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회와 개신교회의 통치 체제
권영문
사람들은 보통 ‘교회’를 생각할 때, 외형적인 교회 건물이나 천주교회와 개신교회 등으로 분류되어 있는 교회의 체제를 떠 올리는 경향이 있다. 오늘날 교회의 통치 체제는 네 가지로 분류하기도 한다. 그것은 천주교의 교황통치 체제, 개신교의 감독통치 체제와 장로통치 체제 그리고 회중통치 체제이다(<한국 침례교의 신학적 특성>, 침례신학대학교, 136쪽). 여기서는 천주교회의 통치 체제와 개신교회의 통치 체제 그리고 신약 성경에 나오는 성경적인 지역 교회의 통치 체제에 대해 알아 보자.
먼저 신약 성경에 나오는 성경적인 지역 교회의 통치 체제에 대해 살펴 보자. 신약 성경에서 지역 교회란 어느 일정 지역에 있는 성도들로 구성된 모임을 가리킨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에서 예루살렘, 안디옥, 고린도, 빌립보, 로마 등에 있는 교회 또는 모임이라는 표현을 보게 된다. 이같은 표현은 하나님의 교회에 대한 지역적 명칭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당시 지역 교회들은 지역 상호간의 교제는 갖고 있었지만, 각 지역 교회는 독립적인 주권의 단위체였으며 다른 교회들로부터 독립되어 있었고. 모든 지역 교회는 오직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께만 순복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모든 지역 교회들은 모임 안에서 질서를 위한 통치 체제가 있었다. 은혜롭게도 성령님은 초기의 지역 교회들로 하여금 모임의 질서를 위해 교회의 직분을 확립하도록 이끄셨다. 그것은 빌립보서 1장 1절에 있는 사도 바울의 인사말 속에 나오는 두 가지 직분이다. 거기에는 영적인 보호자와 같은 감독들 혹은 장로들이 있으며, 현세적인 문제 특히 가난한 자들을 돌아보는 집사들이 있었다. 신약 성경에는 지역 교회에 오직 이 두 가지 직분밖에 없다. 이 두 가지 직분들을 위한 자격들은 디모데전서 3장에 상세히 설명되어 있다(<신약 교회의 조직>, 도날드 L 노비, 전도출판사, 44쪽).
신약 성경에 나오는 지역 교회의 통치 체제에 있어 지역 교회가 증거해야 할 진리 가운데 첫째는,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라는 진리이다(엡1:22). 따라서 신자들은 그 어떤 인간의 지도자도 교회의 머리로 삼아서는 안된다. 이 진리에 대해 가장 두드러진 거역은, 그리스도의 몸의 임시적인 머리라고 주장하는 여러 종파 체제의 우두머리를 두는 것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신자들은 이런 주장이 잘못임을 익히 알고 있지만, 그 해악이 상당히 교묘한 형태로 기독교계의 거의 모든 분파 속에 침투되어 있는 실정이다.
실제로 교회 안에서 일인 독재자가 되어 권력을 마구 휘두르는 자들이 적지 않다. 신약 성경 요한삼서에 나오는 디오드레베가 그런 사람이었다(요삼9.10). 그는 우월해 지기를 좋아해서 악한 말로 사도 요한과 같은 경건한 자를 폄론하고, 영접지 아니했고, 또한 영접하고자 하는 자들마저 교회에서 쫓아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머리되심을 정면으로 부인하는 행위였다.
그리고 교회의 본부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면, 이 본부라는 말은 활동과 권위의 중심을 말해 준다. 교회의 본부는 교회의 머리인 예수님이 계시는 곳, 즉 하늘이다. 그러므로 지역 교회는 시종일관 한 교회나 교회 단체를 통제하는, 노회나 총회와 같은 어떠한 기구도 승인될 수 없다. 각 지역 교회는 교회의 머리에 대하여 직접적인 책임을 지는 위치에 있으며, 이 진리에 배치되거나 배치되는 일을 해서도 안된다.
지역 교회가 증거해야 할 진리 가운데 둘째는, 성령님이 지역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의 대리자라는 절대적인 진리를 고수해야 한다(요14:26). 이것은 예수님이 교회의 머리라는 진리와 중복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예수님이 교회의 머리로써 성령님을 지상에 보내시어 그리스도의 대리자 또는 대표가 되게 하셨다(요14:16). 그러므로 지역 교회는 모든 일에서 성령님의 실제적인 인도(행13:1~4)를 받아야 하며, 또 성령님의 절대적인 주권(고전12:11)을 인정해야 한다. 따라서 모든 지역 교회는 성령님께 합당한 자리를 내어 드려야 한다(<그리스도께서 사랑하신 교회>, 윌리암 맥도날드, 한국엠마오성경학교, 41쪽).
