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의 은혜/교회법·특별기고

비성경적인 성가대,악기,가운

에바다. 2011. 8. 26. 11:50

 

 

                  비성경적인 성가대·악기·가운  
 
                     권영문 
 
   그리스도인의 최상의 의무는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이며 이 예배는 성경적이어야 한다. 초기 교회 시대에 각 지역 교회들은 주일마다 모임을 가졌는데 그 모임의 주된 목적은 만찬 예배를 드리기 위함이었다. 초기 교회의 예배에서 성찬은 예배의 필수 요소였다. 즉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서 성찬이 없는 예배는 없었다(<성찬식을 어떻게 행할 것인가>, 김만옥 지음, 목양, 104쪽). 그러므로 사도행전에서도 "그 주간의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20:7)"라고 쓰인 것처럼, 당시 사도바울이 예루살렘에 서둘러 가야 했지만 주일날 만찬 예배를 지키기 위해 드로아에서 칠 일간 더 머물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만찬 예배를 드린 후에 사도바울의 말씀의 가르침이 있었음을 볼 수 있다.


   이처럼 오늘날 지역 교회들도 성경에 나오는 모본을 따라 주일마다 만찬 예배를 드리고 그 후에 말씀의 가르침이 있어야 할 것이다. 신약의 지역 교회의 신자들은 모두가 다 동등한 제사장들이다. 제사장들의 임무는 말 그대로 '제사', 즉 '예배'를 드리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만찬 예배 때에는 성령님의 인도에 따라 주님에 대한 찬송, 만찬에 관련된 성경 낭독, 떡과 잔에 대한 기도 등을 할 수 있다. 이것이 일인 제사장이 아닌 만인 제사장의 역할인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대부분의 개신교파에서는 가톨릭의 사제(신부)처럼 성직자로 불리는 일인 사제(제사장)인 목사가 만찬 예배를 집행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성직자인 목사는 성경에 나오지 않으며 신약성경(엡 4:11)의 목자를 목사로 오역(잘못된 번역)시켜 만들어 낸 가짜 직분이요, 가짜 은사자이다(<교회가 없다>, 프랭크 바이올라, 대장간, 137~139쪽).


   오늘날 기독교계는 상술한 바와 같이 지역 교회에서 '만인 제사장'에 의한 예배를 행하지 않고 일인 제사장인 목사의 집행에 따라 예배를 행하고 있다. 그러므로 오늘날 기독교계는 구약시대의 '유대교 제사장 제도'로 되돌아가고 있다. '만인 제사장'은 구호에 그치고 실제로는 구약의 제사장 제도를 따르고 있는 것이다. 재차 부언하면, 지역 교회들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기 위해 평신도와 구별된 성직자인 목사를 갖고 있으며, 그들은 평신도와 구별된 특수 복장인 가운을 입고 있다. 그리고 교회 건물에는 제단을 비롯한 각종 실내 장식과 예배에 쓰는 도구에서도 유대교의 잔재를 볼 수 있으며 종교적 성일이나 절기인 종교 달력을 사용하는 것도 모두 유대교를 따르고 있는 실례들이다(<그리스도께서 사랑하신 교회>, 윌리암 맥도날드, 한국엠마오성경학교, 70쪽).


   이와 같은 유대교와 기독교의 무분별한 혼합에 대하여 스코필드 관주성경으로 유명한 C.I 스코필드는 이렇게 말했다. "교회가 유대교화되었다는 사실이 교회의 발전을 막아 왔고 교회의 사명과 영성을 소멸시켰다. 교회는 오직 주님과 말씀을 따라야 함에도 불구하고 비성경적인 교회 건물을 건축하고 유대교식 예식을 행하고 평등한 형제의 신분을 '성직자와 평신도'로 분리하는 등 교회의 목적을 실추시키고 이를 합리화하기 위해 구약성경을 적용시켰다(앞의 책, 71쪽). 그리고 오늘날 수많은 교회들이 예배 시에 비성경적인 성가대를 조직하여 평신도와 구별된 복장인 가운을 입기도 하고 또 비성경적인 온갖 악기를 사용하고 있다. 그럼 여기서는 지역 교회 내에서 행하고 있는 이러한 비성경적인 성가대와 악기와 가운에 대해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살펴보려 한다.


