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세원, 청담동 솔라그라티아 교회 담임 맡아
1백여회 넘는 간증집회 참석...선교 활동에 중점‥교계 신망 두터워
목회자 변신, 부인 서정희씨 역할 커
지난해 한 교단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사실이 알려져 화제를 모은 개그맨 서세원(56)이 현재 서울 청담동 솔라그라티아 교회의 담임 목사로 재직 중인 사실이 확인됐다.
기독교 선교단체인 GMP(Global Missions Pioneers·한국해외선교회 개척선교회) 측이 운영하는 한 블로그에 따르면 서세원은 목사 안수를 받기 전인 지난해 8월 7일 전도사 신분으로 GMP와의 선교 협약을 맺은 것으로 나타났다.
서세원, 교계 신망 두터워
해당 블로그에는 서세원과 부인 서정희씨가 GMP 선교사들의 기도를 받고 협약식을 체결하는 모습이 담겨 있다.
이 블로그에 솔라그라티아 교회 담임이 '서세원 전도사'라고 명기돼 있는 점을 볼 때 서세원은 적어도 지난해 여름 이전부터 교회를 개척하고 목회 사역을 해 온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11월 24일 정식으로 목사 안수를 받은 서세원은 선교 활동에 중점을 둔 목회를 펼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 수년간 재미 한인 교회들을 상대로 다수의 간증 집회를 가져온 서세원은 교회 행사에서 만큼은 단 한 푼의 이득도 취하지 않아 교계에서의 평판과 신망이 비교적 두터운 것으로 전해졌다.
신앙심 깊은 부인, '서세원 변신' 일등공신?
서세원의 종교 활동과 목회자 변신에는 현재 서울 용산구 소재 온누리교회에서 전도사로 재직 중인 부인 서정희씨의 역할이 컸다는 게 관계자들의 전언.
실제로 1백여회가 넘는 간증집회에 서세원은 항상 부인을 대동하며 함께 간증과 신앙고백을 하는 모습을 보여왔다.
2008년 '서정희의 주님'이라는 신앙서적을 발간할 정도로 신앙심이 깊었던 서정희씨는 남편이 사업을 접고 목회자로 일어설 수 있도록 물심양면에서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졌다.
장자연 전 매니저 위해 통성기도
사실 서세원도 연예가에서 열정적인 신앙생활로 소문이 자자했던 인물. 2009년 3월 18일 그 유명한 '장자연 사건'이 발생한 직후 故 장자연의 전 매니저 유모씨를 만났을 때에도 서세원은 알려진 것과는 달리 유씨를 위해 통성기도를 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당시 병실 안에서 서세원과 유씨가 나눈 대화를 어렴풋이 문 밖에서 들은 일부 언론은 "서세원이 유씨에게 '내가 막아줄테니 입 다물어라'고 말했다"며 마치 서세원이 유씨의 기자회견을 막아선 것처럼 보도해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그러나 이날 서세원이 유씨를 찾아간 이유는 단 하나, 그를 위로하고 기도해 주기 위해서였다.
실의에 빠진 유씨가 자살할 것이 염려됐던 서세원은 신앙인으로서 무슨 일이 있어도 자살만은 안 된다는 경고를 해주기 위해 찾아갔고 실제로 유씨를 만난 서세원은 "자살만은 절대로 하지마라. 만일 기자회견을 한다면 말을 많이 하지 말고 신중하게 해라"라는 충고를 건넸었다고.
2006년 새벽기도 때 신앙체험 '회심'
2000년대 들어서 좋지 않은 구설수에 휘말리며 심각한 인기 부침을 겪었던 서세원은 2006년 새벽기도 때 신앙체험을 한 뒤로 독실한 크리스천으로 변신했다. 이때부터 적극적인 신앙생활을 하기 시작한 서세원은 심지어 재판정에 들어가서도 소리 내 기도를 할 정도로 180도 달라진 모습을 보였다.
2000년대 후반까지 안수집사로 활발한 간증 사역을 하던 서세원은 결국 목회자가 될 결심을 하고 미국의 한 신학 교육기관에서 정규과정을 수료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후 관련 교회에서 수련 목사(전도사) 생활을 한 뒤 지금의 개척 교회를 열고 목사 안수까지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2012.2.3. 뉴스데일리 / 조광형 기자)
서세원 목사 사모 서정희씨 "가정교회 규모 유지할 것"
서정희씨
서세원씨가 담임목사로 있는 청담동의 작은 교회명이 ‘솔라그라티아교회’인 것으로 밝혀졌다. 서씨의 목사 안수로 졸지에 ‘사모’가 된 탤런트 서정희씨는 이 같은 사실을 여성조선과의 인터뷰에서 확인했으며, 서씨의 목사 안수 배경 그리고 향후 목회 운영 방침 등에 대한 입장을 더불어 밝혀 주목을 모았다.
온누리교회 전도사로 활동한 바 있는 서정희씨는 서세원씨가 목사 안수를 받게 하는데 일조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녀는 "지난 5년간 사례비는 받지 않으면서 3백회 이상 간증집회를 다녔는데 시간이 지나고나니 ‘내 이야기’인 간증보다는 ‘성경 이야기’인 복음을 전하고 싶어 신학을 하게 됐다"며 "서세원씨는 목사까지 되려던 건 아니었지만 제가 계속 권했다"고 밝혔다.