지역 교회가 증거해야 할 진리 가운데 셋째는, 사도행전 20장에 나오는 내용처럼 사도 바울은 에베소교회의 장로들을 청하여 말하기를 “성령이 너희를 감독자들로 세워 하나님의 교회를 돌보게 하셨다”고 했다(행20:28). 따라서 지역 교회는 성령님에 의해 세워진 복수 장로들에 의한 지역 교회의 통치 체제임을 알 수 있다. 신약 성경에는 장로 또는 감독이 지역 교회의 영적인 운영에 관계된 사람으로 영적인 성숙함을 가지고 영적인 방법으로 지역 교회를 운영하며, 이러한 지역 교회의 장로들과 감독들은 동일한 사람들이다(행20:17,18,28). 이처럼 지역 교회의 통치 체제는 성령님에 의해 세워진 복수 장로들에 의한 다스림이다. 한 지역 교회는 하나님께서 다스리는 신정(神政)이며 다수결에 의한 민주주의 체제가 아니다(<모임의 진리>, Norman Crawford, 기둥과 터, 19쪽).
지금까지 신약 성경에 나오는 성경적인 지역 교회의 통치 체제에 대해 살펴 보았다. 이제 천주교회의 통치 체제에 대해 알아 보자. 천주교의 통치 체제는 로마교황이 초대교황 베드로로부터 교회의 모든 통치의 최종적인 권위가 된다고 믿는 통치 체제를 의미한다. 1964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도 교황을 ‘베드로의 계승자, 전체 교회의 유형적 머리, 그리스도의 대리자’라고 부르면서 비성경적인 교리를 변함 없이 강조하였다.
그러나 천주교회의 교황의 권위에 대한 교리는 성경에 근거가 없을 뿐 아니라, 모든 기독교 교리들의 기초인 성경의 신적, 절대적, 최종적 권위에 대한 교리에 모순된다. 교황들은 상당한 정치 권력도 갖고 있는데 이것도 예수님의 모습과는 다르다. 예수님은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요18:36)’고 말씀했고,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20:28)’고 했다. 그분은 정치적 권력을 소유하지도 행사하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천주교회의 교황은 하나님의 교회의 참된 머리나 무오한 지도자가 아닐 뿐만 아니라, 참되고 유일한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와 영광을 부당하게 탈취한 자이다(<현대 교회 문제>, 김효성, 옛신앙, 53쪽).
그리고 중세 암흑시대 약 천년의 기간 동안 로마 가톨릭 교회의 성직자들은 온갖 죄악을 저질렀다. 최고의 수장인 교황으로부터 사제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십일조 이외에도 헌금, 수수료, 영지수입 등 많은 수입을 거두기도 했다. 교회의 세속권력의 확대는 부패를 초래하기 마련인데, 그 중 가장 심각한 것은 성직자가 아내를 두는 것과 성직 매매 등의 타락 양상이었다. 그들은 사실상 혼인 상태에서 종교적 임무보다는 처자식을 위한 치부와 축재에 치중하는 경우가 많았다. 점입가경으로 성직이 좋은 수입원으로 간주되면서 성직매매가 성직임명의 통상적인 방법이 되었으며, 이것은 교회세력과 세속권력의 대립을 야기했다(<세계의 역사>, 한국방송통신대학교출판부, 261쪽).
그리하여 수많은 교황들의 인격과 도덕성은, 그들이 그리스도나 베드로를 대표하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이교도 제사장들의 계승자임을 보여주었다. 그러한 교황들 중에 어떤이들은 그 행위가 너무 추악하여 비신자들조차도 그들을 수치스런 존재로 여겼다. 그들이 저지런 죄는 이를테면 간음, 동성연애, 성직매매, 강간, 살인, 술취함 등. 많은 교황들이 이런 죄를 저질렀는데 교황권의 역사를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은 수많은 교황이 거룩한 사람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천주교의 유래>, 우드로우, 그리스도예수안에 출판사, 126쪽,). 이 책은 여러 교황들이 실제로 행했던 타락한 행위들을 적나라하게 소개하고 있다 (앞의 책 127쪽~139쪽).
