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의 은혜/신앙,시사,목양 칼럼

교만을 쓰레기통에 집어놓고 살자

에바다. 2012. 2. 2. 15:08

                교만을 쓰레기통에 집어넣고 살자    


   김병태목사

   (성천교회담임)


교만은 자신이 남보다 낫다는 생각에서 나온다. 우리 주변에는 자신을 지나치게 과신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있다. 인간은 원래 한계를 가진 존재다. 부족하고 연약함이라는 특징을 갖고 있다. 그런데도 자신이 남들보다 대단한 존재라 착각하며 살아간다. 남들이 하는 것은 하찮게 여겨진다. 자신의 생각과 방법이 최고인 줄 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을 함부로 무시한다.


그런데 솔로몬은 말한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잠 16:18). 그렇다. 하나님은 교만한 사람을 싫어하신다. “너희 모든 성도들아 여호와를 사랑하라 여호와께서 성실한 자를 보호하시고 교만히 행하는 자에게 엄중히 갚으시느니라”(시 31:23). 교만한 사람은 하나님을 대적한다. 그러나 더 무서운 사실은 하나님께서 교만한 사람을 대적한다는 것이다.


어느 연못에 오리 두 마리와 개구리 한 마리가 살고 있었다. 여름이 지나자 연못에 물이 말랐다. 어쩔 수 없이 이들은 다른 곳으로 옮겨가기로 했다. 그리고 이주 방법을 고안해 냈다. 날 수 있는 오리가 양쪽에서 막대기를 물고, 그 가운데를 개구리가 물어 비행하는 방법이었다. 기발한 생각이었다.


떠나기 전에 이들은 약속을 했다. “누구든지 절대 입을 열어서는 안 된다.” 이들은 성공적으로 공중을 날 수 있었다. 이 광경을 본 농부가 ‘누가 저런 생각을 했을까?’ 라고 감탄했다. 그러자 개구리가 대꾸했다. “내가 했지.” 그 결과는 어땠을까?


교만한 사람은 언제나 할 말이 많다. 작은 일을 해놓고도 자꾸 자랑하고 싶어진다. 무엇인가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다른 사람을 제치고서라도 자신을 으시대고 싶다. 일인자이지 결코 이인자가 될 수 없다. 엑스트라는 양에 차지 않는다. 반드시 화려한 무대의 주연이 되어야 한다. 경쟁을 해서라도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 안 되면 남을 모함하고 넘어뜨려서라도 일등 자리를 꿰차야 직성이 풀린다.


그런데 알고 있는가? 교만은 넘어짐의 앞잡이다. 하나님은 겸손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신다. 은혜는 위에서 아래로 내려온다. 교만한 사람은 은혜를 받을 수 없다. 그러나 겸손한 사람에게는 무한한 은혜가 흘러내린다. 그러나 교만은 일을 그르친다. 패망한다. 공동체의 불행은 교만한 사람들에게서 시작된다.


교만한 사람은 자기 자랑하기에 급급하다. 자신을 내세운다. 모든 상황을 자신이 주장하려 든다.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려 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의 주장을 무시하고 끝까지 자기 생각을 관철시키려 든다. 자기 고집을 주장하는 이 사람으로 말미암아 공동체는 불행으로 휩싸여 간다.


교만한 사람은 쓰레기통과 같다. 교만한 사람에게는 지저분한 것들로 가득 차 있다. 그 안에 있는 지저분한 것들을 보면서 사람들은 그를 외면한다. 그래도 교만한 길을 버리지 않을 것인가?


어느 동네에 졸부가 살고 있었다.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땅이 개발되면서 큰 부자가 되었다. 하루는 졸부가 자기 지역에서 명성이 있는 수도사의 가르침을 받는다는 명분으로 그를 초청했다. 부자의 집은 으리으리하여 정원은 온갖 기화요초로 가득했다. 집안은 각종 보석으로 꾸며졌다. 부자는 수도사를 앉혀 놓고 자기 자랑에 빠졌다.