그리고서는 그간의 어려움에 대해서도 솔직한 심경을 털어놨다. 서정희씨는 "지난 10년 동안 뭘 하든지 좋게 해석되지 않고 나쁘게 매도되는 어려움을 많이 겪어 마음이 너무 아팠고, 욕만 먹고 사는게 참 슬펐다"며 "그냥 열심히 예배드리고 기도할 뿐이다"라고 말했다.
이어 향후 목회 운영 방침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을 교회로 불러들이는 데 집중하기보다 다치고 무너진 영혼들을 일대일로 만나 그들을 완전히 치유하고 싶다"며 현재의 20여명 가정교회 규모를 유지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2012.2.2.29.베리타스)
있는 모습 그대로
서세원 목사·서정희 전도사의 인생 2막
다 가졌었고 다 잃었었다. 정상도 쳤고 바닥도 쳤다.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처럼 휘몰아치던 시절 동안 변하지 않은 한 가지는 두 사람이 늘 함께였다는 거다. 지난 2월 2일 서세원 씨가 목사 안수를 받았다는 소식이 들렸다. 부인 서정희 씨는 전도사로 함께 사역 중이라고 했다. 이 소식이 알려진 날은, 집행유예가 끝나고 모든 법적 효력이 소멸되는 날이었다. 두 사람 인생의 제2막이 열렸다.
2월 2일, 영화감독 서세원 씨가 목사 안수를 받고 청담동의 작은 교회를 개척했다는 소식이 한 케이블 채널을 통해 알려졌다. 부인인 서정희 씨는 전도사로 함께 사역 중이라고 했다. 그 후 인터넷 뉴스는 서세원·서정희 부부의 근황 보도에 많은 부분이 할애됐다. 서세원 씨가 목사 안수를 받았다고 알려진 선교단체, 부부가 건물주로 있던 청담동의 빌딩에는 연일 취재진이 몰려들었다. ‘청담동의 작은 교회’라는 단서만 가지고, 두 사람을 만나기란 쉽지 않았다. 강남구청부터 압구정동까지 작은 교회들을 수소문하던 기자는 문득 서정희 씨에게 직접 연락을 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기사들이 쏟아졌고, 그만큼의 악성 댓글이 쏟아지던 때였다. 기자의 연락이 반가울 리 없었겠으나, 달리 방법이 없었다.
세 개 정도의 메시지를 연달아 보낸 다음 날, 답장이 왔다. ‘대상포진으로 치료받는 중이라 회복되면 연락드리겠다’는 내용이었다. 할머니가 대상포진을 앓았던 터라 한 번 걸리면 꼼짝 못하고 끙끙 앓아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나중에 얘기를 들어보니 머리로 번진 대상포진은 해산의 고통에 비교될 만큼 아픔이 크다고 한다. 몇 번의 메시지를 주고받았고 며칠 뒤, ‘주일 5시 예배에 오세요.’라며 교회 주소를 보내주었다. 당분간은 어렵겠거니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이른 연락이 고마웠다.
그리고 찾아간 교회는 주소를 몰랐다면 찾을 수 없었을 곳에 있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먼저 도착한 성도들과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는 서세원 목사의 모습이 보였다. 예배 처소로 쓰이는 공간은 아담했다. 서른 개 정도의 의자가 있고, 왼편 앞에는 신디사이저 한 대, 높지 않은 강단에는 흰색 앉은뱅이 초들이 줄지어 있었다. 관찰을 멈추자 찬양이 시작됐다. 서정희 전도사는 오른쪽 맨 앞에 앉아 예배의 시작부터 끝까지 자리를 지키며 찬양리더, 설교자를 도왔다. 이윽고 설교를 위해 서세원 목사가 강단에 섰다. 말씀과 기도 찬양과 축도로 예배를 마치고 5일 후, 솔라 그라티아 교회에서 서정희 씨를 만났다.
Free(무보수 사역)로 얻은 Free(자유)
“저희가 여기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한 건 지난 5월부터예요. 그때 서세원 씨는 전도사였어요. 신학은 그 전부터 하고 있었어요. 미국에서 한 학기 하고 휴학하고 다시 듣고 하면서 모든 과정을 마쳤어요. 그 후로 한국에 와서도 함께 학교를 다니면서 (신학) 공부를 했고요. 이게 지금 하고 있는 공부 자료예요(A4 용지를 묶은 프린트 물은 낱권으로 성경 66권 중 한 부분씩을 정리해둔 것이다. 안에는 거의 모든 페이지에 직접 쓴 손글씨가 빼곡하다). 한 번 시작한 건 열심히 하는 성격이고요. 그래서 학교에서 미움받아요. 숙제를 너무 열심히 하니까.(웃음) 그래도 (공부하는 걸) 외부에 알리지 못한 건 끝까지 완주하지 못할까 걱정돼서였어요. 그렇다고 굳이 저희가 숨기고 다닌 건 아니고요. 쭉 아무 이야기가 없다가 갑자기 2월에 보도가 돼서 저희도 놀랐어요. 남편 집행유예가 딱 끝나는 날이 2월 5일이에요. 법적인 거는 금요일에 딱 끝났는데, 그날 인터넷에 쫙 퍼진 거예요.”