천주교회의 통치 체제에는 교계제도라는 것이 있는데 로마 주교인 교황을 우두머리로 하여, 교황-추기경-총대주교-대주교-주교-사제(신부)-부제의 순으로 군대처럼 계급화되어 있다. 교황에 대해서는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그는 베드로의 후계자가 아니다. 신약 성경에서 베드로는 한 번도 자기 자신을 교황으로 칭한 적이 없다. 그는 다만 자신을 ‘다른 장로들 중에 한 장로’라고 스스로 말했다(벧전5:1).
우두머리인 교황 다음으로 ‘추기경’이라는 고위 성직자는 원래 기독교가 생겨나기 이전 시대에 존재하던 로마의 고대 이교 종교에서 있었던 제사장 그룹이었다(앞의 책, 155쪽). 현재 전 세계의 추기경 수는 약 200명이며 국내에는 1969년 서울 대교구장이었던 김수환 대주교가 동양에서는 최초의 추기경이 되었으며, 2006년에는 정진석 대주교가 추기경에 서임되었다. 그러나 신약 성경에는 추기경이라는 성직자는 나오지 않는다.
천주교 신자들 가운데에는 훌륭한 사람들도 많이 있다. 이를테면 가난한 자의 성녀로 추앙받은 테레사 수녀, 국내 민주화와 인권을 위해 투쟁하면서 가난하고 소외받은 자들을 위해 일생을 바친 김수환 추기경 그리고 한국의 슈바이처라고 불리는 이태석 신부 등 많은 사람들이 선행을 하였다. 그런데 천주교 교리에 의하면, 모든 사람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죽은 즉시 천국에 가는 사람은 없고 모두 연옥에 가는데 여기에는 교황도 추기경도 예외가 없다. 다만 죽기 전에 병자성사를 받게 되면 대죄를 용서받아 지옥에는 가지 않으므로 교황도 추기경도 병자성사를 받는다.
몇 년 전 미국의 시사주간 타임(2007년 8월)은 테레사 수녀가 겉보기와는 달리 신의 존재 여부에 대해 내적 갈등을 겪은 내용이 책으로 출간돼 그녀의 내면세계를 볼 수 있을 것이라 보도했다. 그리고 그녀는 죽기 직전 ‘못된 유물론자들의 망령이 나를 엄습한다’ 고 말해 주위를 놀라게 했다. 이처럼 그녀는 내세에 대한 확신이 없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가톨릭에서 ‘연옥’이란 성경에 나오지 않는 용어이며, 가톨릭에서 날조해서 만든 가상의 공간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톨릭 신자들은 하나 같이 모두 다 이런 거짓 교리를 믿고 있으니 기가 찰 노릇이다.
추기경 다음의 서열인 ‘주교’는 교구를 관할하는 성직자로서 12사도의 후계자로 불리운다. 주교 가운데에는 총대주교·수도대주교·대주교·주교·명예주교 등이 있는데, 주교는 교구의 장으로서 관하에 많은 교구 사제와 일반 사제를 거느리며 자기 교구 내에서 사목·선교의 권한을 갖고 있다. 가톨릭의 주교는 개신교인 감리 교파의 감독에 해당하는데, 감리교회의 감독은 감리 교파의 목사들 가운데서 선출된 최고의 성직자이다. 그러나 신약 성경에서 목사들 위에 군림하는 교단의 감독같은 인물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신약의 지역 교회에서 감독은 장로와 동일한 직분으로 나타나 있다(딛1:5~7). 따라서 천주교의 주교나 감리 교파의 감독은 비성경적인 성직 제도에서 생겨난 인위적인 인물에 불과하다.
사제(신부)는 천주교회에서 일정한 자격을 갖추고 성사와 미사를 집행하는 성직자이다. 천주교에서 사제가 되고자 하는 자는 신학대학에서 7년간의 교육과 함께 시종직, 독서직 및 부제를 거쳐 주교에게 성품성사를 받음으로써 사제가 될 수 있다. 사제는 원래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께 동물이나 식물로 제사를 드리는 유대교의 성직자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신약의 교회 시대에, 지역 교회에서 사제란 구약 시대의 제사장처럼 성직자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신자를 사제 즉 제사장이라고 일컫는다(벧전2:5,9). 따라서 천주교의 사제 역시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비성경적인 인물이다.
