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를 믿는 성도의 삶에서 신앙의 능력이 가장 분명하고 확실하게 나타나는
순간이 있다면 임종의 순간일 것입니다.
죽울때 보면 역시 믿는 사람은 다름니다. 저는 목사라는 특수한 직분 때문에
사람들의 임종 장면을 볼 기회가 많습니다. 그 밚은 임종을 지켜보면서 얻은
결론은 신앙인의 최후는 역시 다르다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 역시 죽음은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죽음 직전에는 놀라운 평안이 임합니다.
그 평안, 인생의 가장 절박한 최후의 순간에도 임하는 그 평안과 능력은
우리들의 삶의 구체적인 현장에서는 나타날 수 없습니까?
오늘이라는 현실의 삶에서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날 수 없는 것입니까?
과연 기독교 신앙은 구원받고 천국가는 데만 유호합니까?
왜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은
가정과 직장에서 이처럼 무기력한 삶을 살아야 합니까?
하나님의 임재가 가져다주는
평안과 권능과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무기력한 유일한 원인은 기도의 빈곤 때문입니다.
기도를 망각할때. 기도를 통한 하나님의 임재를 상실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면서도 불신자와 전혀 다를 것이 없는 삶을 살게 됩니다.
신앙생활은 물론, 우리의 삶 전체가 힘을 잃게 됩니다.
그러나 기도하는 사람은 신앙생활을 행복하게 합니다.
왜냐하면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예배하면서,
구하는 것을 그분으로부터 얻고, 그 얻은 것을 누리며 신앙생활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이 행복합니다. 심령에 기쁨이 충만합니다.
교회생활이 신이 나고 힘이 있게 됩니다.
기도와 응답
그럼 기도의 응답을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먼저 나 자신이 기도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자신이 먼저 기도의 사람이 되어야 기도의 생활을 할 수가 있습니다.
기도의 삶을 살게 되면 결과적으로 기도의 응답을 경험하게 도비니다.
마치 자식의 열매를 얻으려면 먼저 부부생활을 해야 하고,
부부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부부의 관계가 되어야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성경 속에서는 기도의 사람들을 향한
엄청난 응답의 약속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 약속들을 신기한 것이 아니라
기도하는 사람에게 지극히 당연한 응답으로
약속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모릅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 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마7:7-8)
이 말씀을 믿습니까?
이 말씀은 기도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당연히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구하는 대로 주시고, 찾는 대로 주시며, 두드리는 대로 주신다는 약속입니가.
이것이 기도하는 사람이 행복한 이유입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33:3)
하나님은 기도하는 사람에게 응답하여 주시되,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까지 , 우리의 기대 영역
그 이상으로 응답하여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말하기를 내가 여기있다 하리라"(사58:9)
"여호와께서 빈궁한 자의 기도를 돌아보시며
저희 기도를 멸시치 아니하셨도다"(시102:17)
이 얼마나 마음 든든한 말씀입니까?
하나님은 가난한 자의 기도에도 응답하십니다.
하나님은 억울한 자의 기도에도 응답하십니다.
하나님은 배운 자, 못 배운자를 구분하시지 않고,
가진 자 못 가진자를 구분하시지 않으시며,
남녀노소를 구분하시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약속은 하나,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응답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구하기만 하면 받을 수 있는 축복, 찾기만 하면 찾을 수 있는 축복,
문을 두드리기만 하면 열릴 수 있는 축복,
이 기막힌 축복이 바로 기도하는 사람이 누릴 수 있는 축복입니다.
응답은 기도하는 사람의 행복압니다.
선결 조건에 주의 하라
그럼 문제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도의 사람으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의 사람으로 살지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기도란 쉽게 정의 하자면
'인간이 하나님을 향하여 소원을 아뢰는 것' 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기도를 '수직적 신앙의 행위' 로 생각합니다.
하나님과 나,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에서 기도를 이해합니다.
옳습니다. 기도가 인간이 하나님을 향하여 그리는 행위라는 점에서는
분명히 옳은 생각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기도가 하나님을 향하여 드리는 것이 분명하지만,
기도는 너와 나, 우리들이라는 인간관계에 의해서
대단한 영향을 받는다는 놀라운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본문이 기록된 바태목음 7장 1절에서 11절까지를 보면
두 가지의 큰 내용이 나옵니다.
하나는 다른 사람을 비판하지 말라는 내용(1-6절)이고,
다른 하나는 기도에 대한 내용(7-11절)입니다.
이 두가지의 내용은 전혀 다른 내용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성경을 깊이 묵상해 보면
이 둘은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남을 비판하지 할라" 와 "기도하라" 는 이 두 말씀은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왜 성경은 기도하라는 말씀을 하면서
남을 비판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이 두 말씀은 성도의 보편적인 생활과 신앙적 행위와의 관계성을
설명함과 동시에 기도에 대한
선결 조건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기도를 명령하시면서
비판하지 말것을 가르치신 이유는 비판으로 인한 결과 때문입니다.
그럼 비판의 결과는 기도의 사람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옵니까?
첫째, 비판은 인간관계의 단절을 가져옵니다
이 땅에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 비판 받는 것을 싫어합니다.