개그맨이자 영화감독인 서세원 씨가 목사가 된 건 놀라운 소식이었다. 놀라움의 나날을 보내는 건 아내 서정희 씨도 마찬가지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감사하기만 해요. 남편이 목사가 되고 제가 전도사가 되는 날을 어디 꿈이라도 꿔봤겠어요, 제가. 저는 새벽기도만 같이 한 번 해봤으면, 하고 기도했어요. 그러니까 같이 사역하고 예배하는 게 정말 기뻐요. 어떻게 나한테 이런 일이 일어났나, 싶어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새벽 풍경은 이랬다. 새벽 세 시 반에 먼저 일어난 서정희는 커피를 끓이고 차에 시동을 걸어놓는다. 아침이니 블랙커피보다 설탕과 우유를 듬뿍 넣은 커피를 준비한다. 남편을 깨워 미리 챙겨 둔 옷을 입힌다. 한 걸음 뗄 때마다 툴툴거리는 걸 달래가며 차에 태운다. 졸린 눈을 비비며 운전하는 남편에게 커피를 건네고, 교회에 도착해서 주차할 때까지 서정희의 옷은 땀으로 흠뻑 젖는다. 그래도 함께 새벽 예배를 드리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고 했다.
“예전에 저는 새벽에 일어나 예배를 가려다가도 남편이 ‘어디 가. 들어와!’ 그러면 짐 놓고 들어갔어요. 교회에 못 가게 하면 집에 있다가 남편이 촬영가면 가고요. 남편이 교회에 다니지 않아 힘들어하는 분들을 많이 만나요. 울면서 기도하는 자매님한테는 ‘가정을 더 잘 돌보세요.’ 그래요. 아이도 더 잘 돌보고 놀러 가자 그러면 얼른 맛있는 거 싸서 나가고, 그럼 감동되는 순간이 올 거예요. 지금이 아니어도 괜찮아요.”
솔라 그라티아 교회의 주보. 매 주 서정희가 직접 만드는 Hand Made 작품이다.
서세원·서정희 부부는 2005년 12월 24일에 집사 안수를 받았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이들이 바닥을 치던 시절이었다. 2002년 서세원이 제작한 영화 <조폭 마누라>는 크게 흥행했고, 큰 성공을 가져다줬다. 당시 그가 진행하던 <서세원 쇼>는 톱스타만 출연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토크 프로그램이었다. 사람들은 그를 ‘미다스의 손’이라 부르며 치켜세웠고, 주변엔 사람이 몰렸다. 그러나 소속 연예인 홍보와 세금 관련 문제로 수사가 시작됐고, 2003년 10월에 구속됐다. 정상에서 한 걸음 내딛자 낭떠러지였다. 서세원은 《서정희의 She is at Home》 책 서문에서 구치소에 있는 동안 ‘이 세상에서 내게 가장 필요한 사람은 아내다. 그동안 함께해준 아내, 무조건 내 편이 되어준 아내. 지난 25년 동안 잘못했다면 앞으로 25년은 아내가 하고자 하는 일은 무조건, 끝까지 함께하자.’고 다짐했다고 한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 가족이 무너졌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무너졌을지 모르지만 우리 가족에게 새로운 은혜를 부어주셨습니다. (…) 복이라는 것은 물질이 아니었고, 명예나 이름도 아니었습니다. (…) 이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는 또 하나의 힘은 남편에 대한 사랑이었습니다. 제가 남편을 너무 사랑했던 것 같습니다.” -《서정희의 주님》 中
현재 부부가 사역하는 교회는 ‘솔라 그라티아’다. ‘오직, 은혜로만’이라는 뜻이다. 말 그대로다. 두 사람은 모든 사역을 무보수로 한다. 솔라 그라티아 교회는 소규모 공동체다. 앞으로도 규모를 키울 생각은 없다고 했다. 이들의 목적은 ‘선교’이기 때문이다. 사역이 필요한 곳이라면 언제든 떠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기 때문에 몸집은 가벼울수록 좋다. 그리고 선교에 필요한 모든 비용은 스스로 충당한다. 비행기 삯도 식비도 수고비도 받지 않는 게 두 사람이 세운 원칙이다.
“지난 5년 동안 저희가 300회가 넘는 간증 집회를 다녔어요. 그때도 사례비는 받지 않았어요. 시간이 지나고 나니 간증(내 이야기)보다는 복음(성경 이야기)을 전하고 싶었고, 그게 신학을 하게 된 계기가 됐어요. 서세원 씨는 목사까지 되려던 건 아니었는데 제가 계속 권했죠. 전도사일 때는 말씀은 서세원 씨가 전하고 축도는 다른 목사님이 하셨거든요. 목사 안수받고 교회 개척하고 동역하면서, 이제는 제가 좀 함부로 해요. 이젠 막 대드는 거야. 한 마디 하면 열 마디하고. 왜 그런가 생각해보니까 제가 갱년기이기도 하고, 이제 다 이루고 나니까 잘 보일 이유가 없잖아요. 목사님이 잘못하면 자기만 욕먹지 뭐.(웃음) 지금은 제가 품지 않아도 돼요. 자기가 다 섰으니까.”