부제는 사제(신부) 바로 아래에서 사제를 보좌하는 성직자이다. 그들은 사제의 위임을 받아 말씀 전례와 세례성사 및 혼인성사를 집행할 수 있고 성체를 분배할 수 있다. 그 외에 장례예식과 준성사를 집전할 수 있다. 신약 성경 사도행전 6장에서 사도들은 자신들을 도울 7명의 보조자를 뽑게 했는데 그들은 공적인 집사의 직분을 맡게 되었다. 개신교에서는 그들을 집사라 부르는데 천주교에서는 그들을 부제라고 부른다. 신약 성경에는 집사의 자격에 대한 필요조건이 분명히 언급되어 있다(딤전3:8~13). 그들은 지역 교회 내에서 성직자가 아니라 교회의 재정이나 여러 봉사를 담당한 직분자들이었다. 따라서 천주교의 부제는 성경과는 무관한 인물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천주교의 성직자 가운데, 특히 국내의 사제(신부)의 직무와 권위에 대해 알아 보자. 한국 천주교회는 전국에 지역단위 교회로서, 성당인 본당이 약 1,600개가 있다. 지역단위 교회의 본당에는 각 본당마다 본당 주임신부가 있으며, 주임신부 아래에는 주임신부를 보좌하는 보좌신부가 있다. 본당은 단위교회로서 본당 주임신부의 권위 아래 사목 직무를 수행한다. 본당 주임신부는 본당신부 혹은 주임신부로도 부르는데, 이들은 개신교 지역단위의 개교회 혹은 지역 교회의 담임목사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미주 한인 가톨릭 평신도 연합 회장인 민경석 교수는 그의 저서에서 ‘본당신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국내의 천주교회는 서구의 천주교회와는 달리, 교회 내에서 모든 권한을 성직자들에게 집중시키고 평신도들에게는 전혀 아무 권한도 주지 않는다. 교구에서는 주교가 전권을 가진 하나의 군주이듯이 본당에서는 주임신부가 하나의 군주이다. 본당 내에서 본당신부는 행정권, 입법권, 사법권을 독점하고 있으니 신부가 크게 잘못하더라도 하소연할 곳이 없다. 주교청에 상소하더라도 주교가 공정하게 처리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한국교회 2000>, 민경석, 분도출판사, 254~255쪽).
그리고 천주교 신자들 가운데 남녀평등 사상과 민주적 사고방식으로 교육받은 젊은 여성들은 천주교회에 들어왔다가 많은 실망을 안고 교회를 떠나간다. 그들은 ‘본당신부’라는 한 남성을 중심으로 모든 일이 결정되는 비민주적이고 가부장적인 문화를 보고 놀라워한다. 외부에서 볼 때 사회정의를 열심히 부르짖는 천주교회가 실상 내부적으로는 일인독재체제로 군림하는 형태를 보면서 그들은 혼란스러워 한다. 아직까지는 순종하고 헌금 잘내는 신자들이 성당에 있기 때문에 위기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 그리고 대다수의 평신도들의 무지가 오늘날 한국 천주교회의 성직자들의 권위주의를 부추겨온 면도 많다(<한국 가톨릭 교회 이대로 좋은가 Ⅱ>, 서공석, 분도출판사, 154쪽).
상술한 것처럼 국내의 천주교회는 서구와는 달리, 국내 평신도들의 무지로 인해 한국식 권위주의에 물든 본당신부들이 입법권·사법권·행정권을 독점한 채 일인독재체제로 교회가 운영되고 있는 실정이다. 국내 천주교의 평신도들은 하루 빨리 영적인 무지에서 벗어나 성경을 제대로 공부하여 영적인 눈을 떠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올바른 신약 교회의 진리를 깨달아, 교회 내에는 성직자와 평신도의 계급이 존재하지 않고 모든 신자가 사제(제사장)라는 상식적인 교회 진리를 깨달아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천주교의 비성경적인 교계제도를 타파하고 개혁을 단행하여, 더 이상 어리석고 무지한 평신도 즉 병신도에 머물러서는 안될 것이다.
이제 국내 개신교회의 통치 체제에 대해 알아 보자. 오늘날 개신교파들의 지역 교회에 대한 통치 체제는 일반적으로 감독 체제, 장로 체제 그리고 회중 체제이다. 감독 체제는 영국 교회와 미국의 감리교회 등이 감독 체제로 운영되고 있다. 이 체제는 지역 교회에 장로들과 집사들뿐만 아니라 그들 위에 감독들을 따로 두고 있는 제도이다. 장로 체제는 지역 교회 내에 목사와 장로들에 의한 통치 체제이다. 이러한 체제의 지역 교회들은 자치적이지 않고, 노회와 총회의 교단에 의한 중앙 집권적인 제도의 체제이다. 회중 체제는 회중교회나 침례교회처럼 지역 교회의 각종 일들을 회중 전체가 참여하고 결정하는 체제이며 지역 교회들은 대체로 독립적이다.
