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아그네스’ 그리고 그리스도 안의 배우 윤소정
새롭게 만나는 ‘60대 리빙스턴’ 여전히 젊은 영혼… 시간이 멈췄나
시간이 멈춘 듯, 작고 오밀조밀한 서울 혜화동 골목길. 번화한 대학로 중심가와는 또 다른 그 공간이 마냥 신기하여 난 마치 낯선 별에 떨어진 아이마냥 눈을 반짝이며 기웃거렸다. 선돌극장, 눈빛극장, 꿈꾸는 공작소…. 뭐든 ‘대형’에 ‘대박’이 판치는 세상에서 어찌 버텨내는지, 이름 예쁜 소극장들이 구석구석 수줍게 숨어 있었다. 그렇게 따사로운 가을 오후를 즐기며 마냥 걷다 도착한 한 연습실에서, 67세라는 숫자를 내 머릿속에서 지우게 한 ‘젊은 영혼’을 만났다. 연극배우 윤소정 선생이다.
곧 무대에 올릴 ‘신의 아그네스’를 연습 중이었다. 선생은 ‘닥터 리빙스턴’ 역을 세 번째 맡게 되었다. 1983년 초연 때, 99년, 그리고 2011년 가을. 궁금했다. 38세의 그녀, 54세의 그녀, 그리고 이제 60대 후반의 그녀. 인생길을 걸어오는 동안 차근차근 쌓였을 배우로서의, 그리스도인으로의 내공은 그녀의 ‘리빙스턴’을 어떻게 달라지게 만들었을까?
“삶을 통해 알아진 것들이 있더라고요. 전에는 보지 못했던 것을 보게 되네요. 새로움! 맞아요. 왜 성경도 그렇잖아요? 같은 말씀을 읽어도 한 달 전 다르고, 오늘 읽는 말씀이 다르고. 전에는 아그네스, 미리암, 리빙스턴을 각각의 인물로 보았어요. 그런데 세 사람이 하나다. 이런 깨달음이 오더군요. 마치 삼위일체의 신처럼 이 세 사람은 우리 인간의 아픔과 고통과 그 과정 중에서의 성장의 단면을 여러 각도에서 보여주고 있는 거죠. 비로소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이 제게 전해져 옵니다. 누가 그렇게 도덕적이고 누가 그렇게 죄인이냐? 다 인간인데…. 유한하고 내일을 모르는 우리는 다 마찬가지다. 완전하게 잘난 사람 없고 또 온전히 못난 사람도 없다!”
창 밖 하늘을 보는 배우 윤소정과 백소영 교수
아픔과 고통조차도 그리스도 안에서 견뎌냈던 그녀의 인생 여정이 새로운 시선, 존재의 깊이를 자아냈으리라. 모태신앙인 그녀였다. 장로님이신 아버지와 집사님이신 어머니 덕분에 아침마다 기도하고 일주일에 한 번은 가정예배를 드리던 분위기 속에서 성장했다. 다들 그랬다. “윤 장로님네 셋째 딸 좀 봐라.” 배우하면서도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다고들 칭찬했지만, 사실 100% 확신에 찬, 온전한 믿음은 아니었다. 배우의 삶이란 게 특히 그렇다. 기독교 신앙과는 같이 가기 힘든 직업이라고, 선생은 그리 말한다.
“연기는 ‘혼적인 것, 영혼의 장난’입니다. 연극이라는 것이 굿에서 시작된 것이거든요. 토속신앙이요. 결국은 연극도 굿하는 거예요. 성경과는 이율배반적인 일이죠. 사실 그래서 예전부터 힘이 들더라고요. 매번 ‘주님, 이걸로 끝낼래요. 다시 안 해요’ 이렇게 기도했죠. 하지만 도대체 인간인 내가 무슨 약속을 할 수 있겠어요? 어찌나 미약한 존재인지. 지금도 매일 안 한대지. 매번 이 작품이 끝이다. 그래놓고도 연극하는 동안 잊어버리고…. 탈아(脫我), 그래요! 내 바깥에서 연기하는 거예요. 굿쟁이처럼 신 내려서, 신명나서…. 자아의 바깥에서, 그리고 연극이 끝나면 다시 윤소정, 나로 돌아오는 거죠.”