자신이 전한 말씀에 대해 일점일획이라도 다른 게 섞이면 냉정하게 이야기해주는 아내를 보며 서세원 목사는 “저 사람이 요즘 PD의 영을 받았다”고 이야기한다. “조정의 은사를 받았는지 나를 자꾸 조정하려고 한다”면서.
유일한 스폰서 우리 딸 동주
두 사람 사이에는 딸 서동주(30)와 아들 서미로(27)가 있다. 큰딸 서동주는 어릴 적 미국 이모 집에 놀러갔다가 미국 학생들의 자유로운 모습을 보고 반해 유학을 결정한다. 딸의 책 《동주 이야기》에는 당시의 상황이 잘 나와 있다.
‘마냥 신나 있던 나와 동생을 앉혀놓고 아빠는 엄숙하게 입을 열었다.
“너희는 아직 어리지만 너희 의견을 존중해서 보내주기로 한 거다. 단, 조건이 있다. 아빠는 외화 낭비하는 꼴은 절대 못 보니, 가면 무조건 1등을 해야 한다.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할 거라면 지금이라도 가지 않겠다고 말해.”
“알았어, 아빠. 대신 우리도 조건이 있어. 앞으로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까 성적표 보여 달라고만 하지 마.”
뭔가 말도 안 되는 조건이었지만 아빠는 심각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 그러더니 이윽고.
“그래, 약속할게. 대신 너희도 약속 지켜라.”
딸은 13세에 페이스쿨로 유학한 뒤 세인트폴스쿨을 거쳐 미술 전공으로 웰슬리대학에 입학, 수학에 흥미를 느껴 MIT 순수수학 전공으로 편입, 졸업 후에는 세계 1위 경영대학원인 와튼스쿨에 입학했다. 지금은 유학 중 만난 여섯 살 연상의 사업가와 결혼해(사위 역시 하버드대와 스탠퍼드대 MBA를 마친 수재다)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생활하고 있다.
“값비싼 건 거의 다 판 거 같아요. 패물이나 명품들은 거의 다 처분했어요. 싼값에 주변 사람들에게 나눠주기도 하고요. 급한 돈은 융자를 받기도 해요. 융자받기가 어려운데, 교회 일에 필요할 땐 융자도 잘돼요.(웃음) 그리고 제일 좋은 공급처는 우리 딸이에요. 딸이 미국, 프라하, 중국을 오가며 살고 있는데 그때마다 우리를 초대하거든요. 근데 딸만 보겠다고 가는 건 좀 아니잖아요. 그럼 꼭 가서 사역할 일이 생겨요. 얼마 전에는 딸이 베이징에서 선정한 사진작가 10인에 선정됐는데, ‘엄마 혹시 돈 필요해?’ 하면서 그 상금을 붙여줬어요. 그때 교회에 꼭 필요한 돈이 있었는데 시기가 딱 맞았죠.”
물질만이 아니다. 잘 키운 딸과 아들은 부부의 든든한 지원군이다. ‘미로밴드’라는 이름으로 그룹 활동을 했던 아들은 일본 와세다대학을 다니다 올해 고려대학교에 들어갔다. 아들의 학비 역시 딸이 지원해주었다는 훈훈한 소식이다.
“사실 저는 시집을 너무 일찍 왔잖아요. 스물한 살에 큰애 낳고, 스물다섯 전에 이미 출산을 끝냈으니까.(웃음) 애들 키우고 집 안 돌보는 게 제 전부였어요. 바깥일을 전혀 안 해서 사회성이 없어요. 생활 패턴도 집, 교회, 목욕탕이 전부니 얼굴이 안 좋으려야 안 좋을 수가 없고요. 근데 성경의 얼굴이 있어요. 해같이 빛나고 그 사람을 바라보면 내 영이 정화되는 거 같은. 그런 사람이 되기를 원한 거지, 동안이 되고 싶은 건 아니에요. 저도 흰머리 염색하고 돋보기 끼고, 나이 50 넘으면 남들 하는 거 똑같이 해요. 또 제가 전도사 됐다고 입던 걸 안 입으면서 갑자기 검소하게 전도사님 옷 입고 나서는 것도 이상하잖아요. 우리 성도님들이 옷 입는 거에 자유로워졌대요. 사모님이 예쁘다 그러고 칭찬해주고 그러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했을 때는 이 땅의 모든 것이 예쁘게 보였기 때문이에요. 그걸 누가 취하느냐의 문제죠. 우리 목사님 옷 잘 입잖아요. 그런 것도 밖에 몰래 나가서 사는 것보다 정직하게 사는 게 낫다고 생각해요. 저희는 잘될 때도 협찬을 안 받았어요. 버는 만큼 투자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지금은 연예인일때 보다 더 잘 입어야 한다. 믿는 자로서 더 멋지게 입어야 한다. 그래서 제가 ‘목사님은 더 멋지셔야 합니다. 저는 옛날 거 입지만, 목사님은 가끔 사셔야 합니다.’ 이렇게 부추겨요. 제일 중요한 건 내면의 정결함이에요. 집에서나 나와서나 교회에서나 우리가 똑같은 사람이면 더없이 좋겠고요.”
딸 서동주가 그린 어릴 적 서세원·서정희 가족의 모습. 동생은 엄마 배 속에.
