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기도 전쟁(눅 22:39-46; 히 5:7참고)
지금까지 보았듯이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은 기도 생활에 철저하신 분으로 묘사된다.
그의 온 생애는 기도생활의 연속이다.
예수님은 세례를 받을 때부터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까지
기도없이 어떤 일도 행하지 아니하셨다.
누가는 예수님의 기도생활을 집중적으로 보여줌으로
주님을 본받고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성도는
반드시 주님의 기도를 본받아야함을 강조한다.
예수님의 감람산 기도 전쟁은 그의 기도생활의
절정이라고 볼 수 있는 좋은 예이다. 그의 기도 내용, 자세,
그 간절성이 잘 드러난다. 이 본문에 나타난 기도를
한마디로 말하면 기도 전쟁이다.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좇아 감람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좇아더니 그곳에 이르러 저희에게 이르시되 시험에 들지
않기를 기도하라 하시고 저희를 떠나 돌 덜질 만큼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 가라사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사자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돕더라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 기도 후에 일어나 제자들에게 가서
슬픔을 인하여 잠든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하시니라 (눅 22:39-46)"
위에 기록된 예수님의 기도 전쟁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 확인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예수님께서 감람산에서 기도할 때만
온몸을 땀으로 적시며 간절하게 눈물의 기도를 드렸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예수님의 기도는 전 사역 기간에 결쳐
감람산 기도와 같이 간절하고 애절한 눈물의 기도였음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이 점을 깨달을 때 예수님의 감람산 기도가
그의 수많은 눈물의 기도 중 한 본보기임을 알게 될 것이다.
이 점과 관련하여
"그(예수님)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고 말씀하는 히브리서 5장 7절이
우리에게 바른 이해의 길잡이가 되어 준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의 기도를 심한 통곡과 눈물의 기도라고
말하는데 이 사건은 일회적인 것이 아니다.
히브리서 5장 7절에 언급된 예수님의 기도는 감람산 기도를
가르키는 것이 아니다. 저자는 예수님이 기도한 시기를
"그가 육체에 계실때"라고 말한다.
헬라어 본문은 "그가 육체에 사는 날 동안에" 이라고 표현한다.
이 표현은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지상 사역의 모든 기간을
가르키는 것이다. 따라서 에수님의 심한 통곡과 눈물의 기도는
에수님의 사역 전 기간에 결친 것임을 알 수 있다.
예수님께서 늘 하신 기도의 내용은 자신을 죽음에서 구원해
달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기도를 응답해 주셨다.
여기서 말하는 죽음은 십자가의 죽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이 죽음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이전, 사역 전 기간에 결쳐
유대 종교지도자로부터 받는 계속적인 위협과 연관이 있다.
복음서에 보면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그의 사역 추기부터 십자가 사건에 이르기까지 온갖 모의를 다 했다.
따라서 본문에서 예수님이 구추로디기 원했던 죽음은 하나님께서
구원의 유일한 방법으로 정하신 십자가 죽음 외에 다른 죽음을
말한다. 나사렛 사람들이 예수님을 산 낭떠러지에 데리고 가
떨어뜨려 죽이려고 한 일이 있었다(눅4:28,29).
유대인들과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이전에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예수님을 잡아죽이려고 음모한 사실이 복음서
여러 곳에 기록되어 있다
(마 12:14,15;눅 13:31;요5:18;7:19;8:40;12:10).
그들의 수없이 많은 음모에도 불구하고 예수니께서 거의 3년간
죽음을 장하지 않은 것은 십자가에 달려 죽을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죽음의 위험에서 구원해 달라고
예수님께서 3년간 계속적으로 심한 통곡과 눈물로 기도했다.
이러한 기도를 계속적으로 해오신 예수님이 십자가를
눈앞에 두고 감람산에서 기도 전쟁을 치르신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염두에 두고 예수님의 감람산 기도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자 한다. 우리는 이 기도에서 6가지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①에수님의 감람산 기도는 습관적이고 규칙적인 기도였다.
