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사랑으로/왜? 기도를

기도의 선결 조건||(마7:1-5)

에바다. 2017. 8. 4. 21:11


    기도의 선결 조건||(마7:1-5) 성도는 본질상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구원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기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이 왜 우리를 행복하게 합니까? 그것은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도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분명 하나님의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특권입니다. 성도에게는 세상 사람들이 가지지 못하는 특권이 있습니다. 그것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내세에 대한 천국의 소망과 약속이고, 다른 하나는 형세에서의 기도 특권과 응답의 약속입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7-8절) 하나님이 주신 이 약속을 믿습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하면, 우리의 구한 것을 주신다고 약속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성도에게 주신 기도의 약속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당신의 것으로 붙드시기 바랍니다. 기도와 비판의 관계성 그런데 이 놀라운 기도의 약속을 주신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가 행복한 사람으로 살기 위해서, 기도의 사람으로 살기 위해서 명심해야 할 한 가지 중요성 사실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다른 사람에 대해서 비판하지 말라는 명령의 말씀이었습니다. 이 말씀은 당시의 신앙인들에게는 충격이었습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을 비롯해서 모든 종교인들에게는 신앙에 대한 이해가, 그리고 종교적 행위에 대한 이해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수직적 관계는 사람과의 수평적 관계를 무시하지 않는다는 새로운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당시 사회를 장악하고 있었던 가장 강력한 종교인들은 바로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이들의 종교행위는 율법주의적이었습니다. 이들의 종교행위는 율법주의적이었습니다. 당시에는 "하라!하지 말라!" 라는 울법주의의 교훈이 그 당시의 사회를 강하게 지배하고 있었고 그 명령의 준행만이 신앙생활의 내용이었습니다. 그 기과 울법주의는 사람들에게 그 시대와 사회를 정죄하는 풍토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신앙 행태와 사회의 모습은 서로를 향한 비판의 풍토가 강하게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당시, 그들은 하나님을 향한 열심보다는 서로를 향해 비판하고 , 비판받고, 그래서 그들의 공동체는 어두움과 분열을 경험하고 있었고 하나님의 축복을 놓치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사랑이 결여된 의식종교의 잘못된 종교현상을 직시하신 주님께서는 기도의 가르침에 앞서 서로를 향한 비판의 삶을 중단하라고 가르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럼 구체적으로 왜 비판하지 말아야 합니까? 두 가지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비판하는 사람은 기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향한 비판의 행위는 결국 하나님과의 관계에서까지 결정적 영향을 끼칩니다. 비판은 사람과의 불편한 관계를 가져오고, 그 불편한 관계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우리를 자유롭게 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의 사람으로 살기 위해서는, 나 자신이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공동체 내에서 서로를 향해 비판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들째, 비판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축복을 놓치기 때문입니다. 비판하는 사람이 기도할 수 없다면, 기도할 수 없는 사람에겐 기도의 응답도 체험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기도의 사람으로 살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을 비판하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 나의 가정이 행복한 가정이 되기 위해서 , 우리의 공동체가 행복한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 우리는 무익한 비판적 삶을 청산해야 합니다. 하루 속히 우리의 비판적 영성을 긍정적이고 포용적인 영성으로 바꾸며, 치료해야 합니다. 비판의 의미 그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비판하지 말라" 는 말씀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입니까?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은 분별하지 말라는 말씀과는 다릅니다. 무엇이 옳고 틀린지에 대해 아무런 분별도 하지 말고. 모든 것에 대해서 눈을 감아버리고 맹목적인 인간이 되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은 7장 13절에서 구별하라고 가르치십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여기서 주님은 좁은 문과 넓은 문을 구별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들에게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이 어느 문인지 잘 분별하여 선택하라고 가르치십니다. 계속되는 말씀에서도 거짓 선지자와 참 선지자에 대해서 분별하라고 가르치십니다. 나무와 열매에 대한 말씀을 하시면서 열매를 보고 나무를 판단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씀하시는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은 옳고그름을 구별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럼 여기서 말하는 비판은 무슨 의미입니까? 여기 사용된 '비판' 이라는 단어의 의미에 가장 가까운 번역을 한다면 '심판' 혹은 '저주' 라고 해야 그 의미가 더 확실해 질 것입니다. 원어의 어근이 가진 의미는 '재판관이 재판석에 앉아서 어떤 사람에 대하여 결정적이고 후회함이 없는, 그리고 전혀 틀리지 않는 최후의 판단을 내리는 것' 의 의미입니다. 사실 이러한 판단은 대단히 어려운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판단이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는 너무 쉽게 다른 사람에 대해서 판단하고, 결론을 내리고, 정죄해 버리지 않습니까? 