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와 장로가 함께 목회한다면
교회 안의 직분 제도 개선의 필요성
김북경 장로(국제장로교 영국교회)
나에게 가끔 왜 목사가 장로로 변신했냐고 질문해 오는 사람들이 있다. 이에 대한 답변으로 목사와 장로에 대해서 글을 쓰기로 했다.
목사와 장로는 교회의 기둥인데 한국교회의 많은 문제가 목사와 장로 간의 갈등에 기인하고 있다고 본다. 장로교의 간단한 역사(장로 제도에 한해서)와 장로의 두 직제(가르치는 장로와 치리장로) 구분의 역사 및 관련된 성경 구절의 해석을 보고 성경적 해결책을 생각해 보려고 한다. 결론은 장로는 한 종류의 장로(가르치는 장로와 치리장로)밖에 없으며, 목사와 장로가 다 동등한 장로로서 복수 지도 체제 목회를 한다면 한국교회의 안녕에 도움이 될 것으로 믿는 것이다.
장로정치의 역사와 한국장로교
간단히 말해서 초대교회에서는 성경대로 장로 제도가 있었는데 천주교가 그 제도를 폐지했던 것을 종교개혁가들(특히 칼뱅)이 부활시켰다. 칼뱅에게 사사를 받았던 존 녹스가 스코틀랜드로 돌아가 장로교를 세우면서 장로 제도를 실시하였다. 영국에서도 스코틀랜드 법의 영향을 받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장로 제도가 반영되었다. 그러던 것이 17세기에 미국으로 이민 간 청교도들이 장로교를 세우면서 장로 제도를 유지해 왔던 것이다.
이후 19세기에 미국, 캐나다, 호주 장로교 선교사들이 한국에 착륙함으로써 한국장로교단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한국교회가 물려받은 미국식 장로교의 직제는 목사(가르치는 장로)와 치리장로로 구분하였는데 이것은 칼뱅이 디모데전서 5장 17절을 해석한 것을 따른 결과이다. 이 2직제 장로 제도가 한국에 정착하면서 한 장로교의 직제가 목사, 장로, 집사의 세 계급으로 확립되었던 것이다. 즉 목사는 가르치는 장로(Teaching Elder)로서 설교와 가르치는 역할, 성례 집전, 그리고 치리장로(Ruling Elder)는 치리는 하지만 목사를 도와서 치리하는 사람으로 간주되었다. 그리고 장로는 교회를 대표하는 사람으로, 목사는 외부인으로 취급을 받는다(한국교회에서는 실제로 목사가 교회 대표로 되어 있다).
이렇게 목사와 장로의 차별화가 빚은 결과는 한국장로교에 권력 다툼의 원인이 되었다. 한국장로교회의 많은 문제가 목사와 장로 간의 갈등에서 초래하였음을 볼 수 있다.
교회 내의 당파 정치
목사는 자기가 처음부터 개척한 교회가 아니면 외부에서 들어온 손님으로 취급받는다. 터줏대감인 장로들의 감독하에서 순종하고 살면 별 문제는 없게 된다. 그렇지 않고 목사가 어떤 수단으로든 몇몇 장로들을 끌어안아서 자기편으로 만들면 반대파 장로들과 힘겨루기 싸움이 시작된다. 이런 권력 다툼 정치는 인간이 모인 모든 단체에 보편화가 되어 있고 교회도 예외는 아니다.
정당정치가 나쁜 것은 아니다. 민주주의 제도하에서는 국민의 다양한 의사를 대표하는 당들이 형성되어 옥신각신하며 나라를 다스리게 되어 있다. 이 정당정치가 잘못되면 무정부 상태가 될 수 있고 그 공백을 이용해 독재자가 나타나게 마련이다.
이런 차원의 정치를 교회에서도 볼 수 있다. 물론 장로들이 파를 갈라서 당의 이름을 짓고 목회 방향을 주장하는 정당정치는 안 하더라도 한 목사를 놓고 장로들의 의견이 갈라지는 현상은 비일비재하다. 교회에서는 세속의 정당정치와는 다른 방법으로 의견 차이를 줄여야 한다.
당회원들의 합심 기도, 합심 성경 공부
목회는 성경적 방법으로 해야 한다. 첫째로 당회원들은 정기적으로 성경 공부를 함께하고 기도를 함께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찾아야 한다(마 18:19~20).
