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사랑으로/소망과 희망의샘

누구의 이웃이 되어줄 것인가

에바다. 2013. 11. 29. 11:56

누구의 이웃이 되어줄 것인가



▲박희돈목사
밥사랑열린공동체 대표


12월 성탄을 앞둔 지금 이미 우리 주변 어려운 이웃에게는 동절기 고난의 행진이 시작되었다. 이웃사랑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함으로서 종교적 자선에 의한 봉사가 아닌 기독교의 기본교리이며 예수님의 가르치심인 이웃사랑의 책임과 의무를 강조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지난 13년 동안 자칭, 타칭 노숙인의 큰 머슴으로 교회 밖의 교회인 빈들목회에 사역자로 다듬어지기 위해 잃을 것은 잃어버리고, 빼앗길 것을 빼앗겼다. 또 포기할 것은 포기하고, 밑바닥 인생을 살아 나오면서 엄청난 오해와 불신 속에서도 온갖 경험을 다했다. 사각지대 방치된 노숙인에게 아주 작은 사랑의 불씨가 이제는 사랑의 용광로가 되어 되살아났다.


교회의 기능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사랑의 실천기능이다. 교회의 조직은 사랑의 실천을 하기에 아주 우수한 조직이다. 오늘과 내일을 위해, 그리고 사회적 약자를 위해 교회가 사랑의 실천운동을 적극적으로, 주도적으로 전개하여 받는 교회에서 주는 교회로 변모해야 할 것이다. 첫 눈이 내리고 밤사이에는 얕은 얼음이 얼어가는 추위에도 거리를 돌아다니는 이들이 있다. 배고픔을 견디지 못해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한 끼의 식사를 찾아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는 노숙인들.


현실을 직시하면서 하나님이 교회에 주신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유대교 학자인 한 율법사가 예수님께 던진 질문을 들어보자. “선생님 나의 이웃이 누구입니까”(눅10:29) 우리는 살아가면서 율법사가 던진 이같은 질문에 때로는 봉착하곤 한다. 내 몸처럼 아끼고 사랑해야 할 대상으로서의 이웃이 누구인지 내가 사랑해야 할 이웃의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또한 내가 도와주어야 할 이웃의 범위나 한계를 어떻게 정해야 할 것인지, 내 가족을 부양하고 교회를 섬기기도 벅찬 우리에게는 합리적인 대답을 찾기 매우 어려운 문제다.


겨울용 신발이 없어서 아직도 여름용 슬리퍼를 끌고 다니는 사람. 얇은 여름철 옷을 입고 덜덜 떨면서 한 끼의 식사를 찾아먹기에 허름한 사람, 밤이면 구석진 곳에서 하룻밤 덮고 잘 이불이 없어 비닐 한 장으로 이불삼고 주어온 종이 박스로 요를 삼아 왕새우처럼 노상에 설잠을 자는 사람, 교회 안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사각지대 미발견 사회적 약자들이 동절기에는 훨씬 더 많이 내 눈에 띈다.


아직까지 정부도 교회도 정확한 해답과 대책을 내어 놓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답을 제시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그 율법사에게 “당신의 이웃은 이런 저런 사람이다” 라고 대답하지 않으셨다. 그렇다고 한 개인이 사랑해야 할 이웃의 범위나 한계를 명확하게 규정하는 정의도 내리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다만 그 유명한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통하여 참된 이웃의 의미를 가르치셨다. 예수님께서는 질문의 중심에 ‘강도 만난 자’를 둠으로써 사랑을 베풀고자 하는 ‘나’의 관점이 아니라 오히려 ‘사랑을 필요로 하는 사람’의 관점에서 진정한 이웃이 누구인가를 묻고 계신다.


성탄절, 메리 크리스마스. ‘나의 이웃이 누구인가?’라고 묻지 말고 ‘내가 누구의 이웃이 될 것인가?’라고 한번쯤 물어보자. 섬기는 자로 이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 사회적 약자에게도 삶의 질 향상과 예수사랑 서비스에 초점을 맞추자. 이 땅에서 사는 날 동안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고 그에 따라 하나님의 사랑과 의를 실천해야 하는 사회적 책임도 져주는 교회와 성도가 되자.


성탄과 더불어 준비된 예수사랑, 이웃사랑으로 타인을 도와 가면서 감동과 기쁨을 두 배나 즐기는 빼놓을 수 없는 사랑의 실천자가 되자. 어려운 이웃을 위한 하나님의 사랑 실천은 바로 남이 아닌 내가 할 일이다.


-기독신문 오피니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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