하여 늘 그녀의 영혼은 요동친다. 때론 그런 자신의 모습이 불안하고 고통스럽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끊어짐이 없이 살아온 인생을 통해 배운 것이 있다. 죽은 자에게는 그 요동침조차 없다는 것. 오직 산 자에게만 신앙의 그래프가 있다는 사실 말이다.
“변화가 없는 상태, 그건 영적 죽음이죠. 돌아보니 그래요. 때론 세상의 일 속에 침체되기도 하기만 그리 오르내리며, 그래도 살아있기 때문에 꾸준히 상승하더라구요.”
왜 아니겠나? 자라는 것이 생명의 법칙인데, 곤두박질치다가도 ‘일어나라! 자라라!’ 그리 부르시는 주의 말씀에 새 힘 얻어 날아오르는 것이 무릇 산 신앙의 법칙인데….
그녀는 바로 이게 ‘기적’이라고 했다. ‘이런 세상에서,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을 향한 절대 믿음을 갖고 있는 것’ 말이다. 처절한 상황에서도 신에게서 끊어지지 않았던 아그네스가 리빙스턴에게 남기고 간 것이 바로 이 ‘기적’이다. 세상의 악으로 인해 성폭행을 당한 소녀, 살해당한 아기, 산산조각 나 버린 인간의 마음. 그럼에도 ‘희망과 사랑, 소망 그리고 기적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았던 아그네스! 리빙스턴이 연극의 맨 마지막에 했던 말에 답이 있단다.
“대체 어떤 신이 아그네스 같은 기적을 나 같은 사람한테 보내 마음을 뒤흔들어 놓는 겁니까? 난 그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난 그 아그네그가… 축복 받은 사람이라고 믿고 싶습니다! 그리고 정말 보고 싶어요. 전 아그네스가 제게 뭔가 남겨줬기를 바랍니다. 자신의 작은 일부라도 말입니다.”
두 시간 내내 무대에서, 줄곧 담배 피우며, 그 긴긴 대사를 말하는 것이 너무 힘든 일이라 처음엔 거절했다는 그녀. 그러나 연습을 하면서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더욱 커진다.
“연기를 하면서 내 신앙을 돌아보고 그리스도를 생각할 수 있는 작품”이라고 말했다. 매일 아침 지인들에게 그날 주신 말씀을 문자로 나누며 하루를 시작한다는 그녀. 누군가에겐 살아있는 말씀으로 와 닿겠지 막연한 소망 속에서, 성령의 역사를 기대한다는 그녀는 같은 길을 걷는 후배 연기자들에게 이리 조언한다.
“바울도 그랬잖아요? 어떤 상황에 있든지, 환란이나 박해, 굶주림이나 위협 그 어느 것도 그리스도로부터 우리를 끊어낼 수 없다고요. 그것만 확실하면 됩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내가 ‘그리스도의’ 사람이라는 그 확신만 있다면….”
“선우야, 엿 사왔어!” 10월 연극을 올리기 위해 막바지 연습을 시작하며 후배 연기자에게 던진 그녀의 말인즉 엿이 목을 보호하고 목소리를 맑게 한단다. 살뜰히 후배를 챙기며 여전히 열정을 발산하는 그녀의 연습 광경을 지켜보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번 무대 역시 마지막이 아닐 것 같다는…. (2011.10.2. 국민일보 / 백소영 이화여대 인문과학원 교수)
윤소정
1944년생으로 영화감독 고 윤봉춘의 딸이다. 남편 오현경씨, 딸 오지혜씨 역시 연기자로 배우 일가를 이루고 있다. 1962년 TBC 1기 공채 탤런트로 데뷔했다. 출연작으로는 연극 ‘그대를 속일지라도’ ‘신의 아그네스’ ‘첼로’ ‘영화’ ‘왕의 남자’ ‘하루’, 드라마로 ‘다 줄 거야’ ‘그녀가 돌아왔다’ ‘여고 동창생’ 등이 있다. 2010년 제3회 대한민국연극대상 연기상(2010), 이해랑연극상(2007), 대종상영화제 여우조연상(2001) 등을 수상했다. 서울 수서동 서울교회 출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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