오히려 대접받기를 좋아합니다. 이것은 사람의 자존족 본능입니다.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문제는 자신은 다른 사람에게 비판받기를 대단히 싫어하면서도,
다른 사람에게 대해서는 너무쉽게 비판한다는 점입니다.
우스운 것은 다른 사람에게 헤아림 받기를 싫어하는 사람일수록
오히려 다른 사람을 너무 쉽게 비판합니다.
비판은 서로의 관계를 단절시킵니다.
그리고 서로에게 깊은 상처를 남깁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공동체 내에서 겪는 많은 아픔과 상처는 대부분
사람들의 비판과 헤아림 때문입니다.
그래서 얼마나 많은 성도들이 공동체의 정착에서 실패하고 떠납니까?
우리가 너무 쉽게 하는 다른 사람에 대한 비판 때문에 말입니다.
당신이 기도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타인에 대한 비판을 삼가해야 합니다.
비판으로 인한 인간 관계의 단절이
기도에 심각한 영향을 끼치기 때문입니다.
그 영향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둘째 인간관계의 단절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부자유하게 만듭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공동체 내에서 겪는 인간관계의 단절과 위기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문제로 끝나지 않고 하나님과 나 사이에 관계까지도
자유롭게 하지 못합니다.
이미 예수님은 이 사실을 산상수훈에서 지적하셨습니다.
마태복음5장 23절 이하를 보십시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 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무슨 말씀입니까?
인간관계의 단절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결단코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자이지 못하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자이지 못하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자가 못된다면, 그 사람의 기도생활 역시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지 않으실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의 사람으로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향한 기도만을 중요시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도 중요시해야 합니다.
공동체 내에서 다른 사람에 대하여 함부로 생각하고,
함부로 말하며, 함부로 행동하지 않아야 합니다.
나와 하나님 사이의 바른 관계와 기도생활의 풍성한
축복을 위해서 나와 다른 사람들,
공동체 내에서의 서로에 대한 인간관계를 소중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3장 7절을 보십시오. 사도 베드로는 그것을 존더 좁은
의미에서 이렇게 적용하고 있습니다.
"남편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부부 사이의 관계단절도 기도생활에 방해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남편에게 아내가 다투거나 불편한 관계에 있으면 기도가
잘 되지 않습니다.
성도와 성도간에, 목회자와 성도간에, 인간관계에서 겪는 단절의 아픔은
무엇보다도 영적 생활의 커다란 방해물입니다.
예배가 막히고, 기도가 막힙니다.
우리 편에서 막힐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도 듣지 아니 하십니다.
그래서 가정이 평안해야 합니다.
교회가 평안해야 합니다.
가정에서나 교회에서, 인간관계로 말미암아
불편함이 형성되면,
그것은 서로간에 불편함만이 아니라, 자신과 가정,
그리고 교회의 모든 영적생활을 파괴합니다.
영성이 식어집니다.
신앙생활이 형식적이 되고 맙니다.
기쁨이 없어집니다.
감사가 사라집니다. 피곤합니다.
이것이 인간 관계의 단절이 가져오는 무서운 결과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없게 만듭니다
비판은 결과적으로
우리의 영적인 생활과 기도생활을 막아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없게 만들어 버립니다.
구하기만 하면 받을 수 있는 축복,
찾기만 하면 찾을 수있는 축복,
두드리기만 하면 열릴 수 있는 축복,
이 모든 기도의 축복을 놓치게 되고 맙니다.
기도하지 못하니까, 기도하지 않으니까,
기도의 사람으로 살 수 없으니까,
이 응답의 축복 속에 참여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러나 만약 어떤 사람이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가볍게 여기거나 무시하고, 여전히 남을
비판하는 일을 중단하지 않고,
인간관계가 뒤틀려진 상태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기도한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 기도는 수고로움만 더할 뿐이지 응답이 없습니다.
단지 어리석은 종교적 행위에 불과합니다.
야고보 사도는 야고보서 4장 2절 이하 3절에서 이렇게 가르칩니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
그런데 이 말씀이 무슨 말씀과 연결이 되어 있는가 하면
1절에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어디로 좇아 나느뇨" 라고
시작을 해서 2절에 보면 "너희가 싸우고 다투는 도다" 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너희가 구하여도 얻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하나님은 다투고 싸우는 영성을 가지고 기도하는 사람,
공동체 내에서 서로간에 관계가 단절되고 위기에 놓인 영성으로
기도하는 사람, 그런 사람의 기도는 아무리 열심히 있고,
유창해도 하나님께서 응답하시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사람의 생에 속에는 하나님의 축복을
소유할 수 없습니다.
이 안타까운 진리의 가르침을 이해하십시오
그리고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제 하나님의 원하는 기도의 사람으로 사십시오.
구하면 주시고, 찾으면 찾게 되고, 두드리면 열리는
이 놀라운 축복이 기도하는 사람에게 경험됩니다.
기도의 사람으로 살기 위해서 하나님과의 관계만이 아니라
사람과의 관계도 중요하게 생각하십시오. 다른 사람에 대하여 함부로
비판하지 마십시오 함부로 생각하고 , 함부로 말하고,
함부로 행동하지 마십시오.
무엇보다 당신에게 축복이 없습니다.
복 있는 사람의 자리에 서십시오.
-두레박에서-
♡주의 사랑으로 오늘도 행복하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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