예수님께서 습관을 좇아 감람산에 가셨다고 기록한다(눅22:39)
사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오셔서 사역하실 때 늘 찾는 장소가
감람산이었다. 낮에는 예루살렘에서 사역하시고 저녁에는 감람산에
올라가셔서 기도하시며 밤에 쉬신 것으로 이해할 수있다.
이러한 강조는 누가복음에 잘 반영되어 있다.
누가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계실 때 늘 감람산을 찾으시는
예수님의 습관을 이렇게 설명한다.
"에수님께서 낮이면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밤이면 나가 감람원이라
하는 산에서 쉬시니 모든 백성이 그 말씀을 들어려고 이른
아침에 성전에 나아가더라(눅 21:37-38)"
밤이면 찾아가시는 감람산은 바로 예수님의 기도 처소였다.
그곳에서 기도하면서 밤을 지내고, 아침이면 성전에서 그에게
찾아오는 백성들을 가르치셨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계속적인 기도생활과 가르침이 연결되어 있음을 본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앞서 있는 것이 기도이다.
기도하신 후에 가르치는 예수님이시다.
②천사가 와서 기도하시는 예수님을 도왔다.
누가복음 22장 43절은 천사가 와서 예수님의 기도를
도왔다고 기록한다. 여기 사용된 '돕더라'는 동사는 '강하게 했다'
혹은 '힘을 주었다' 는 뜻이다. 너무나 간절한 기도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기진 맥진한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천사가 지친 예수님께
힘을 더해주었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기도하실때 천사가 와서
예수님을 도왔다는 기록은 성경에서 유래가 없는 독특한
사건이다.
기도할 때 천사가 와서 기도 응답을 전달해 주는 경우는 성경에
흔히 있는 일이다. 예를 들면, 애굽에서 고통당하는 이스라엘
자손들의 기도를 듣고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어 그들을 애굽에서
건져내셨다(민 20:16). 삼손의 아버지가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셨다(삿13:9). 히스기야 왕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천사를 보내어 하룻밤에 앗수르의 군사 십팔만 오천
명을 몰살시키기도 했다(왕하19:20-35). 선지자 다니엘이
미래에 대한 계시를 받고 이를 깨닫고자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천사 가브리엘을 보냈다(단 9:21-23). 제사장 스가랴가 기도할
때 천사가 나타나 기도 응답으로 아들 세례 요한이 탄생할 것을
알리신 일이 누가복음 1장 13절에 나온다.
고넬료에게 그의 기도 응답을 전해주려고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낸 일이 있다(행 10:3,4). 예루살렘 교화가 감옥에 갇힌 베드로의
구출을 위해 기도할 때 기도의 응답으로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어
그를 감옥에서 구출해 냈다(행12:5~9).
찬사가 성도들의 기도를 금 향로에 담아 하나님께 바치는 경우도
있다(계8:3,4)
그러나 천사가 나타나서 기도를 돕는 경우는 성경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 예수님만 그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기도할 때
천사의 도움을 받은 것이다. 천사의 도움으로 예수님의 기도가
더욱 간절해지고 애절해질 수 있었다. 우리도 기도할 때 천사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지 확실히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우리가 온전한 기도를 할 수 있도록 성령님을 간구와 기도의
영으로 주셨다는 것이다(롬 8:26-27)
우리 속에 기도의 성령이 내주하시는 것은 천사의 도움보다
훨씬크다.왜냐하면 성령의 도우심은 우리로 하여금 바른 기도를
하게할 뿐 아니라, 기도할 수 있는 힘을 제공하시고 더 나아가
성도들을 위해서 하나님의 뜻대로 직접 기도하시기 때문이다.
천사의 도움은 일시적이지만 성령의 도우심은 영구적이다.
그러기에 우리의 기도가 성령이 인도와 감동으로 행해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③ 예수님은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구했다.