한편, 국내 대부분의 개신교파의 지역 교회 내에는 ‘담임목사’라는 직분이 존재하고 있는데, 이 담임목사는 천주교회의 본당신부에 해당하는데, 여기서는 특히 국내 개신교의 담임목사의 존재에 대해,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아 보자. 먼저 몇 사람의 저서를 통해 담임목사의 존재에 대한 여러 면을 살펴 보자.
장로교단의 권영진 목사는 그의 저서에서 ‘담임목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한국의 개신교는 세계의 기독교 역사에서 유례없는 독특한 목사제도와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 이로 인해 한국교회 문제의 대부분은 이 목사제도로부터 발생되고 있는 실정이다. 한국 대부분의 개신교파에는 ‘담임목사’가 있는데 이 담임목사의 위치는 대단히 특별하다. 왜냐하면 이 담임목사가 교회의 모든 문제에 대한 최종 의결자이기 때문이다. 목사라고 해서 다 같은 목사가 아니다. 담임목사를 제외한 모든 나머지 목사들은 이름만 목사지 전혀 다른 신분에 불과하다.
그 이유는 담임목사는 그 교회의 주인이지만 나머지 부목사들은 모두 교회에서 고용한 임시직에 불과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부목사와 전도사들은 임기가 보장된 사람들이 아니다. 담임목사 마음에 들면 오래 있을 수도 있지만 맘에 들지 않으면 당장 목이 잘리는 사람들이 이들이다. 그들의 대우나 위치를 볼 때 담임목사와 부목사들은 하늘과 땅보다 더 큰 차이를 보인다(<진정 회개할 곳은 교회다>, 권영진, 리북, 75쪽).
교회개혁실천연대의 공동대표인 백종국 교수는 그의 저서에서 ‘담임목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써 놓았다. 한국교회에서 발생하는 사제주의 현상은 목사직의 계급화이다. 한국교회 헌법들은 위임목사를 비롯하여, 임시목사, 부목사, 원로목사, 무임목사, 전도목사, 교단 기관목사, 종군목사, 교육목사, 선교사, 은퇴목사 등 대략 10 내지 11종류의 목사직을 열거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목사들은 지역 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담임목사(위임목사)를 정점으로 계급 피라미드의 하부를 형성하고 있다. 담임목사와 나머지 목사들과의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라 할 수 있다. 담임목사의 임기는 종신이지만 부목사의 임기는 1년이다. 담임목사는 교회 행정을 총괄하는 당회의 장이 되나 부목사는 당회에 참석조차 할 수 없다(<바벨론에 사로잡힌 교회>, 백종국, 뉴스앤조이, 66쪽).
LA 기독교윤리실천운동 대표인 박문규 교수는 공동 저서에서 ‘담임목사’의 권력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어 놓았다. 서구에 있어 개신교의 성장이 시민 사회의 성장과 병행되어 이루어졌지만, 한국의 개신교는 시민 사회와 시민 정신이 수반되지 않은 채 개신교 교회의 틀만이 주어진 상황에서, 만인제사장주의나 평신도가 다수 참여하는 정책 결정이란 것은 산에 가서 고기를 구하는 것과 다름없다. 그리하여 국내의 개신교는 담임목사에게 교회 내의 절대 권력이 제공되어, 담임목사의 절대 군주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원래 교회 권력 집중으로 부패한 가톨릭 교회에 대한 개혁으로 출발한 개신교는, 한국에 와서는 가톨릭보다 더 부패하여서 세상의 지탄을 받는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다(<성도여 개혁을 외쳐라>, 로스엔젤레스 기독교윤리실천운동, 예영, 88쪽).
담임목사가 교회 위에 군림하게 되면 교회의 모든 규칙과 정책은 담임목사가 좌지우지하게 된다. 그리하여 교회의 다른 직분자들은 담임목사의 눈치를 보느라고 전전긍긍한다. 부목사와 전도사들은 애초부터 저임금의 임시 고용원에 지나지 않을 뿐이고, 그들에게 맡겨진 임무는 담임목사에 대해 신자들의 충성심을 유지, 고양시키는 것이다. 자신의 생살권이 담임목사에게 있는 줄 아는 부목사들은 교인들과의 접촉에 있어서 담임목사 신격화의 행동대원으로 등장하게 되고, 또 교인들의 동정을 살펴 비충성분자의 탄생을 막고, 그런 기미가 보이면 지체없이 담임목사에게 보고하는 역할을 맡는다(앞의 책, 94쪽).