둘째로 성령 민주주의(필자는 이 말을 교회에 도입하여 쓸 것을 제의한다) 원칙에 따라서 서로의 의견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가운데 의견의 합의를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빌 2:1~11). 다시 말해서 성령은 믿는 모든 자에게 임하시며 말씀하신다는 것을 기억하고 상대의 의견을 경청하고 존중해야 한다.
셋째로 목사는 당회 '의장(Chairman)'이지 당회장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박윤선 목사 : 장로교 헌법). 목사는 당회의 의장(사회자)으로서 장로들의 의견을 모으고 도움을 청해서 목회를 해야 한다. 물론 목사는 신학 공부를 했고 성경을 전문적으로 공부했기 때문에 다른 장로보다는 좀 더 아는 것이 많음은 사실이다. 또 기도하는 시간이 일하는 장로보다 많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목사가 장로보다 앞을 더 잘 내다보는 선지자로 자처하며 장로들에게 자기가 본 목회 비전을 밀어붙이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될 것이다.
목사의 생각이 다 옳다고 주장하는 것은 교황 무오설과 다름이 없다고 하겠다. 또 설사 장로들의 생각이 비성경적이거나 세속적이라 하더라도 오래 참고 말씀으로 가르치는 덕이 필요하다. 일을 빨리 효과적으로 진행시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람(장로)을 살리는 것이다.
치리장로 제도는 성경적인가
목사(가르치는 장로)와 치리장로를 한 직제로 보고 모든 장로가 동등한 지위에서 협동하면 목사와 장로 간에 갈등이 줄어들 것이다. 그렇다면 이 이론이 성경적인가를 확인해야 할 것이다.
에스라의 이진섭 교수에 의하면 장로를 가르치는 장로(목사 : Teaching Elder)와 치리장로(Ruling Elder)로 구분한 칼뱅의 디모데전서 5장 17절의 해석에 오류가 있다. 이 외에 칼빈의 고린도전서 12장 28절과 로마서 12장 8절의 해석도 치리장로를 정당화하기에는 빈약하다(이에 대한 자세한 토론은 이진섭 교수의 논문 <치리장로 제도는 성경적인가?>(에스라의 <성경과 교회> 제5권 1호, 2007) 참조).
이진섭 교수의 논문의 중요 내용은 성경이 교회의 장로를 한 가지 직제로 말하고 있고 모든 장로는 가르치고 다스리는(치리) 장로를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만약에 이진섭 교수의 해석이 옳다면 (필자는 그렇다고 믿고 필자가 속한 국제장로교(International Presbyterian Church)에서는 그렇게 실천하고 있다), 그리고 한국교회에 한 종류의 장로들이 복수 지도 체제(당회)를 이루어서 교회를 다스린다면 한국교회의 많은 문제가 줄어들 것이라고 믿는다. 왜냐하면 모든 목사와 장로들은 평등한 지위에서 일하고(국제장로교 헌법에는 '목사가 장로보다 높은 지위에 있지 않다'고 못을 박아 놓고 있다) 하는 일도 같기 때문에 목사와 장로들 간의 알력이 줄어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떻게 한국장로교의 세 개의 직제(목사·장로·집사)를 두 개의 직제(장로·집사)로 바꿀 수 있는가?
첫째로 위에 언급한 성경적 장로 제도를 이해하고 실천하려는 의지가 교단 차원에서 있어야 할 것이다. 예로서 통합 교단에서는 장로를 총회 부회장으로 세우고 있는데 이것을 첫걸음으로 삼아서 장로들의 승격을 더 발전시켜야 할 것이다.
둘째로 유교식의 위계 의식을 버려야 한다. 유교가 한국인의 심성에 깊이 뿌리박고 있음을 필자 자신도 인정하는 바이지만 복음으로 이런 사상을 깨야 한다. 특히 유교의 가부장적 전통이 교회에 자리 잡고 있는 한 성령적 민주주의(은사의 다양성과 사랑의 연합성)가 실천되기 어렵다고 본다. 이 가부장적 전통과 군사정권 시대의 일인 독재 사상이 야합하여 한국 사회와 교회에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했다고 본다.
그렇다면 목사에게 협조해서 다스리는 것만 해 오던 치리장로들을 어떻게 그들로 하여금 성경적 본분을 다할 수 있도록 승격시킬 수 있는가?
낮은 데로 임하소서
이것은 우선 목사들이 낮은 데로 임해서 치리장로들과 같은 자리에 앉아야 할 것이다. 이미 언급했듯이 통합에서는 치리장로를 승격시켜서 총회 부회장으로 세우고는 있지만 아직 강도 권이나 성례 집전권을 주지 않고 있는 것을 보면 아직도 갈 길이 멀었다는 것을 느낀다.
