고 신뢰를 잃게 하고 있다는 반증인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교회는 2011년 새해부터 여러 가지 직격탄을 맞고 있다. 대형교회 목회자들의 윤리,폭행, 갈등, 금전 문제 등이 연속해서 드러나면서 파문이 꼬리를 물고 있다. 일반 언론은 물론 인터넷 매체들까지 떄를 만난 듯 공격적 보도들을 쏟아내고 있다. 또한 수많은 악풀들은 기독교의 위상을 사정없이 깍아내리고 있다. 전도의 문이 막히고 봉사와 섬김으로 애써 쌓은 이미지를 반감시키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현실을 어떻게 타개해 나가야 할지 해답이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기독교 안티 세력들을 탓하기에 앞서 일부 목회자들의 실망스런 모습과 한국교회의 무감각한 대응은 이제 위기로까지 인식되고 있는 상황에서 말이다. 더 이상 목회자의 경건훈련에 대한 무감각함의 문제를 부인하거나 감출 수는 없다. 지금 이 시대 목회자의 영성과 경건성, 자기 반성과 년적 성숙의 나태함은 심각한 수준이다. 과연 목회자가 성경을 얼마나 읽고 묵상하며 강단에 엎드려 있는가? 바쁘다는 핑계로 얼마나 자기중심적인 목회와 삶을 살았는가? 목회자와 경건훈련은 떼려와 뗄 수 없는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구별된 노력했으며 말씀 준비에 충실했는가? 목회자로서 일반 사람들과 얼마나 다르게 차별있는 삶을 살려고 했으며 삶의 현장에서 얼마나 모범을 보여주었는가? 목회자의 능력은 지식이나 처세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기도와 경건으로 다져진 영적 리더십과 의로운 삶의 모범에서 나온다. 경건함이 없다면 무슨 영향력으로 권위를 발휘하겠는가? 기도하지 않으면서 어떤 기적과 변화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말씀과 삶의 일치를 위해 얼마만큼 노력하며 살아왔는가? 거목이 쓰러지는 원인은 태풍이 아니라 나무속의 작은 개미다. 목사의 도덕 불감증 역시 그와 같다. 목사가 일관된 삶을 보여 주지 못한다면 그 목회는 모래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다. 목회자의 자기 경건에 대한 훈련은 무엇보다 중요하고 중요하다. 노블레스 오블리제의 의식으로 영국의 귀족들이 험난한 곳으로 아들들을 보내는 모습을 가끔 본다. 목회 현장에도 노블레스 오블리제 가 필요하다. 그것은 말로 하는 목회가 아니라 보여주는 목회를 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가르쳐 준 목회의 도를 실천하는 것이다. 교회 크기와 교인 숫자가 벼슬이 되어서는 안된다. 언제까지 밀실에서 하나님 이름만 되뇌이고 있을 것인가? 늦었지만 성찰의 때가 되었다. 성찰은 성직자로서의 반성과 돌봄이다. 근래 한국교회안에서 터져 나오고 있는 불미스러운 일들은 여러가지 원인이 있지만 영적 불감증과 함께 폐쇠적인 목회의 한계가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사회도 변하고 교인도 변했다. 언제까지 폐쇠적인 목회 패턴을 고집할 것인가? 지금의 고비를 넘기 위해서는 영적으로 살아있는 말씀과 의로운 삶이 조화를 이루는 열린 목회가 절실하다. -기독신문 사설에서- ♡주의 사랑으로 오늘도 행복하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