있는 모습 그대로
“저는 잘될 때도 뭔지 모르게 위축돼 있었어요. 제가 좋아서 하는 일이고, 누굴 속이거나 한 일도 없는데 사람들이 안 좋게 보거나 사실과 다른 소문들이 많이 났으니까요. 성형 중독이라더라, 서세원이 도박에 빠졌다더라, 애들 학교는 기부금으로 보냈다더라, 뭐 그런. 그런데 지금은 반성을 해요. 저도 힘들 때는 다른 사람들 잘사는 것만 봐도 힘들더라고요. 제가 그동안 ‘나 잘하죠?’ 이런 칭찬을 받고 싶어서 힘든 분들에게 상처를 준 건 아닌가 싶었어요. 뒤의 스토리를 알면 돌 던질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다 힘든 게 있고 스토리가 있고 그런 건데. 그런데 이젠 좀 선입견을 내려놓고 봐주셨으면 좋겠어요. 30년 산 주부로, 50년 산 자궁 없는 여자로. 제가 2004년에 자궁수술을 했고, 2006년에 가슴에서 종양을 발견해 2010년에 수술했거든요. 그러니까 가슴도 없고 자궁도 없고, 저는 여자가 아니랍니다.(웃음) 그런데 그런 걸 다 겪고도, 남편이 일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10년을 겪고도, 이렇게 웃으면서 살고 있어요.”
그날, 예배에서 들은 서세원 목사의 설교는 이런 내용이었다.
광야(고난의 자리)에 있을 때 하나님을 더 깊이 만날 수 있다. 그런데 그때 원수의 공격도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타이르고, 위로한다(호세아서 2장 14절 中). 만약 광야에 있지 않았다면 나는 목사가 되지 않았을 거고, 하나님을 몰랐을 거다. 당뇨가 심해져 위험했을 수도 있다. 하루에 세 시간씩 걸으면서 그런 생각을 한다. 이곳이 나에게 은혜로구나.
대한민국에서 서세원이라는 이름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가 어떤 시간을 보내왔는지도 잘 알 것이다. 상처는 상처를 알아본다. 그가 하는 말이 허투루 들리지 않는 이유는, 겪어본 사람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서정희 전도사가 왜 인터뷰 전에 먼저 예배에 와보라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말을 하기는 쉽다. 손가락질하기는 더 쉽다. 소문은 빠르고 인터넷은 더 빠르다. 인터뷰 두 시간, 예배 두 시간으로 두 사람에 대한 모든 것을 알 수는 없다. 서정희 전도사는 기자에게 “인터뷰보다 오늘의 만남이 더 중요하다. 내 앞의 한 사람이 가장 중요하니까.”라고 말했고, 서세원 목사는 예배의 끝에 거기 모인 서른 명의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의 어깨에 손을 얹고 정성껏 기도해주었다. 지난 10년 동안 부부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다는 모른다. 다만 2012년 두 사람을 만난 그곳에는, 사랑이 있었다. (2012.2.28.여성조선 / 취재 유슬기 기자 사진 이준경, 서정희 제공)
목사로 제2의 인생 시작한 서세원과 아내 서정희 직접 만났다
"아프고 힘든 사람들을 일으켜 세우는 통로가 되고 싶어요"
서세원이 목회자의 길을 걷고 있다. 그동안 꾸준히 국내외 선교활동에 힘쓰며 신학 공부에 매진했던 그는 지난해 11월 목사 안수를 받고 서울 강남구 청담동에 작은 개척교회를 열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인기 개그맨에서 영화제작자로, 그리고 이제는 스무 명 남짓한 교인들을 이끄는 담임목사로 삶의 전환기를 맞이하기까지는 아내 서정희의 역할이 가장 컸다. 뜨거운 신앙심으로 모진 세월을 이겨내고 이제야 비로소 참된 행복을 찾은 서세원·서정희 부부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교회에 가서 예배에 참석해보니…
지난 2월 초, 서세원(56)이 목사로 활동 중이라는 소식이 전해졌다. 독실한 크리스천으로 잘 알려졌던 그는 미국의 한 신학 교육기관에서 정규 과정을 수료하고 심사 과정을 거친 뒤 정식으로 목사 안수를 받았다고 한다. 목회자로 변신한 서세원과 몇 차례 전화 통화를 시도했지만 연락이 잘 닿지 않았고, 대신 아내 서정희(52)를 설득한 끝에 청담동에 자리한 그의 개척교회로 찾아갈 수 있었다.
일요일 오후, 예배를 앞두고 서세원은 교회 앞에서 교인들에게 일일이 따뜻한 차를 대접하며 반갑게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지만 환한 얼굴빛에서 예전보다 한결 편안해진 듯한 그의 마음이 느껴졌다. 작고 아담한 예배당 안에서는 그의 아내 서정희를 비롯한 20여 명의 교인들이 예배를 준비하고 있었다. 곳곳에 서정희의 손때 묻은 물건들이 아기자기하게 놓여 있어 눈길을 끌었는데, 자녀들이 집에서 쓰던 책상과 책장, 남편의 사무실에 있던 수납함 등을 하나하나 재활용해 '서정희표 스타일'로 따뜻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이윽고 서세원이 인도하는 예배가 시작됐다. 그의 힘 있는 설교는 진한 웃음과 감동을 선사하며 좌중을 압도했다. 틈틈이 신앙심이 약했던 시절 자신의 경험담부터 목회자의 길에 첫발을 내딛고 '믿음의 증인'이 되기까지의 삶을 고백하는 모습은 그가 종교를 통해 다시 태어났음을 확인하게 했다. 두 시간 가까이 진행된 예배가 끝난 뒤 서세원에게 짧은 인사를 건네자 그는 "다음에 또 보자"라며 다정하게 미소 지었다. 과거 방송에서 보던 모습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그는 정말 목사가 되어 있었다.
