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법에 대한 환상 깨기
판결은 법리만으로 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은 법에 대한 지나친 신화를 갖고 있다. 심지어는 법을 신성하게 생각하고, 법관이나 법원의 결정은 신의 심판정도로 생각하고 있다. 물론 현실적으로 가장 효력이 있는 판단은 법관의 판단이기 때문에 신성스럽게 생각할만도 하다. 그러나 법은 판결을 내는 과정이나 절차에 있어서 많은 모순을 내포하고 있다.
결국 타락한 인간이 보다 더 타락한 인간을 판단하는 심판의 도구에 불과하기 때문에 법은 절대성이나 우상, 신화가 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바울은 이스라엘의 실정법에 대하여 죄가 계명을 틈타 역사한다고 까지하여 율법 이면에 사단이 틈을 타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바울은 생명의 성령의 법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신앙인들은 법원의 판단에 대해서 절대적인 판단이라기 보다는 인간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법전문가들의 최소한의 기준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일반법정 판결문의 증거능력
예장통합 교단은 사회법정이 판결문(국가 법원의 확정 판결서 사본)에 대해서 권징편 제82조에서 [당연히 증거능력 있는 서류]정도로 판단하고 있다. 제73조 [재심청구]에서는 “증명된 때”라 함은 그 증명이 공공기관의 증명이나 국가법원의 확정판결에 의한 것을 말하고 있을 정도로 증거능력이 있는 정도로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헌법시행규정 제7조에 위하면 "헌법이나 이 규정의 시행유보, 효력정지 등은 헌법과 이 규정에 명시된 절차에 의한 조문의 신설 없이는 총회의 결의나 법원의 판결, 명령으로도 할 수 없다"고 하여 법원의 판결보다는 교단의 헌법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감리교에서는 사회법에서 재판받은 경력이 있으면 피선거권자격이 없도록 교리와 장정을 만들었다. 우리는 여전히 세상법에 대한 신화, 신뢰를 갖고 있기 때문에 교회법보다 사회법의 우위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앞으로 교회법과 교단 법정의 권위를 위해서는 사회법과의 관계를 분명히 해야하며, 사회법정의 판결문은 참고 정도만 해야할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예장통합교단은 사회법정의 판결문에 대한 관계설정을 잘한 것이다.
실체적 진실과 절차적 진실
그렇다면 법현실주의 관점에서 사회법정의 판결이나 판단이 무엇이 문제인지를 살펴보자. 진실에는 실체적 진실과 절차적 진실이 있다. 어떤 사건이 발생했을 때, 반드시 실체적 진실싱이 있다. 이는 신의 영역이다. 신만이 범인이 누구인지, 사건의 본질과 원인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그러나 인간사에서 발생하는 모든 법적인 문제는 절차적 진실을 통해서 진실에 도달하는 것이다. 실체적 진실은 없고 법관의 주관적 판단과 합의, 성향, 증거능력, 증거판단기준에 따라서 진실이 결정되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판단이다보니 억울한 사람도 많이 있고 누명을 쓴 경우도 있고,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즉 재판 절차를 통한 것만이 진실에 도달하는 것이다.
그러나 판사의 성향, 여론의 향배, 입증자료의 신빙성, 증언자의 신뢰성있는 증언, 자유심증판단기준, 피고의 태도 등 여러가지 외적인 성향들이 판결에 영향을 미친다.
판결은 법리만으로 되지 않는다
예장통합교단 재판국만 하더라도 법리보다는 외적인 영향이 많은 변수를 차지한다. 이번에 황형택목사건만 하더라도 그렇다. 황형택목사가 대형교회목사가 아니었더라면 그렇게 호들갑을 떨지않았을 것이다. 현재교단법정은 법리외에 실제적인 변수가 많은 영향을 끼치고있는 실정이다. 그래서 일반 법정도 그렇지만 판결은 법리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지배적인 여론, 판사의 성향, 강력한 로펌 등이 외적인 요인으로서 자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판사들은 사실에 충분히 기초했고, 사실에 기초하여 판결을 정당화하는 의견을 쓴다. 그래서 Frank와 같은 사람은 재판의 예측가능성과 확실성에 대하여 회의를 가진 사람이다.
그는 재판과정에 있어서 증인, 변호사, 배심원, 재판관 등의 인적 요소가 영향을 미치는 바가 크다고 주장한다. 피고인의 운명은 증인의 증언의 신빙성 여하에 매어있다. '진실로 보고 온 것처럼 거짓말을 한다'는 말은 어떤 증인이라도 인간인 이상 잘못을 범할지 모른다함을 지적하는 말이다.