   먼저, 비성경적인 성가대에 대해 살펴보자. 일반적으로 성가대는 기독교에서, 예배 때 성가를 부르기 위하여 조직된 합창단이다. 과거 구약시대에도 유대교의 예배에서는 레위인에 의한 성가대가 조직되어 있었으며 이들 성가대에 의한 찬양이 구약의 제사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대상 25:6). 그러던 것이 예수님이 오신 이후부터, 초기 기독교 시대에는 성가대가 존재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 신약의 교회 시대에 와서는 성가대가 그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다가 주후 313년 로마의 콘스탄틴 황제에 의해 기독교가 공인되면서부터 처음으로 성가대가 생겨났다. 그런데 이 성가대는 로마 황제의 의식을 행진 음악으로 시작하는 로마의 관습으로부터 따온 것이다. 그리고 주후 367년에 이르러서는 일반 회중들에 의한 찬송은 완전히 금지되고 오직 훈련된 성가대만이 찬송을 부르게 되었다. 그 후 1,000년의 세월이 흘러, 16세기 종교개혁을 전후하여 종교 개혁자인 존 후스나 마르틴 루터 등에 의해 일반 회중들의 찬송이 다시 회복되었다. 그때 이후로부터 개신교에서는 교회 내에 성가대와 일반 회중 찬송이 함께 존속하면서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왔다(<교회가 없다>, 190쪽).


   현대에 이르러서는 이제 가톨릭교회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개신교에서도 거의 다 성가대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개신교에서는 가톨릭과는 달리 시대의 흐름과 요구에 따라 현대식 예배(열린 예배, 찬양 예배, 축제 예배 등)가 유행하면서 예배가 두 가지 형태로, 즉 전통 예배와 현대 예배로 나누어졌는데 그중에 전통 예배에서는 오르간, 피아노, 관혁악기 등 클래식 악기들을 사용하고 현대 예배에서는 전자 기타, 심벌즈, 드럼 등을 사용하고 있다. 이에 따라 기존의 전통 예배는 성가대가 맡고 또 새로운 현대 예배는 찬양 팀이 담당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한 교회 내에서 성가대는 전통 예배를, 찬양 팀은 현대 예배를 맡으면서 교회마다 자기네 교인들을 시간대와 연령대와 취향별 등으로 나누어 이 두 가지 예배를 모두 다 진행하는 교회도 많이 생겨나게 되었다.


   그럼 여기에서 상술한 내용 가운데 어떤 점들이 비성경적인 것인지에 대해 살펴보자. 우선, 신약시대 교회 내에서 모든 신자들은 동등한 제사장이 되었다(벧전 2:5). 그리고 이 제사장들의 교회 내에서의 임무는 무엇보다 영적인 제사를 드리는 것이다. 즉 찬미의 제사를 드리고(히 13:15) 물질의 제사를 드리고(히 13:16) 봉사의 제사를 드리는 것(빌 2:17) 등이다. 그리고 모든 신자인 제사장들은, 또 모든 사람을 위하여 중보의 기도를 드릴 수 있다(딤전 2:1). 물론 교회 내에서의 공적인 말씀 증거인 설교는 아무 제사장이나 하는 것이 아니라 만인 제사장 가운데 말씀의 은사를 가진 장로나 성경 교사가 해야 한다. 아무튼 이러한 교회의 진리 가운데서도 모든 신자들은 초기 교회 시대의 공적인 예배에서 모두 다 함께 찬송을 부를 수 있는 '찬미의 제사'를 드릴 수 있었다.


   이처럼 모든 신자들이 동등한 제사장으로서 찬미의 제사를 드렸음에도 불구하고 콘스탄틴 시대 이후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신자들 가운데 일부 사람들을 선정하여 '성가대나 찬양 팀'을 조직하여 합창을 하는 것은, 동등한 신분인 '만인 제사장의 진리'에 위배되는 것이다. 이러한 행위는 구약시대에 특별히 성별된 '레위인에 의한 성가대'와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모습은 신약의 예배가 아닌 구약의 유대교의 예배 형태인 것이다. 따라서 동등한 위치에서 모든 신자가 함께 찬송을 부르는 것이 만인 제사장의 모습이며 또 이것이 만인 제사장의 진리의 실행인 것이다.


   한편, 신약시대 지역 교회 내에서의 모든 신자들은 성경에서 제시하고 있는 '각종 은사에 따라 교회에서 봉사해야 함'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신약성경(고전 12장, 롬 12장, 엡 4장)에는 대체로 20여 가지의 은사들이 나타나 있다. 그런데 이 가운데 '음악이나 악기에 관한 은사'는 단 한군데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이것은 곧 음악이나 악기와 관련된 그 어떤 것도 교회의 영적인 은사와는 무관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만약 교회 내에서 음악이나 악기에 대한 은사가 필요했다면 하나님은 그 은사를 분명히 교회의 은사 목록에 포함시켰을 것이다. 신약성경에서 우리들에게 주어진 영적인 은사들의 네 가지 목록에는 '노래하는 은사나 음악의 은사'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언급이 없다는 사실에 유의해야 한다(<주님의 이름 아래 모임>, 노먼 크로포드, 기둥과 터, 217쪽).