가정이 먼저 회복되면 믿음의 문 열린다
그로부터 며칠 뒤, 그곳에서 다시 아내 서정희를 만났다. 두 달째 대상포진을 앓고 있다는 그녀는 많이 수척해진 모습이었지만 여전히 고왔다. 평소 꼼꼼한 성격에 자기가 맡은 일만큼은 완벽하게 마무리할 정도로 철두철미하다는 서정희는 직접 꽃을 사 와서 예배당을 장식하고, 교회 청소부터 주보를 만드는 일까지 일일이 도맡아 하고 있었다.
"하나님이 제게 주신 은사를 교회에서 많이 사용하죠. 선교활동을 다니고 그 와중에 교회까지 챙기려니 면역력이 떨어지고 체력이 바닥난 것 같아요. 그래서 대상포진에 걸렸나 봐요. 게다가 벌써 나이가 쉰을 넘기다 보니 갱년기 증상도 있고요."
사실 그녀는 인터뷰에 응하는 것을 굉장히 조심스러워했다. 어떤 말을 하더라도 세상이 자신의 진심을 알아줄 것 같지 않아 두려웠기 때문이라고 한다.
"지난 10년 동안 저는 뭘 하든지 좋게 해석되지 않고 나쁘게만 매도되는 어려움을 많이 겪었어요. 마음이 무척 아파요. 때로는 억울하다고 말하고 싶고 제 마음을 표현하고도 싶은데 하나님은 제가 그냥 침묵하기를 원하시는 듯해요. 그래서 그냥 열심히 예배드리고 기도할 뿐이에요. 제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게 바로 그거니까요."
세상이 등을 돌릴수록 서정희는 신학 공부에 매달렸다. 서세원을 교회로 이끈 이도 바로 그녀다. 그러나 처음부터 쉬웠던 건 아니다. 교회를 왜 다녀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남편의 반대에 부딪히기 일쑤였다.
"새벽기도에 나가려다가 남편이 '들어와서 자'라고 하면 그냥 들어와서 잤어요. 교회에 가지 말라고 하면 혼자 울면서 기도했고요. 남편이 촬영하러 나간 틈을 타서 몰래 교회에 간 적도 있어요."
대신 그녀는 서세원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 자신의 모든 일상을 남편에게 맞췄다. 남편에게 순종하면서 가정을 회복시키는 것이 우선이라는 생각으로 참고 기다렸다. 그러다 보면 남편도 언젠가는 자신의 뜻을 받아들여줄 것이라고 믿었다.
"남편이 원하는 모든 것을 함께했어요. 언제나 남편을 존경했고, 사랑했고, 견뎠고, 기다렸고요. 그러다 보니 제 마음을 알아주면서 조금씩 변하더라고요. 아이 다루듯 달래면서 같이 새벽기도에 나가기 시작했죠. 남편이 하나님을 알게 되면서 부부 사이가 더 좋아졌어요. 요즘 주위를 보면 힘들다고 헤어지는 부부들이 많은데 저희에게는 전혀 그런 게 안 통했던 것 같아요."
더 많은 사람을 축복하기 위해 선택한 길
서세원은 서정희의 살뜰한 내조를 받으며 안수집사와 전도사로 차근차근 교회 직분을 수행해나가면서 신앙심을 키웠다. 국내를 비롯한 해외 곳곳을 돌아다니며 선교활동을 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목사 안수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다고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저희 부부가 간증만 하기를 원하더라고요. 뭘 그리 대단하게 살아왔다고요. 사회적으로 좋은 이미지를 쌓지도 못했는데 말이죠. 저와 남편은 간증이 아닌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고 싶었어요. 또 선교활동을 다니다 보니 전도사라는 직분만으로는 한계가 있더라고요. 저희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는 이들을 위해 만찬을 준비하고, 세례와 축도를 하고 싶은데 그건 목사만의 권한이거든요. 이런 이유들 때문에 남편에게 목사 안수를 받는 게 어떻겠냐고 설득해서 여기까지 오게 됐어요."
그녀는 인터뷰 도중 남편과 신학교를 다니며 매일 작성했던 묵상 노트들을 꺼내 와서 보여주기도 했다. 손글씨로 빼곡하게 채워진 노트 안에는 그동안 그녀가 성경을 읽고 기도에 매달리며 보내온 시간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간혹 저희가 제대로 공부도 하지 않고 교회 일을 하는 게 아닌지 의심의 눈길을 보내는 분들이 있어요. 그런데 절대 그렇지 않아요. 저희는 아주 오래전부터 꾸준히 공부하면서 차근차근 준비해왔어요. 이것 보세요. 그 결과물들을 제가 전부 보관하고 있잖아요. 언젠가는 세상이 알아줄 날이 오겠죠…?"