목사들에게 낮은 자리로 내려오라고 하면 이미 장로보다 낮은 자리에 앉아 있다고 한탄한다. 장로들에게 외부 손님으로 취급받고 장로들의 간섭에 목회를 못해 먹겠다고 불평한다. 이런 생각은 자기 맘대로(대개는 성령의 지시라고 주장하지만) 해 보겠다는 데 기인한다. 목사는 다른 성도들, 특히 장로들에게도 성령이 임하신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성령은 목사의 전매 특권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로서 국제장로교의 목사·장로 안수식의 서약 중, "당신은 주님 안에서(성경 말씀에 근거해서) 성도들에게 순종할 것을 약속합니까?"라는 질문이 있다. 다시 말해서 목사와 장로가 서로 순종하고 성도들에게까지도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는 순종해야 한다는 말이다.
목사(가르치는 장로)의 지위
여기서 장로로서 장로들에게 한마디 해야겠다. 목사가 외부인이라는 말에는 설명이 필요하다. 목사는 어디서 마음대로 굴러 들어온 돌이 아니다. 목사는 노회의 승인을 받고 노회원의 자격으로 지교회에 파송된 장로이다. 그래서 목사는 외부에서 오지만 같은 교단의 노회에 속한 목사로서 일단 지교회에 청빙을 받으면 지교회의 회원이 된다. 이런 의미에서 목사(가르치는 장로)는 세 개의 모자를 쓰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노회원이요 교회 식구 중의 한 사람이요 당회원이라는 모자이다.
지교회에서 선출한 장로도 노회에서 승인받고 노회원으로서 지교회에서 시무한다. 그래서 외부에서 오는 장로나 지교회에서 선출된 장로는 그 경로는 다르지만 둘 다 노회원으로서 지교회에서 시무한다. 그런 의미에서 목사와 장로는 같은 편이라는 것을 잊지 말기를 바란다.
그리고 노회는 지교회의 상위 기관으로서 지교회 위에 군림하고 교회에 무슨 문제가 있으면 목사만을 보호하고 또 지교회에서 회비만 각출해 가는 기관이 아니다. 노회는 지교회를 위해서 존재하고 노회원은 합심해서 지교회를 위해서 걱정하고 돕는 일을 하는 기관이다. 그렇다면 소위 교회를 대표한다는 치리장로는 자기 교회의 이익을 위해서 노회에 나가는 것이 아니고(국회의원이 자기 선거구의 이익을 위해서 국회에서 대표하듯이) 오직 교회 전체를 위해서 형제 장로(목사를 포함)와 협동해서 일하는 사람이다.
예로서 국제장로교에서는 모든 장로(목사와 장로)를 '장로'라고 부르고 전임으로 일하는 장로를 '목사'라고 부른다. 파트(타임) 장로를 치리장로(Ruling Elder)로 부르지만 편의상 그렇게 부르는 것이지 모든 장로가 같이 설교하고 성례전을 집전하고 치리도 같이 한다. 또 (치리)장로가 전임 장로(목사)가 될 수 있고 목사가 은퇴하면 다시 '장로'라고 불리며 장로로 시무할 수 있다.
필자가 25년간 목회를 하고 은퇴한 후에 영국 IPC교회에서 파트 장로로 시무하고 있고 목사가 하는 모든 일(설교, 성만찬 집전, 세례식, 권징, 치리)을 같이 하면서 은퇴 생활을 즐기고 있다. 단 다른 장로와 다른 점은 내가 목사로 일하는 동안 파트 장로들은 돈을 벌어 돈 있는 장로인데 비해서 나는 돈 없는 장로가 된 것뿐이다.
이 시점에서 국제장로교에서 한 종류의 장로만을 고집하면서 '목사'와 '치리장로'라는 명칭을 구별해서 사용하는 것은 비논리적이라는 항의에 대해서 설명이 필요하다. 그것은 같은 장로지만 다른 두 경로를 통해서 노회에 오는 장로들을 구분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현재 적당한 명칭을 찾고 있는 중인데 독자 중에서 한 종류의 장로를 명명하면서도 두 장로를 구분 할 수 있는 명칭이 있다면 알려 주기 바란다.
장로의 훈련
그러면 현 장로들을 어떻게 훈련시켜서 가르치고 치리하는 장로로 승격시킬 것인가?
