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의 은혜/신앙,시사,목양 칼럼

고난을 영광으로 삼는 신앙의 진보와 비상

에바다. 2012. 3. 29. 15:31

      고난을 영광으로 삼는 신앙의 진보와 비상     


   소강석목사

   (새에덴교회,시인)


중국의 대표적인 병법서 중 손자병법과 오자병법이 있다. 그 병법서들의 대부분은 부국강병의 꿈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초대 교회 신앙은 고난을 즐거움으로 여겼다.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들을 위해서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에 그들도 예수님을 위해서 고난 받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기쁨으로 여긴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물론 사도 바울, 로마의 카타콤베와 갑바도기아에 살았던 사람들이 그랬다. 그리고 교부 시대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이리니우스나 폴리갑, 이그나티우스 같은 교부들도 자기 스스로 고난의 종으로 생각하며 주님 앞에서 고난 받는 것을 즐거움으로 여겼다. 칼빈 역시 경건을 즐거움으로 여겼던 사람이다. 그런데 그들의 경건은 고난과 결부된 경건이었다. 즉 고난은 경건의 기회요 진보를 이루게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경건을 즐거움으로 여겼다는 말은 고난도 기뻐했다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현대교회와 성도들의 신앙은 고난을 싫어한다. 경건마저도 부담스럽게 생각한다. 그래서 고난주간이 오면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깊이 묵상하고 감격하는 것이 아니라 부담스럽게 생각하며 무겁고 거추장스럽게 여긴다. 그러면서 언제부턴가 고난주간을 지키는 것이 형식적이고 틀에 박힌 관례적인 행사로 보낸다.


그리고 현대 교인들은 고난뿐만 아니라 경건도 싫어한다. 한마디로 고난으로부터 자유하고 얽매이지 않으려는 특징이 있다. 한국교회는 더 그렇다. 과거에는 예수님과 복음 때문에 고난을 받았다. 그러나 지금은 대부분 우리의 잘못 때문에 고난을 받고 있다.


지금 안티 크리스천들은 교회를 향해 얼마나 빈정거림과 조롱을 하고 있는가. 근거도 논리도 없는 빈정거림, 그냥 욕이나 짖어대는 꼼수의 공격을 무차별적으로 하고 있지 않는가. 이것은 핍박과 박해보다 더 무서운 것이다. 특별히 이번 4월 29일 올림픽 주경기장에서 레이디 가가 콘서트가 열린다. 레이디 가가는 가룟 유다를 칭송하고 동성연애를 찬성할 뿐만 아니라 얼마나 기독교를 향하여 빈정거리고 조롱하는 가수인지 모른다.


그녀의 반기독교적인 퍼포먼스나 음란한 쇼가 한번 지나가면 한국교회에 한동안 영적 회오리바람이 불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한국교회로서는 최악의 고난을 당한다고 할 것이다. 우리가 고난을 싫어하니까 하나님께서 억지로라도 이런 고난을 주었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때 우리는 어떻게 고난주간을 깊이 묵상하며 맞아야 하는가.


첫째, 고난과 경건을 즐거움으로 여기는 신앙을 회복해야 한다. 누가 고난을 좋아하겠는가. 육체를 가진 인간이라면 고난을 다 싫어한다. 그래서 예수님도 육체를 가지셨기 때문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할 수만 있으면 이 고난을 지나가게 해 달라고 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신앙의 마인드로 볼 때 주님을 위한 고난과 수난은 최대의 영광이고 즐거움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고난주간은 결코 부담이 되어서는 안 된다. 또 무겁고 거추장스럽게 생각해서도 안 된다.


그러니까 고난주간을 마지못해서 형식적이고 율법적인 자세로 받게 되는 것이다. 고난이 우리의 즐거움이고 영광으로 여겨진다고 할 때 고난주간은 가장 큰 감동과 감격이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고난주간에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깊이 묵상하고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런 사람은 경건하게 살아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둘째, 이웃의 아픔을 공감하고 나누는 삶을 회복해야 한다. 요즘은 세계적인 불황이 닥쳐서 모두가 다 살기가 어렵다고 한다. 서민만 어려울 뿐만 아니라 대통령도 어렵다. 어느 일간지 신문에서는 이 시대를 아버지와 아들이 동시에 직장을 잃은 시대라고 표현한 적이 있다. 아버지는 퇴직을 당하고 아들은 직장을 구하지 못하는 절망적 시대가 아닌가. 이럴 때 교회가 나 몰라라 하고 있으면 안 된다.


그럴수록 그들의 아픔을 공감하고 고난과 소통하며 조그마한 사랑이라도 나눠야 한다. 그들에게 아픈 마음으로 다가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달할 뿐만 아니라 작지만 우리의 희망을 나누고 사랑과 섬김을 베풀어야 한다. 특별히 이번 고난주간에는 교회도 힘들지만 더 힘든 이웃들에게 조그마한 사랑을 나누어 보자. 그것이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의 정신이고 섬김의 삶이 아니겠는가.


셋째, 고난을 원망만 하지 말고 선용하는 지혜도 가져야한다. 예수님도 십자가의 고난이 있었기 때문에 부활의 영광을 이룬 것이다. 따라서 우리에게도 의미 없는 고난이 있을 수 없다. 그리고 대책도 없는 고난을 끝까지 당하고만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고난을 잘 선용만 하면 더 큰 영광과 전화위복의 은혜를 누릴 수 있다. 우리는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고 하는 시편기자의 고백을 너무나 잘 알고 있지 않는가. 그렇다. 고난은 영광의 길이다. ‘노 크로스, 노 크라운’(No Cross, No Crown)이라는 말이 있지 않는가.


비록 교회는 교회대로 힘들고 성도들도 나름대로 힘들지만, 고난을 원망만 하지 말고 잘 선용하면 분명한 영광과 복이 있다. 그러기 위해서 고난주간을 맞아 ‘왜 우리가 이렇게 고난을 당하는가, 우리의 잘못은 무엇인가,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 지혜롭게 사는 것이고 최선의 삶인가’ 이런 생각을 하면서 고난 앞에서 더 낮아지고 더 기도하며 지혜로운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그럴 때 고난은 내일의 눈부신 영광으로 승화될 것이다.


금번 고난절은 다시 한 번 이런 성숙한 신앙의 진보와 비상의 기회로 삼아보자.


-기독신문 논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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