서정희는 서세원과 함께 꾸려 나갈 개척교회가 앞으로도 지금과 같은 규모로 작지만 알차게 유지되기를 바란다고 한다. '가정교회'의 틀을 절대 벗어나지 않고 싶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을 교회로 불러 모으는 데 집중하기보다는, 세상 속에서 다치고 무너진 영혼들을 일대일로 만나 그들을 치유시킨 뒤 다른 교회로 돌려보내는 시스템으로 믿음의 일꾼들을 양육시키는 것이 목적이라고 했다.
"'내 교회'를 운운하면서 부흥에만 목적을 두고 싶지 않아요. 세계 어디든지 하나님의 믿음을 필요로 하는 곳을 찾아서 기도하며 돕고 싶어요. 그게 저희의 소명이라고 생각하고요."
교회는 철저히 서세원·서정희 부부의 자비로만 운영된다. 감사헌금 외에는 십일조도 절대 받지 않는다. 특히 감사헌금이 10만원을 넘길 때는 반드시 확인을 거친다. 교인들로부터 무리하게 헌금을 걷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나누어주고 싶은 마음에 자주 식사를 대접해서 '밥 사주는 목사'로 통하게 됐다고 한다.
"1월 1일에는 새해를 맞이한 기념으로 교인들에게 세뱃돈을 나눠드렸어요. 외부 교회로 예배를 드리러 갔을 때인데, 사례비를 받기는커녕 만원짜리를 봉투에 넣어서 30여 명의 학생들에게 전달했죠. 그들이 기뻐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모습을 보니까 정말 돈이 많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새해마다 이런 이벤트를 하면 얼마나 좋겠어요?(웃음)"
쉽게 풀리지 않는 세상의 오해, 답답했던 시간들
서세원과 서정희는 많은 사람들의 생각과는 달리 현재 금전적으로 그리 풍족하지 못하다. 한때는 연예계를 누비며 왕성한 활동을 펼치던 서세원이 여러 사건사고에 휘말리면서부터는 제대로 돈을 벌 수 없었다. 영화 제작자로 이따금 활동하기는 했지만 겨우 적자를 면할 뿐이었다. 더군다나 신앙생활에만 매달리면서부터는 물질로부터 조금씩 더 멀어지게 됐다.
"저희는 절대로 돈을 벌려고 이 길을 가는 게 아니에요. 간혹 저희 부부더러 인기가 떨어지고 돈이 필요하니까 생활비를 구하려고 간증 예배를 다니는 게 아니냐고 왜곡해서 바라보는 시선이 있어서 참 속상해요. 저랑 남편이 그동안 300번 이상 국내외 간증 예배에 다녔지만 해당 교회로부터 돈을 받은 적은 네다섯 번을 제외하고는 전혀 없어요. 돈을 받았던 경우에는 한 교회에서 열 번 이상 참석해줄 것을 부탁할 때 다른 부분들과 연계된 게 있어서 선교활동에 쓰고자 그랬던 거고요. 그런데 저희가 돈 때문에 그렇게 돌아다닌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정말 억울하죠…."
그녀는 목이 멘 듯 잠시 말을 멈췄다. "왜 우리 부부는 좋은 일을 하면서도 비난을 들어야만 하느냐"라며 고개 숙인 채 눈물을 흘렸다. 그러고는 잠시 후 다시 설명을 이어갔다.
"솔직히 저희는 교통비는 물론이고 교회 관계자분들 식사까지 사드리고 돌아오면 굉장히 적자예요. 대부분 형편이 어렵고 교인 수가 100명 이하인 작은 교회들을 찾아가고요. 저희는 이렇게 나누면서 살고 있는데 세상으로부터는 칭찬을 받지 못하네요."
서정희는 '쉬 이즈 앳 홈' 쇼핑몰 사업과 관련해서도 억울한 부분이 많다고 털어놓았다. 교회 일을 하는 데 필요한 돈을 벌고자 시작했던 일인데, 폭리를 취한다는 여론의 따가운 뭇매를 맞으며 오픈한 지 이틀 만에 물건을 제대로 팔아보지도 못하고 접어야 했다고 한다.
"비슷하게 생긴 물건이라도 잘 살펴보면 소재가 다르고 내부 구성에 조금씩 차이가 있을 수 있잖아요. 그런데 똑같이 생긴 게 너무 비싸다는 이유로 매도당했어요. 게다가 수입업체들이 기존에 판매하던 제품을 그들과 협의하에 쇼핑몰에서 다시 팔았을 뿐 제 마음대로 가격을 정한 적이 없어요. 제가 물건을 들여오지도 않았고요. 그런데 제가 가만히 있으니까 사람들의 오해가 점점 깊어지더라고요."
그녀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고 한다. 누군가를 원망하기보다는 자신의 부족했던 부분을 돌아보는 시간을 갖는 게 더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전히 돈을 버는 데 대한 두려움이 크다. 얼마 전에도 몇 곳으로부터 큰 사업 제의를 받았지만 선뜻 계약하지 못했다.