화곡동교회 사건을 보더라도 유씨는 1. 2심에서 승소했음에도 불구하고 동료 강00씨가 절도, 폭행을 했다고 거짓증언을 함으로 유씨는 대법원에서 패소해 교회를 그만두게 되었다. 거짓일지라도 증언은 판사의 결정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증언이라는 것은 얼마든지 증언자의 말에 따라 춤을 출수가 있다.
사실확정의 어려움
그래서 프랑크는 판사의 판결은 거의 예측불가능하다고 판단한다. 판결의 확실성을 기대할 수 없는 이유는 사실확정의 어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법규칙의 의미내용이 아무리 명백하더라도 사실관계가 달리 인식된다면 법규칙의 내용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광성교회 사건을 보면서 판사들마다 달리 판단을 하기 때문에 교인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고 교회는 소송비와 세월만 남용하고 있다. 그러면서 판사의 판결을 목을 메고 있는 것이다. 판사들마다 사실관계가 달리 인식되기 때문에 정상적인 판결이 어려운 것이다. 심지어는 대법원판사들까지 같은 사건에 대해서 사실인식이 달리 나타난다.
프랑크는 사실심에 대해서 연구를 집중했다. 그는 사실인정의 과정은 적용법규의 선택과정과 분리된 것도 아니고 객관적인 과정도 아니라고 주장한다. 판사의 사실인정판정에서 수많은 왜곡과 선입견들이 작동하며, 사실심에서 잘못 인식된 사실관계는 항소심에서도 교정될 수 없다고 본다. 실제로 재판을 해보면 알겠지만 항소심에서 깊은 사실심이 다투어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항소심에서는 사실심에서 확정된 사실관계를 전제로 할 뿐 달리 사실확정의 문제를 다루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프랑크는 미국에서 법률조문을 강조하여 판단을 내리는 법형식주의자들에 대해 개탄한다. 우리나라에 있었더라도 대륙법의 형식주의에 입각하여 판단하는 법조문과 대법원판례에 매여있는 창조적 판단력이 결여된 형식주의 판사들을 보며서 더 열받았을 것이다. 그는 법규칙의 논리적 적용을 통해서 법판단을 내린다는 법형식주의자들의 주장은 신화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프랑크는 법률가들이 법규에 대해서 과도하게 기대하는 것은 일종의 아버지 콤플렉스의 표현이라고 보았다.
어렸을 때는 전지전능한 아버지를 신뢰하는데 성인이 되면서 아버지의 신뢰가 무너지면서 그 대체물로서 법의 확실성에 대한 환상내지 집착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지금도 세상법에 대한 집착을 갖거나 확실성을 갖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대한 신앙의 신뢰가 무너지면서 그 대체물로서 법을 집착하는 것이다. 바울이 세상법정에 호소하지 말라고 했던 것도 신앙의 기준대신 법의 기준으로 대체하지 말라는 의미였다. 법이 우상이 되어버렸다. 바울은 세상법보다도 교단법이나 교회의 판단을 중시했다.
교단법정의 실상
그러나 불행하게도 교단법정에서도 양심이 사라지고, 대형교회목사위주 판단을 하고, 지연, 학연위주의 판단, 비법적인 판단이 성행하기 때문에 사회법정을 신뢰하게 되었지만 궁극적으로는 교단법정이 바로서야 하는 것이다. 법현실주의를 주장하는 학자들은 법의 형식성과 조문성을 비판하고 실제로 추상적인 법조문과 법원칙만으로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사안을 판단하기 어렵다고 보고, 상술했지만 법리외적인 요인들이 많은 변수를 차지한다고 보았다. 법형식주의자들은 법의 공리, 과학적 원리만으로 사람들을 규제할 수 있고 판단할 수 있다고 보지만 법현실주의자들은 법이 사회와 현실을 반영해야 한다고 보고 있다. 법의 원칙성보다는 인간의 경험성을 주장한다.
