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여, 가시관을 쓰자
박정신목사.
숭실대학 기독교학대학원 원장
새해를 맞이했다. 사람들마다 덕담을 주고 받는다. 그러나 나의 알량한 양심은 ‘복 많이 받으시라’는 상투적인 인사마저도 내뱉기가 조심스럽다. ‘1:99’로 표현되는 극심한 양극화가 전 지구인을 죽음으로 내모는 현실에서 어떻게 장밋빛 미사여구를 남발할 수 있겠는가. 한 줌밖에 안 되는 극소수의 무리들이 교묘하게 부와 권력과 명예를 독차지하고 ‘99퍼센트’의 사람들을 비정규직 노동자로, 실업자로, 노숙자로 내몰고 있다. ‘독(獨)차지는 독(毒)차지’라는 말이 그럴 듯하다. 그 밤에 하나님이 제 영혼을 도로 거두실 것도 모르고 여러 해 쓸 물건을 곳간에 가득 채워놓은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누가복음 12:16~21)를 보면 정말 그렇다.
오랜 인류 역사를 되돌아보면, 긴장과 갈등으로 이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역사를 계급 간 투쟁으로 이해했으며, 헤겔은 이념들 사이의 경쟁으로, 또 토인비는 도전하는 세력과 응전하는 세력의 엉킴으로, 그리고 신채호는 ‘우리(我)’와 ‘저들(非我)’의 쟁투로 이해했다. 그렇다. 인간의 역사는 다른 계급과 신분, 다른 민족과 인종, 다른 생각과 신앙 사이의 끊임없는 마찰과 다툼의 연속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러한 긴장과 갈등, 마찰과 다툼을 어떻게든 바람직한 방향으로 풀어보려고 몸부림친 무리들이 있기에 역사가 그나마 재앙과 파국으로 끝나지 않고 여기까지 이어져 온 것이다. 이들을 일컬어 토인비는 ‘창조적 소수’라 불렀다. 흑백갈등이 첨예하던 1960년대 미국 사회에서, 심지어 버스 안에도 흑인과 백인 사이에 보이지 않는 칸막이가 설치되어 있던 그 시대에 홀연히 그 칸막이를 걷어내자고 외친 마틴 루터 킹 목사 같은 이가 이에 해당한다. 더러는 그를 ‘빨갱이’라고, ‘공산주의자’라고, ‘체제질서를 어지럽히는 불순분자’라고 매도했다. 그러나 오늘의 역사는 그를 영웅이라 부른다.
로마 제국이 그리스도인들을 두려워한 나머지, 마침내 국교로 승인하게 된 까닭은 무엇인가. 그리스도인들은 ‘초월의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하늘 아버지의 다스림에 잇대어 살기에 그들은 지상의 어떤 가치나 이념, 그리고 체제나 제도도 절대시하지 않았다. 구한말 조선에 들어온 기독교가 유교화된 기성질서에 맞선 힘이 바로 그 ‘초월’에 있었다. ‘사랑방’ 공동체에 들어온 ‘예수쟁이’들은 양반과 상놈 사이에, 남자와 여자 사이에, 어른과 아이 사이에 오랜 세월 가로놓여 있던 칸막이를 과감히 허물었다. 하나님 앞에 만인이 평등하다는 복음을 무기로 ‘소리 없는 혁명’을 이뤄낸 것이다.
오늘 우리 사회에도 무수한 칸막이가 설치되어 있는 것을 본다. 강남과 강북 사이에 놓인 경제 칸막이, 여당과 야당 사이에 놓인 정치 칸막이, 영남과 호남 사이에 놓인 지역 칸막이, 보수와 진보 사이에 놓인 이념 칸막이, 세대와 세대 사이에 놓인 문화 칸막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칸막이들이 민족, 인종, 성, 계급, 나이를 가로질러 우리 삶을 어지럽게 분열시킨다. 불티나게 팔렸다는 사무엘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 같은 책은 특히 강자의 입장에서 약자를 향해 증오를 선동한다. 기존질서에서 힘을 장악한 ‘우리’와 다른 ‘그들’을 향해 무단 테러를 감행하도록 부추긴다. 이러한 선동정치에 휘말려 우리 삶은 생지옥이 된다.
디트리히 본회퍼는 <정말 기독교는 비겁할까?>라는 책에서 이렇게 질문한다. “예전에 엄청난 혁명으로 시작된 기독교가 이제는 모든 시대에 대해 보수적이어야 할까요?” 이 말은 세상 혹은 속물적인 가치관에 동화되어 기성체제를 무비판적으로 용인하는 기독교에게 일침을 가하는 예언자적 도전이다. 오늘 한국교회를 향해 세상이 던지는 질문도 똑같다. 아이엠에프(IMF) 이후의 한국교회가 정체 혹은 쇠퇴기를 벗어나지 못하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올해 한국교회는 무엇보다도 서로를 향해 삿대질하기를 멈추고, 칸막이부터 허물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의 머리에 덮어씌운 ‘황금면류관’부터 벗길 일이다. 복음서의 예수는 ‘가시관’을 쓴 채 십자가에 달려 피를 철철 흘리시는데, 어쩐 일인지 한국교회 안에는 그 예수가 없다. 새해에는 부디 가시관을 쓰신 예수로 돌아가자. 성공과 출세를 ‘복음’으로 둔갑시키는 대신에 오롯이 순전한 하나님 나라를 몸으로 살아내자. 그 길만이 한국교회가 살 길이다.
-시독신문 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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