"마음이 아파요. 자꾸 나쁘게만 보시니까 속상하고요. 자신감도 많이 잃었어요…. 저희가 잘못을 했으니까 어려움이 생긴 것이겠지만 그래도 저희 부부에게는 억울한 부분이 많은 편이에요. 31년 동안 결혼생활을 해오면서 아이들 잘 키웠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남편과 잘 견뎌왔거든요. 그런데 다른 분들에게는 쉽게 허용되는 것조차 저희 부부는 못 받아들여주시는 부분들이 속상해요. 그래도 원망하지는 않아요. 저희가 부족해서 그런 것일 테니까요. 다만 이제는 저희 때문에 교인들이 다치지는 않을까 그게 더 염려돼요."
그 사이 경제적으로 부족한 부분은 여유롭던 시절 갖고 있던 것들을 하나, 둘 팔면서 채웠다고 한다.
"패물, 시계, 가방까지 돈 되는 건 모두 팔았어요. 공개적으로 중고 가게를 통한 건 아니고 주위 분들에게 싼값으로 넘기는 식이었거든요. 그분들은 명품을 싸게 장만할 수 있고, 저는 작은 돈이나마 교회활동에 보탤 수 있으니까 감사하죠. 집을 비롯해 다른 부분들에서는 대출을 많이 받았어요."
2년 전 여섯 살 연상의 재미교포 벤처사업가와 결혼식을 올린 뒤 현재 미국에서 살고 있는 딸 서동주는 서세원과 서정희 부부가 경제적으로 힘든 상황에 처할 때마다 가장 큰 힘이 되어준다고 한다. 해외 선교활동을 다닐 때 비행기 표와 호텔을 마련해주는 이도 딸이었다.
"딸이 저희의 유일한 스폰서예요. 언젠가는 베이징 사진전에 출품했다가 10인 안에 뽑혀 상금을 받았다면서 돈을 부쳐주겠다고 하더라고요. 마침 그때 제가 경제적 도움이 절실하던 상황이었거든요. 어떻게 제 마음을 알았는지 적시에 해결해줬죠. 동주는 남편을 따라 프라하, 중국을 거쳐 지금 미국에서 살고 있는데 그 아이 덕분에 저랑 남편이 해외 선교활동을 더 열심히 할 수 있는 것 같아요."
때로는 그녀도 평범한 여자다
기도에만 매달리며 이겨낸 시간들이 이제는 값진 기쁨으로 되돌아왔다는 서정희. 그 사이 그녀는 어느덧 50대에 접어들었다.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여전히 아름다운 미모를 자랑하지만 그녀는 의외로 '동안'이라는 단어를 가장 싫어한다며 손사래를 쳤다.
"저도 그냥 남들처럼 똑같이 늙어갈 뿐이에요. 보름에 한 번씩 흰머리를 염색하고, 돋보기 안 쓰면 책을 못 봐요. 물론 여자로서 아름답게 보이고 싶은 마음이 있기 때문에 가끔 피부과를 다니기는 하지만 억지로 어려지려고 얼굴에 주사를 맞는다거나 그런 건 절대 하지 않아요. 외모에 크게 비중을 두고 꾸준히 투자를 하는 편이 아니거든요."
오로지 교회활동에만 매달린 채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하고, 전도 및 사역활동을 하는 게 그녀의 삶 전체를 차지하고 있지만 그래도 때로는 남들처럼 살아보려고 잠깐의 일탈을 시도한다. 하지만 그 일탈이 그리 대단하게 벌어지지는 않는다. 딸이 비행기표를 보내주면 미국으로 가서 쇼핑을 하고, 맛있는 음식도 찾아 먹으면서 푹 쉬다가 오는 정도에 그친다고 한다.
서정희는 인터뷰를 마치며 둘째 아들 미로(본명 서동천)군이 3월 2일자로 고려대학교에 입학하게 됐다는 기쁜 소식을 전했다. 기존에 다니던 성균관대학교를 자퇴하고 새로운 꿈을 위해 다시 대학 입학을 준비해온 결과라고 한다. 게다가 아들의 대학 등록금은 큰딸이 대신 내주었다고 하니 가족 간의 사랑이 참 대단해 보였다.
"선입견을 내려놓고 저를 봐주셨으면 좋겠어요. 한 남자의 아내로, 두 아이의 엄마로 정말 열심히 살았거든요. 2004년에 자궁 수술을 받아 자궁을 적출한데다가 2006년에는 가슴의 종양을 제거하는 등 여자로서도 힘든 세월이었어요. 하지만 정말 꿋꿋하게 버텨냈어요. 물론 여전히 부족한 부분이 많겠지만 그래도 이제는 세상으로부터 이해받고 싶어요. 이런 저를 필요로 하는 곳으로 가서 아름답게 쓰이기를 원하고요. 아픈 영혼들을 치유하는 통로가 되고 싶어요."
교회에서 나와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데 서정희의 두 손에 자꾸만 눈길이 갔다. 왜소한 체구에 작은 손으로 가족을 지켜내며 세월의 풍파를 모두 견뎌냈다고 생각하니 참 대단해 보였다. 하루하루 온 진심을 다해 살아가고 있는 서정희의 간절한 기도가 앞으로 더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따뜻하게 움직일 수 있으리라 믿는다. (2012.3.5.레이디경향 / 윤현진 기자 사진제공 경향신문 포토뱅크, 서정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