   상술한 바와 같이 신약의 교회 시대에 '성가대'의 존재는 비성경적이다. 그것은 '만인 제사장'에 대한 교회의 진리를 훼손시키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비성경적인 행위이다. 그리고 기독교인들 중에 아무리 음악적인 재능이 뛰어나고 노래를 잘 부르더라도(이것은 비기독교인도 고용하면 얼마든지 해낼 수가 있다) 이것은 교회의 영적인 은사와는 무관하므로 교회의 공적인 집회에서는 사용될 수가 없는 것이다. 특히 특송의 경우, 일인이든 소수이든 대부분 자신들이 영광(박수)을 취할 뿐만 아니라 성경에 그러한 실례가 없으므로 지양해야 한다. 아무튼 교회 내의 공적인 집회에서의 성가대나 찬양 팀이 비성경적임을 살펴보았다.


   다음으로 교회 내에서의 악기에 대해 살펴보자. 과거 구약시대에는 성전에서, 제사의 일환으로 드려진 찬양에 각종 악기들이 동원되었다. 예컨대 나팔과 수금과 비파와 제금 등이 있었다. 그런데 이 모든 것들은 장차 올 것에 대한 그림자들로서 현재까지의 비유(히 9:9)였으며 예수님이 오신 이후에는 폐하여졌다. 다시 말해 실체이신 그리스도께서 오셨기 때문에 지나간 유대교의 모든 의식은 그림자들로서 사라졌던 것이다.


   그리하여 초기 교회 시대부터 교부 시대까지도 교회에서 악기가 사용되지 않았다. 교부들 가운데 클레멘트, 터툴리안, 바실, 크리소스톰, 어거스틴 등은 교회에서 악기 사용을 금했다(<열린예배란 무엇인가>, 조영엽, 큰샘출판사, 73쪽). 그러다가 6세기에 처음으로 가톨릭교회 안에서 오르간이 사용되었다. 그 후 16세기 종교개혁 시대에는 개신교에서도 가톨릭을 답습하여 일부에서는 오르간을 사용했다. 그러나 칼뱅주의자들과 이후의 청교도들은 오르간 사용을 거부하고 심지어 때려 부수기까지 했다. 그 후 미국의 개신교에서는 1704년에 최초로 오르간을 구입하여 사용했다(<교회가 없다>, 194쪽).


   하지만 18세기 이전까지는 교회에서 악기가 보편적으로 사용되지 않았으며 존 웨슬리나 찰스 스펄전 같은 교회 지도자들도 교회 내에서의 악기 사용을 거부하였다. 특히 스펄전은 메트로폴리탄 테버너클 교회에서 오르간을 쓰지 못하게 했다. 그는 오르간이 찬양이 아닌 다른 음악적 요소를 통해 듣는 이들의 귀를 간질거린다고 말하곤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람들이 예배드리러 가기보다는 엔터테인먼트를 즐기러 교회에 오는 것을 두려워했다(<엔터테인먼트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 옥성호, 부흥과개혁사, 96쪽).


   한편, 국내의 여러 교파에서는 1960년대 이전에는, 교회 내에서 주로 풍금을 사용하였다. 그 후 1970년대까지는 오르간이나 피아노를 사용했다. 그러다가 1980~90년대에는 파이프 오르간과 전자 오르간이 주종을 이루고, 오늘날에는 대부분의 중·대형 교회에서 전자 기타, 신디사이저, 드럼 등의 악기까지 갖추어 사용하고 있다. 이리하여 오늘날 수많은 교회들에서 음악이 급속하게 변하면서 많은 문제점들이 야기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 가운데 가장 큰 문제가 CCM(현대 기독교 음악)에 관한 것이다.