장로교단의 황규학 목사는 그의 저서에서 담임목사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우리나라의 주종관계 구조상, 담임목사의 틀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것이 부목사의 실상이다. 그냥 아무 말 없이 합법, 불법 가리지 않고 그가 시키는 대로 해야 한다. 머리를 깎으라고 하면 깎아야 한다. 담임목사의 맘에 안들면 목회상 불이익을 당하는 것은 삼척동자라도 다 아는 사실이기 때문에 벙어리 삼년식으로, 침묵에 의한 인내심을 갖고 어떠한 고난과 시련도 극복하여 당분간 담임목사를 보좌할 수밖에 없는 위치이다(<한국교회 상식이 운다>, 황규학, 에클레시안, 253쪽).
우리 나라 사람들은 윗사람을 존중하고 존경하는데, 백여 년의 기독교 역사를 통하여 각 치리회의 장을 왕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목사는 교회의 왕이고, 노회장은 노회의 왕이고, 총회장은 교단의 왕이다. 그래서 각 개인의 실권이 상당히 힘을 발휘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한 일부의 치리회장은 교회나, 노회, 총회에서 왕으로 군림하며 밑에 있는 사람들을 종 부리듯 하거나 주요 요직에 자신의 사람들을 심어놓는 것이 사실이다. 순수한 교인들은 그들의 말에 죽으라면 죽는 시늉까지 하는 정도다(<장로교회는 없다>, 황규학, 에큐메니칼연구소, 150쪽).
상술한 바와 같이 국내의 개신교회의 담임목사는 서구의 개신교와는 달리 지역 교회에서 일인독재체제를 유지하며 왕노릇을 하고 있다. 이러한 통치체제는 전 세계에서 한국밖에 없다. 문제는 이러한 사실을 대부분의 평신도들은 알지 못하고 있다. 이를테면 십일조 헌금제도도 전 세계에서 한국 개신교에서만 시행하고 있는 제도인데도, 이런 사실조차 대부분의 평신도들은 알지 못하고 있는 것과 같은 현상이다. 개신교의 평신도들은 더 이상, 소위 병신도 소리를 듣지 말고 이러한 사실이 비성경적임을 직시하고 성경과 교회사를 올바로 공부하여 더 이상 거짓 목자들에게 속지 말고 그릇된 것들을 개혁해 나가야 한다.
전반부에 언급했듯이 신약 성경에 나오는 지역 교회의 통치 체제는 예수님이 교회의 머리(엡1:22)이며,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님이 성령님을 그리스도의 대리자가 되게 하셨다(요14:16). 또 성령님은 각 지역 교회에 복수 장로들을 세워 지역 교회를 돌보게 하셨다(행20:28). 그러므로 성경적인 지역 교회의 통치 체제는 성경적인 장로 직분의 자격(딤전3:1~7)을 갖춘 2인 이상의 복수 장로들에 의한 통치 체제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오늘날 천주교회의 본당신부나 개신교회의 담임목사는 지역 교회의 직분자가 아니다. 이러한 인물은 성경에 나오지 않으며, 인간들의 편의에 따라 고안되어 시행되고 있는 제도이며 전통에 불과하다. 이들이 지역 교회 내에서 우두머리가 되어 일인독재체제를 구축하여 입법권·사법권·행정권을 독점하며 군주 내지 왕 노릇을 하고 있다.
이제 평신도들은 더 이상 지역 교회에서 일인독재체제를 유지하며 교회 권력을 장악하여 독재 정치를 하고 있는 천주교회의 본당 신부와 개신교회의 담임목사 제도를 용납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리하여 정신 차린 평신도들은 위대한 종교개혁자인 마르틴 루터를 본받아 과감히 교회 개혁을 단행해 나가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머지 않은 장래에 국내의 교회도 서구의 교회처럼 텅빈 중·대형 교회의 예배당과 성당을 많이 보게 될 것이다. (2012.2.26. 당당뉴스)
권영문
1955년 부산 출생
전 경성대 교직원
기독교 칼럼니스트
저서 '성경적 기독교와 엉터리 기독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