법은 논리가 아니고 경험이다
미국연방대법관을 역임한 홈즈(Wendel Holmes, Jr. 1841-1935)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법의 생명은 논리가 아니고 경험이다. 사람들을 규제하는 규칙을 결정함에 있어서 자각된 시대적 요청, 지배적인 도덕이론 및 정치이론, 공공정책적 직관, 법관의 편견들이 삼단논법보다 더 많은 관련을 맺는다. 법은 수세기에 걸친 민족의 발전사를 담고 있으며 수학책의 공리나 정리만 담고 있는 것처럼 취급되어서는 안된다. 법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는 우리는 법의 과거와 미래를 알아야 한다. 우리는 역사와 현재의 입법이론을 교대로 참고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처럼 법현실주의자인 홈즈는 법내적원리보다는 법외적인 것이 더 결정적인 것이라고 본다. 오늘날 실제적인 법원의 판결도 법내적인 원리보다는 법외적인 원리에 의해서 판단받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신의 영역인 객관적 실체를 알 수 없기 때문에 인간들은 절차적 진실을 통해서라도 진실값을 얻으려 하는데, 절차적 진실에 도달하기까지는 수많은 외적인 요인과 변수가 도사리고 있다. 심지어는 불법까지 도사리고 있다. 그래서 내놓은 값이 절차적 진실이고 종이로 나타난 것이 판결문이다.
불완전한 증거를 토대로 한 판결
범죄나 사건발생현장에 없었던 검찰이나 법관이 사무실에서 종이 증거와 사람들간의 증언만을 갖고서 진실이라고 판단하는 것이다. 실체적 진실과 달리, 절차적 진실에 도달하기까지는 인간적인 변수와 외적 요인이 무수히 많이 존재한다. 강력한 로펌, 전관예우, 학연, 지연, 허위증언, 허위증거, 경찰의 회유, 압박수사, 임의 동행, 법정에서의 태도, 판사의 공익적 성향, 자유심증주의, 지배여론, 집단의지, 법의 무지, 일관성없는 진술 등 법외적인 요인들이 판결에 영향을 끼쳐서 무죄, 유죄의 판단으로 결론난다. 불완전한 절차가 있었더라도 한번 확정되면 진실로 남고 마는 것이다. 누명이든 무죄든 상관없다. 실체적 진실은 중요하지 않다. 절차적 진실만 남을 뿐이다.
그리스도인들, 실체적 진실이 중요
그러나 신앙인들은 믿음이 있는 한, 양심이 살아있는 한, 절차적 진실보다 실체적 진실을 구할 수 있어야 한다. 절차적 진실을 너무 추구하는것은 비신앙적이며 인간적 이다. 실체적 진실에 도달하지 못한 사람들이 대안으로서 절차적 진실을 택한 것이다. 신앙인들은 하나님의 영역이지만 세상판사들이 선택한 절차적 진실보다는 신앙과 양심의 토대하에서 실현되는 실체적 진실에 도달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벌금 100만원, 200만원, 징역, 집행유예 등이 고지된 절차적 진실의 판결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살인죄나 절도, 횡령한 사람들이 회개하여 새사람되었을 경우, 이들에 대해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무흠하다고 판단하는 실체적 진실의 판단이 중요하다. 그리스도의 피로 이들은 사함을 받았기 때문에 이제는 죄인이 아니라 의인이다. 의인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절차적 진실이 아니라 실체적 진실에 입각해서 판단하는 것이다. 인간의 관점에서는 죄인이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의인이다. 하나님의 관점은 실체적 진실의 관점이다.
한번 이단이라고 영원이 이단으로 매도하는 것, 한 번 감옥에 갔다 왔다고 해서 영원히 전과자로 낙인 찍는 것, 한번 실수를 했다고 해서 영원히 지옥갈 사람으로 매도하는 것, 한번 벌금을 받았다고 해서 영원히 감독회장에 출마할 수 없는 것 등은 절차적 진실을 진실로만 보려는 비신앙적인 속성이다. 어차피 절차적 진실은 법리외적인 요인으로서 인간의 불완전한 판단력을 갖고서 도달한 불완전한 진리이다.
실체적 진실의 그림자까지라도 가자
기독교인들은 절차적 진실에서 벗어나 실체적인 진실의 영역에 도달할 사람들이다. 교회법정은 절차적 진실보다 실체적 진실에 도달하려는 자세로 판단해야 한다. 그 영역은 신의 영역이지만 하나님의 형상인 양심과 순수신앙, 그리스도를 향한 영성 등이 토대를 이룰 때 실체적 진실의 그림자에게까지는 접근할 수 있다. 신앙과 양심, 원칙이 교회법정의 토대가 될 때, 하나님의 법정은 가이사의 법정보다 권위있는 법정이 되지 않을까? (2011.9.29. 로앤처치 / 황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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