   이 CCM의 등장으로 교회 음악이 이전에 세상에서 듣던 세속적인 음악과 별 차이가 없어지고 말았다. 현대 기독교 음악의 다수는 록 음악으로서 세속적인 록 음악과 다를 바 없다. 특히 미국 내의 기독교 록 밴드들은 귀가 찢어질 듯 심장이 두근거리는 찬양과 예배 음악이 주류를 이룬다. 그리하여 사람들 중에는, 이러한 곳은 교회가 아니라 나이트클럽이나 록 콘서트나 마약 소굴에 들어온 것과 같은 느낌이라고 했다(<현대교회문제>, 김효성, 옛신앙, 143쪽). 이것은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는 모습이 아니며 이 모든 문제점들이 바로 비성경적인 악기 사용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신약성경의 교회의 영적인 은사 가운데 '악기나 음악'에 관련된 은사는 전혀 나타나 있지 않다. 따라서 악기 사용은 은사와는 무관하므로 교회 내에서 악기를 사용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사실, 악기에 의한 음악은 영적인 것이 아니며 인간의 감정이나 심지어 동식물까지 자극시키는 혼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미 TV에서도 여러 번 소개되었지만 젖소에게 클래식을 들려주면 더 양질의 우유가 나오고 한우는 육질이 더 좋아진다고 한다. 심지어 클래식을 듣고 자란 식물은 일반 채소보다 더 싱싱하다고 한다(<엔터테인먼트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 45쪽).


   상술했듯이 기독교 록 음악의 고음은 사람의 감정을 사로잡아 흥분시키고 어지럽히고 격앙시킨다. 이러한 자극적인 음악은 혼적인 것이지 영적인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에서 말씀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4:24)." 이처럼 예배하는 자는 '혼이 아닌 영으로' 예배를 해야 함을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이다. 또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영으로 찬송하고 또 마음으로 찬송하리라(고전 14:15)"고 말했다. 그러므로 악기 사용은 영적인 것이 아니라 감정을 자극하는 혼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 어떤 악기도 교회 내에서는 사용하지 않는 것이 성경적이라 할 수 있다. 과거에 풍금이나 오르간을 사용할 때만 해도, 오늘날처럼 전자 기타나 심벌즈나 드럼 등이 교회 내에서 사용되리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러한 악기들이 대부분의 교회에서 버젓이 사용되고 있다. 이처럼 사탄의 술책은 교묘하기 짝이 없다. '마루를 빌려 주면 안방을 넘보는 것처럼' 이제 사탄은 교회 본당까지 점령해 버린 것이다. 이전부터 CCM의 지지자들은 말해 왔다. "오르간만 악기냐? 기타와 드럼과 북과 장구도 악기다. 그리고 이것들을 제대로 사용하면 문제 될 것이 없다"고 했다. 이 주장은 인본적인 논리로 볼 때 크게 하자가 없으며, 결국에는 그것이 현실적으로 실행이 되고 말았다.


   마지막으로 비성경적인 의상인 '가운'에 대해 살펴보자. 먼저, 기독교 성직자들의 복장의 발달 과정을 살펴보면, 그들은 4세기 초에 로마 제국의 콘스탄틴 황제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보통 신자들과 다르게 옷을 입지 않았다. 그 이전 2세기경에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150~215)는 성직자가 평신도들보다는 더 나은 옷을 입어야 한다는 주장은 있었다. 그 후 콘스탄틴의 등장과 함께 성직자들은 평신도들과 구별되는 로마 관리들의 의복을 입게 되었다. 이후 7~8세기경에는 성직자의 예복이 구약의 레위 제사장들처럼 신성한 예복으로 인정되었다(<교회가 없다>, 182쪽).


   16세기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는 로마 가톨릭의 성직자의 예복을 대신하여, 개신교 성직자인 목사들은 검은색 가운을 채택했다. 이 검은색 가운은 당시 세속 학자들이 입는 의복이었다. 그 후 개신교 목사들은 주의 만찬을 인도할 때도 가운을 입었는데 이것은 그들이 개혁된 가톨릭 사제라는 진면목을 드러냄으로써 영적인 권위를 보여 주려는 것이었다. 이런 풍조는 17세기와 18세기에도 계속되었다. 오늘날 개신교 목사들은 대부분 진한 신사복에 넥타이를 매는 경우가 많지만, 그들 중에는 성직자용 칼라를 두르는 경우도 있었는데, 그 이유는 일반 신자들이 성직자인 자신들의 존재를 잊어버릴까 염려해서다(앞의 책 184쪽).


   오늘날 국내의 개신교파에서는 적지 않은 성직자인 목사들이 교회 내에서 가운을 입고 등장하는데 그 색깔과 무늬도 가지각색이다. 국내의 개신교파 중에 침례교인들은 모든 신자의 제사장직을 믿기 때문에 성직 제도를 반대하며, 성직자인 목사들의 가운 착용을 삼가고 있다. 하지만 경우에 따라 가운을 입는 자들도 적지 않다(<한국 침례교의 신학적 특성>, 침례신학대학교, 213쪽). 과거, 교회사에 있어 개혁 교회들은 목사의 사제화를 두려워하여 거룩함을 가장하는 특별한 가운이나 의상을 걸치는 것조차도 금지하였다. 최근 한국의 목사들이 좀 더 거룩하게 보이는 가운을 걸치거나 강대상을 턱없이 화려하고 높게 만드는 행위는 모두 개혁주의와 위배되는 것들이다(<바벨론에 사로잡힌 교회>, 백종국, 뉴스앤조이, 65쪽).