여기서 가르친다는 말은 공중 예배에서 설교하는 것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가르친다는 것은 교회 주일학교에서 성경을 가르치는 은사와 자기의 믿음을 성경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설명하여 전도하는 행위도 포함된다.
교회에서 생각하는 현 장로들의 자격 기준은 대개 사업가들, 교수들, 그리고 경제적으로 중산층 이상의 사람들이다. 목사를 도와서 교회의 행정만을 하는 장로로 보기 때문에 장로를 선출할 때 가르치는 은사는 고려하지 않는다(딤전 3:2). 앞으로 목사와 동역하는 장로 후보자들은 성경을 해석하고 또 가르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렇다고 장로들도 신학교에 가야 하는가? 아니다. 교회에서 성경과 신학을 배울 수 있다. 국제장로교에는 영국노회와 한국노회가 있는데 영국노회는 목사나 장로가 신학교를 졸업해야 한다는 규정이 없다. 그 예로 IPC영국노회 중에 신학교를 안 나온 목사가 있다. 그러나 IPC한국노회는 목사의 자격을 신학교 졸업으로 규정짓고 있다. 그 이유는 한국에 있는 국제장로교의 장래를 내다보고 정한 것이다.
영국 속담에 "적을 이길 수 없으면 적과 한편이 되라"는 말이 있다. 목사와 장로가 언제까지 적대시하고 싸울 것인가? 장로에게 혼난 목사들은 교회를 새로 개척하면서 장로를 아예 세우지 않는 우를 범하는 예를 종종 본다. 더러운 목욕물을 버리면서 귀한 아기도 버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하나님이 주신 좋은 선물을 자기 편의를 위해서 쓰지 않는다면 얼마나 개인적으로 손해며 하나님의 교회에 손해인가?
한국(장로)교회의 개혁은 장로 제도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목사와 장로는 우선 성경에서 말하는 장로 제도를 배우고 교단 차원에서 제도를 시정해 나가야 한다. 동시에 교단 차원에서 '장로 계속 교육 과정'을 만들어 기존 장로와 새로 될 장로들을 성경과 신학으로 교육시켜야 한다.
수백 년의 유교 사상과 100여 년의 한국장로교의 세 직분 제도(목사·장로·집사)를 하루아침에 개혁할 수는 없을지라도 의지만 있다면 하나님의 도움으로 점진적으로 개혁할 수 있다고 믿는다.
서울의 어느 작은 교회는 목사 없이 장로들만 모여 당회를 이루어 목회를 잘하고 있다. 목사를 초청해도 오래가지 못해서 교회를 떠난다고 한다. 장로들과 동역을 하지 못하고 자기가 목사로서 자기의 비전대로 목회를 못하기 때문인 것 같다.
서양에는 '형제의 모임(Brethren church)이라는 교회가 있는데 장로 단이 목회하는 교회다. 이 교회는 봉급을 주어야 하는 목사가 없기 때문에 한때는 선교사를 제일 많이 보내는 교단이었다고 한다. 국제장로교 헌법에는 '목사가 없어도 교회가 살 수 있지만 (전임)목사가 있는 것이 교회에 도움이 된다고 믿는다'는 조항이 있다.
하나님이 한국을 사랑하셔서 목사와 선교사를 많이 배출한 것으로 믿는다.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목사와 장로 간의 다툼으로 차 버리지 않도록 목사와 장로가 협동 목회를 아름답게 해 나간다면 한국교회도 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을 것이다. (2011.10.12. 뉴스앤조이)
제도권 속에 스스로를 가두는 장로들
내 친구 중 우리나라 다섯째 손가락 안에 드는 대형 교회의 장로가 한 명 있다. 가끔 주위 사람들에게 자랑스럽게 그 친구 이야기를 한다.
얼마 전에는 그 친구와 같은 교회에서 시무하는 장로 한 사람과 함께 만난 적이 있다.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가운데 내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말을 들었다. 그들의 표현을 빌리면 자기들은 '이미 제도권 안에 들어와 있기 때문에 교회 문제에 대해서 비판이나 불평을 할 수 없는 입장'이라고 한다. 얼핏 듣기에는 담임목사에게 순종하며 평신도 지도자로서 주인 의식을 갖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소리같이 들린다.