부자는 자신의 집을 자랑하느라 수도사에게는 단 1분도 말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러자 수도사가 부자의 얼굴에 가래침을 뱉어버렸다. 부자는 얼떨떨해 했다. 아니 열을 받았다. 그러자 수도사가 부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의 집은 너무 아름다워서 아무리 둘러보아도 내 가래침을 뱉을 만한 곳이 없군요. 교만과 위선으로 가득 찬 당신의 얼굴만이 쓰레기통처럼 보입니다.”


자기자랑을 일삼고 있는 사람의 말에 친절하게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드물다. 비록 인내심을 가지고 들어준다고 할지라도 오래 가지 못한다. 지혜로운 성도는 다른 사람들을 칭찬하고 자랑해 준다. 그게 인정받고 존경받는 비결이다.


교만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잘못을 참지 못한다. 그 안에 너그러움과 여유가 없다. 다른 사람들이 갖고 있는 작은 허물과 결점들을 그냥 봐주지 않는다. 이해하고 용납할 수 있는데도 그것을 비난하고 정죄한다. 다른 사람들을 자신의 잣대로 평가하려고만 든다. 결코 절대적인 잣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잣대를 법으로 삼으려 한다. 그래서 교만한 사람은 공동체를 비난과 정죄의 소굴로 만들어 버린다.


교만한 사람들은 머리를 숙일 줄 모른다. 자기가 다 아는 것처럼 착각한다. 자기 생각이 정석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어떤 사람의 생각이든 자신의 생각과 주장 아래 굴복시키려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교만한 자를 끼려하고 기피한다.


벤저민 프랭클린이 하루는 이웃에 살고 있는 노인의 집에 갔다. 노인은 집 밖으로 나가는 지름길을 가르쳐 주었다. 그런데 지름길 중간에는 천장보다 낮은 들보가 있었다. 노인은 프랭클린이 머리를 부딪칠까 봐 말했다.


“머리를 숙이십시오! 머리를 숙이십시오!”


프랭클린은 “아니! 이 분은 왜 이렇게 하시나?” 하고 생각하는 사이에 머리를 부딪치고 말았다. 이를 본 노인이 말했다.


“프랭클린!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머리를 자주 숙이면 숙일수록 그만큼 부딪치는 일이 없을 것일세!”


훗날 벤저민 프랭클린 대통령은 이 말을 항상 마음에 두고 살았다. 그게 그의 성공 비결이라고 하면 과언일까?


우리 주변에는 안하무인격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좌충우돌한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디딤돌이 되는 게 아니라 걸림돌이 된다. 교만한 사람은 기회만 주어지면 고개를 빳빳이 쳐든다. 그러나 겸손한 사람은 자꾸 고개를 숙인다. 교만한 사람은 자기 자신의 연약함과 죄를 보지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나면 자신의 죄가 보이기 시작한다. 그래서 자신을 자랑할 수 없다. 다른 사람을 무시할 수 없다. 다른 사람을 비난할 엄두도 못 낸다. 왜냐하면 자신이 얼마나 지저분한 존재인지를 알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바로 이런 사람에게 은혜를 부어주신다.


테레사는 이러한 현상을 빛에 비추어진 물이 든 잔에 비교한다. 물이 든 잔을 보라. 해가 비치게 되면 해가 비치지 않을 때 보이지 않던 불순물이 드러난다. 잔에 담겨 있는 물이 해가 비치지 않을 때는 깨끗하게 보인다. 하지만 해가 비치게 되면 먼지가 가득함을 드러내게 된다.


세상에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을 정도로 의로운 자가 없다. 교만하게 얼굴을 쳐들 수 있을 정도로 완벽한 사람이 없다.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을 하기 전에는 자신 안에 있는 더러움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자만하고 교만을 떤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나고 나면 정의의 태양에 의해 자신 안에 있는 영혼의 찌꺼기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마음의 불순물을 보면서 슬퍼하고 아파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니 점점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다. 그러한 자에게 교만은 적이요, 겸손은 다정한 친구가 된다


-크리스찬투데이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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