   그리고 기독교 TV에서 설교하는 목사들 가운데 박사 학위를 나타내는 가운을 입은 문양(文樣)을 자주 본다. 이것은 설교자가 자신의 학위를 청중들에게 과시함으로써 다른 목사들과의 변별성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이런 행위는 저열한 세속적 욕망의 표현일 뿐이다. 한국학술진흥재단은 2003년부터 2007년까지 외국의 비인증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사람이 276명이었다고 밝혔다. 이 가운데 성직자인 목사들이 140명이나 포함되었다. 특히 남가주의 코헨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89명이 가짜 박사 학위를 받고 국내에서 활동 중인 것으로 밝혀졌는데, 이들 가짜 박사들의 대부분은 국내 주요 대형 교회의 목사들로 확인되었다(<한국 교회의 일곱 가지 죄악>, 김선주, 삼인, 115~118쪽).


   이번에는 성가대의 가운에 대해 알아보자. 18세기 중엽에 개신교의 성가대들이 번성하기 시작했는데, 성가대들의 특별한 위치를 드러내기 위해 성가대석이 별도로 마련되었다. 처음에는 성가대의 역할이 회중 찬송 때에 그들의 곡조를 잡아 주는 것이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성가대가 별도로 특별 찬송을 불렀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성가대의 위치가 강단 위로 옮겨졌는데, 이때부터 성가대원들은 특별한 가운을 입기 시작했다. 1920년대와 1930년대에 새로 지은 신 고딕식 교회 건물에 어울리게 하려고 이런 특별 가운을 입는 것이 미국 성가대들의 전통이 되었다. 이제 성가대는 성직 가운을 입고 과시하면서 사람들 앞에 성직자와 함께 서게 되었다(<교회가 없다>, 194쪽).


   상술했듯이 구약시대에는 선별된 레위인에 의한 특별한 복장을 갖춘 성가대가 조직되어 있었는데 그것은 구약의 예배 형태였다. 그러나 신약의 교회 시대에 있어, 일부 사람들을 선정하여 구별된 복장인 가운을 입혀 성가대를 조직하여 합창을 하는 것은 만인 제사장의 진리에 위배되는 것이다. 따라서 신약의 교회 시대에는 구약시대와 달리, 구별된 복장인 가운을 벗고 동등한 위치에서 모든 신자가 함께 찬송하는 것이 만인 제사장의 모습이다. 초기 교회 시대의 신자들은 모두가 다 동등한 제사장 신분으로서 찬미의 제사를 드렸다(히 13:5).


   지금까지 기독교의 성가대와 악기와 가운에 대해 비성경적인 여러 면을 살펴보았다. 오늘날 대부분의 국내 개신교의 중·대형 교회에서는 교회 내에 여러 성가대나 찬양 팀을 두고 있으며, 또 각종 악기를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찬양과 악기와 관련하여 찬양 사역자나 음악 목사 등을 고용하여 사례비까지 주고 있는데, 이러한 행위는 비성경적이다. 오늘날 소수의 교회들만이 교회 내에 성가대나 찬양 팀을 두지 않고 있다. 이러한 교회들은 성가대가 만인 제사장의 역할을 침해하는 비성경적인 조직이며 또 노래를 잘 부르는 것이 교회의 은사가 아님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교회 내에서의 악기 사용 역시, 신약 교회의 영적인 은사와는 무관하며 구약시대 성전에서의 제사의 일환으로 사용된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오늘날 구약이 아닌 신약시대에 성가대나 찬양 팀을 운영하고 또 온갖 종류의 악기를 사용하는 교회들과 그리고 유대교의 제사장이나 레위인들처럼 특수 복장인, 가운을 착용하는 목사들과 성가대는 그러한 행위가 만인 제사장의 진리와 교회의 영적인 은사에 반하는 반기독교적인 것임을 인식하고 그러한 운영을 중단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진리의 말씀에 입각하여 초기 교회 시대의 모습대로 성경적인 예배를 회복해야 할 것이다. (2011.8.24. 뉴스앤조이)
 
권영문
1955년 부산 출생
경성대학교 문헌정보학과
경성대학교 교직원 기독신우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