그러나 아무리 긍정적으로 생각해 봐도 교회 안의 제도권이라는 말에는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교회라는 신앙 공동체를 핵심과 주변으로 계층화시켜 놓고 스스로를 핵심으로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동안 이런 말을 속에 담아 두고 있자니 솔직히 마음고생이 심했다. 며칠 전에 그 장로 친구를 다시 만날 기회가 있었다. 또 '제도권'을 운운하기에 그에게 몇 가지를 물어보았다. '교회 안에서 제도권이란 어떤 계층을 의미하는지?', '혹시 장로를 제도권으로 본다면 일반 교인은 비제도권이란 말인지?' 교회 공동체를 핵심과 주변으로 계층화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지적해 주었다.
돌아오는 반응은 예상했던 대로 냉소적이었다. 오랜 세월 계급의식에 젖어서인지 문제의식조차 없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을 함께 하는 무리를 뭐라고 하느냐?"고 물었다. '신앙 공동체'라는 짧은 대답은 들을 수 있었으나 이미 내 질문에 마음 문을 닫아서인지 교회가 왜 신앙 공동체인지, 또 공동체 안에 왜 제도권이 존재할 수 없는지에 대한 깊이 있는 대화는 나누지 못했다. 허물 수 없을 정도로 굳어진 높은 벽을 실감하였을 뿐이다.
공동체라는 단어는 기독교만이 사용하는 독점적인 용어가 아니다. 경제는 물론이고 요즘은 국제 관계에서도 공동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한다. 우리 인간은 원시사회부터 공동체(Primitive community)를 형성하면서 살았다. 지금은 지역을 넘어 국가 간에도 공동체를 이루고 살고 있다. EU(European Union)가 그 대표적인 예다.
지금 겪고 있는 그리스와 남부 유럽의 경제적인 어려움은 그들 국가만의 문제로 그치지 않는다. 유럽은 물론이고 전 세계적 문제로 확산되고 있다. 이 지구가 하나의 경제 공동체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제 전 세계는 서로 돕고 공생하지 않으면 공멸할 수밖에 없는 '상호 의존적 관계' 속에 놓여 있다. 그래서 세계를 '지구촌'이라고 부르는 데 누구도 서슴지 않는다.
그중에서도 '기독교 신앙 공동체'는 모든 공동체의 모델로 내세워도 조금도 손색이 없다. 기독교는 공동체로부터 출발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성경은 이것을 지체의 개념을 도입해서 우리에게 알기 쉽게 설명하고 있다.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6:15上)."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롬 12:4~5)."
"만일 온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냐(고전 12:17)."
기독교 신앙 공동체를 이보다 더 잘 설명한 말씀은 없다. 여기에 어떤 사족(蛇足)도 필요하지 않다. 이런 완벽한 공동체 안에 제도권이라니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그전에도 내 친구 장로에게서 "장로 직분은 장관보다 더 큰 영광이라"는 말을 가끔 들었다. 그들이 말하는 제도권이라는 말과 상통한다. 교회 직분을 세상의 권세와 비교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기독교 신앙 공동체의 개념이 변질되어 가고 있다는 증거다.
기독교인이면 누구나 교회 직분은 계급이 아니라고 다들 입에 거품을 물고 항변하지만 교회 직분은 이미 계층화, 계급화된 지 오래다. 교회 안에서 통상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중직자'라는 단어를 뒤집어 보면 교회 직분 중에 경직(輕職)자도 있다는 것을 자인하는 것이다.
교회는 세상 속에서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Ecclesia)이기 때문에 당연히 세상과 구별되어야 하지만 그렇다고 세상과 결별해서는 안 된다. 정보 기술(IT: Information Technology)의 발달로 인종과 국경의 벽이 허물어지고 있는데 교회는 아직도 성 쌓기에 여념이 없다. 또 그 성문 위에 올라앉아 일반 교인 위에 군림하는 사람들이 날로 늘어만 가고 있다.
그 옛날 예수님의 세 제자들도 변화산 꼭대기에서 올라앉으니 내려오기가 싫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베드로가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여기에 초막 셋을…(마 17:4)" 짓자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이런 마음을 아시고 그들을 데리고 산 아래로 내려오셨다.
한국교회가 공동체성을 회복하는 길은 스스로 제도권 속에 들어가 있는 줄 착각하는 사람들이 하루속히 땅바닥으로 내려와서 '상호 의존적인 관계' 속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한동안 장로 대통령을 놓고 교회 직분에 대해 세간의 눈총이 따가웠다. 그런데 존재하지도 않은 제도권을 만들어 놓고 그 안에 스스로 들어가서 거드름을 피운다면 세상이 더 이상 방관하지 않을 것이다. (2011.10.12. 뉴스앤조이 / 심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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