우리는 너무 쉽게 다른 사람의 마음속까지도 들어갔다 나옵니다. 생각 속에도 들어갔다 나옵니다. 그리고는 마치 남의것을 내 것처럼 결론을 내립니다. 그래서 비판은 자신도 모르게 자신이 하나님이 되어 버리는 무서운 교만의 행위입니다. 이것이 바판의 무서움이요 두려움입니다. 주님은 이런 의미에서의 비판을 금하시는 것입니다. 왜 비판하지 말아야 합니까? 첫째, 비판의 악순환 때문입니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1-2절) 비판은 무엇을 전제하고 있습니까? 비판에 대한 또 다른 공격적 비판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비판의 결과입니다. 비판받는 사람은 그 비판한 사람을 다시 비판할 기회를 찾습니다. 그래서 비판은 비판을 낳고, 그 비판은 또 다른 비판을 낳습니다. 비판은 악순환을 초래하게 됩니다. 비판으로 말미암는 악손환의 결과는 서로를 파괴하고, 공동체를 무너뜨리며, 결국에는 우리의 기도생활을 막고 우리의 행복을 놓치게 만듭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비판함으로 자신의 의가 드러나며, 자신이 휼륭해 지는 줄로 잘못 생각합니다. 비판은 비판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 비판을 열국에는 내가 당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비판은 결국 모두가 망하게 되고 맙니다. 이러한 비판의 파괴벅 결과를 잘 아셨던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비판하지 말라." 오늘날 한국 정치가 모든 국민에게 실망을 안겨주고, 국민들로부터 이렇게 불신과 외면을 당하게 된 위인 중 하나는 당과 당의 비판적 풍토 때문입니다. 둘째, 자신에게도 허물이있기 때문입니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꺠닫지 못하느냐"(3절) 비판적인 사람에 익숙한 사람들을 유심히 살펴보면.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잘 용납할 줄 모릅니다. 그래서 무차별 비판을 가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서는 대단히 관대합니다. 자신의 부끄러움이나 허물을 전혀 인식하지 못합니다. 자신은 대단히 의롭다고 생각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신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헬라 사람들 사이에는 전해 내려오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람은 두 개의 자루를 가지고 다닌다고 합니다. 하나의 자루는 앞에 달고 다니고, 다른 하나는 뒤에 달고 다니는데, 앞의 자루는 남의 허물을 주워 담습니다. 그리고 뒤에 자루에는 자기 자신의 허물을 집어넣습니다. 뒤에 있는 자루가 잘 보입니까. 앞의 자루가 잘 보입니까? 뒤에 있는 자루는 잘 보이지 않습니다. 앞에 있는 자루만 잘 보이니까? 자신의 허물은 잘 보지 않고 남이 허물과 약점만 잘 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비판을 잘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 대하여 비판하지 전에, 자신의 허물을 먼저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눈에 있는 티를 보고 비판하는 내게는 들보가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 다른 사람에 대한 비판을 자제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삶에 대한 비판을 자제해야 나의 영적 생활이 풍요로워 집니다. 교회 공동체가 부흥하게 되는 것입니다. 올스하우젠은 "의의 길은 남이 죄가 아니라 자기의 죄를 찾는데 있다" 고 했습니다.우리의 열심이 우리의 죄를 찾는데 쏟아져야 합니다. 셋째, 다른 것을 수용하지 못합니다. 비판적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고질적인 약점은 심리적 배타성입니다. 이 배타적 성품이 다른 것을 수용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자신과 다른 것은 잘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비판적인 사람들은 수용보다 비판성이 강하기 때문에 자신을 향해 찾아오는 말씀이나 축복을 받아들일 수 있는 정신적 여유를 상실합니다. 6절을 보십시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살할까 염려하라"(6절) 무슨 뜻입니까? 이 말씀은 5절까지의 말씀과 연결이 잘 안되는 말씀 같아 보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개는 누구를 가리킵니까 이 개는 바리새인들을 가리킵니다. 바리새인들은 이방인을 개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개라고 부르셨습니다. 왜 그렇게 불렀습니까? 예수님은 비판의 영성에 사로잡혀 자신들의 허물은 보지 못하고 무자비한 정죄와 비판의 풍토를 만들고 있는 율법주의의 주인공들을 개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제자들에게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라 진주를 돼지에게 주지말라. 그들은 귀한 것을 귀한 줄 모르고 오히려 그것을 발로 밟고 오히려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하려고 달려든다" 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비판적인 사람들은 이러한 심리적인 배타성 때문에 진주를 주어도, 축복을 전하여도, 그것을 수용할 정신적 여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축복을 수용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비판적 사람으로 살지 맙시다. 우리만이 아니라 우리의 자녀들에게도 비판의 영성을 근절시키십시오. 하나님의 축복을 놓치는 지름길입니다. 성도의 황급률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다른 사람을 향한 비판의 삶을 청산하고 오히려 다른 사람을 대접하고 축복하라고 가르치십니다. 12절 말슴을 보십시오. "너희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12절) 우리는 이 말씀 앞에서 무엇을 돌아보며 무엇을 결단해야 합니까? 나는 얼마나 다른 사람을 축복하며 대접하는 삶을 살았는지 돌아보십시오. 비판을 잘 했습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을 인정하고 격려하며 대접하는 일을 잘 했습니까? 한해를 어떤 삶의 자세로 사셨습니까? 그래서 내가 얻은 것이 무엇입니까? 이제는 다른 사람을 비판하는 사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대접할 줄 아는 사람이 되겠노라고 결심해 보십시오. 왜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거슬러 살기를 좋아 합니까? -두레박에서- ♡주의 사랑으로 오늘도 행복하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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