그것은 자신의 임박한 십작의 죽음가 관련하여 하나님의 주권
적인 뜻을 구하는 기도였다. 예수님의 기도는 주기도를 몸소
실천한 기도이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구한 것은 주기도의 실천이다(마6:9-10).
누가복음 22장 42절에 언급된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는 것은 예수님의 기도 내용이다.
우리는 이 구절에서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주권적인 뜻을
두 번씩이나 언급하고 있음을 본다. 예수님은 이 잔을 내게서
옮기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거든 옮겨달라고 했다. 여기서
'이 잔'은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의 구원을 위해서 마실 저주와
진노의 잔을 말한다. 저주와 진노의 잔을 바로 십자가 형벌이었다.
예수님은 이미 감람산에서 와서 기도를 하시기 전 바로 그날
저녁에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식사를 같이 했다(눅 22:14~23).
이 식사는 평상시 유대인들이 출애굽 사건을 1년에 한 번씩
기념하는 식사가 아니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으로 말미암아
마지막 출애굽 사건, 곧 구원의 대 역사의 성취를 내다보는
그러한 식사였다.
이때 주님은 제자들에게 포도주 잔을 돌리면서 이것은 죄
용서를 위해 예수님께서 흘리는 새 연약의 축복이라고 말씀했다.
이 잔을 받음으로 제자들은 구원의 복에 참여하게 되고, 예수님은
그들 대신 저주와 진노의 잔을 받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기에 예수님과 제자들이 마신 잔은 똑같은 포도주 잔이지만
예수님에게는 저주의 잔이요, 제자들에게는 축복의 잔이었다.
이 잔을 자신이 마시지 않고 구원받는 길이 있다면 그 길을 허락해
달라는 것이 예수님의 간구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만일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이라는 단서를 붙였다.
우리는 예수님의 기도가 얼마나 하나님의 주권 중심,
계획 중심, 말씀 중심이었는지 배운다. 에수님의 기도는 자기를
향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을 묻고, 그 뜻이 자신의 행동을
통하여 이루어지기 위한 것이었다.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그 뜻대로 살아가는 것이 예수님 기도의 핵심이다.
그렇기 떄문에 에수님은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 원합니다." 라고 했다. 이러한 기도신학은 예수님이
가르친 주기도에 담겨 있다. 주님은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을 성취하는 기도를 하기를 원한다.
이것이 바른 기도요, 하나님이 듣기를 기뻐하시는 기도이다.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이루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기도로 몸부림치신 것이다.
우리는 어떤가? 내 개인의 욕심과 욕망을 이루기 위해서는
눈물을 아끼지 않고 기도하면서도 주님의 뜻을 찾고 그 뜻을
이루는 기도를 할 때는 얼마나 맥없이, 간절함 없이 형식적으로
기도하는가? 하나님이 원하시니까, 하나님이 이루실 것이니
내가 누태여 땀까지 흘려가며 기도할 필요가 있는가 하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자세는 진정한 기도의
자세가 아니다. 주님은 이러한 기도를 가르치지 아니하셨다.
예수님이 가르치고 실천한 기도 속에는 항상 하나님의
주권적인 계획과 간절한 기도가 깃들어 있다. 마치 이 둘은 바늘과
실의 관계나 혹은 한 동전의 양면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기도가 하나님의 주권적인 계획을 성취하는 방법임을
확인한다. 이런 기도를 깊이 하면 할수록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에 더 사로잡히게 되고.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와 연장이 된다. 반면 기도를 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과 계획에
사로잡히지 않고. 자기의 넘처나는 욕망에 사로잡혀 세상 것들을
더 많이 가지고자 한다면 이는 나를 향한 하나님의
놀라온 뜻과 계획을 도외시한 잘못된 기도이다.
-예수님의 기도로 돌아가자에서-
♡주의 사랑으로 오늘도 행복하십시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