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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마지막 기도(눅23:34)

에바다. 2010. 5. 7. 19:57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눅23:34) 누가복음에서 공 사역을 기도로 시작한 예수님은 마지막 지상 사역을 십자가 위에서 기도로 마감한다. 요한의 세례를 받을 때 기도를 하심으로 공 사역에 들어가신 에수님은 마침내 공적 사역의 절정으로 십자가에 달려 구원을 성취하는 순간에 자기를 조롱하는 죄인들을 위해 용서의 기도를 하셨다. 십자가 위에서 기도하는 예수님의 모습은 누가복음에만 등장하는 감동적인 장면이다.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저희가 그의 옷을 나뉘 제비 뽑을새(눅23:34)" 기도생활에서 죄 용서가 얼마나 중요한지 이미 지적하신 예수님은 친히 십자가 위에서 자신이 가르치신 대로 용서의 기도를 하셨다(마6:12-1:막11:24;눅11:4). 예수님께서 얼마나 비싼 대가를 지불하며 용서를 위한 기도를 하고 있는지 말하지 않아도 누구나 알 것이다. 누가는 십자가 위에서 "저희들이 하는 것을 저희가 모르니 저들을 용서해 주옵소서" 하신 예수님의 기도를 기록하지는않았지만 이 기도의 결과로 어떤 역사가 일어났는지 기록하였다. 그것은 바로 한 강도의 구원이다. 예수님의 곁에서 십자가에 달린 한 강도의 구원을 기록한 복음서는 누가복음밖에 없다. 관련된 복음서의 내용을 보자. "하나는 그 사람(예수님을 비방한 한 강도)를 꾸짖어 가로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때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날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눅 23:40-43)"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 (마27:44)"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강도)들도 예수를 욕하더라 (막15:32하)" 위 내용을 정리해 보자. 마태와 마가의 기록에는 예수님의 십자가 양편에 달린 죄수들이 하나같이 예수님을 조롱하고 희록한 것으로 등장한다. 또한 이 두 죄수 중에 한 사람이 구원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지 않다. 반면 누가는 강도 중 한 사람만 예수님을 조롱한 것으로 기록한고 있다. 다른 강도는 예수님을 조롱한 강도를 책망하는 것으로 기록한다. 어떻게 같은 사건에 대한 기록이 서로 다른가? 누가의 기록은 마태와 마가의 기록을 부정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 비록 복음서는 예수님께서 용서를 위한 기도 후에 지도자들과 무리들이 예수님을 조롱하는 대목을 기록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이것들이 일어난 순서로 기록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용서 기도 이전에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조롱하지 않았다고도 할 수 없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마태와 마가의 지적대로 두 강도 모두 예수님을 조롱하고 희롱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예수님이 조롱하는 무리들을 향해 용서의 기도를 한 후에 그 전에 예수님을 조롱하던 한 강도가 그 기도에 감동을 받아 마음이 변한 것으로 보는 것이 옳다. 예수님의 용서 기도에 감동을 받은 한 죄인은 조롱을 그쳤고, 계속해서 예수님을 여전히 조롱하는 한 강도를 꾸짖었던 것이다. 그는 더 나아가 예수님께서 자신을 구원해 달라고 외친다. 위에서 지적했듯이 예수님의 용서 기도를 기록한 누가만이 한 강도가 구원받은 사건을 기록한다.예수님의 용서 기도와 한 강도의 구원이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일까? 그렇디 않다. 단락을 구분할 때, 누가복음 23:34-43절은 한 단락을 이룬다. 이 단락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서 갑자기 해가 어두어지기 전까지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께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다루고 있다. 사람들의 반응은 예수님의 죄 용서 기도 후에 등장한다. 백성들, 종교지도자,군인, 그리고 한 강도가 한 그룹을 형성한다. 이들은 하나같이 예수님을 조롱하며 십자가에서 내려와 자신을 구원하라고 외쳤다(눅 23:35-39). 이들과 정 반대되는 사람이 십자가에 달린 다른 강도이다. 그는 예수님을 조롱한 강도를 책망하고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옳지 않은 것을 하나도 행하지 않은 의인으라고 주장했다(눅 23:41). 이 강도가 바로 예수님께 천국에서 자기를 기억해 달라고 요청을 했고, 예수님은 그에게 즉시 그와 낙원에 들어 갈 것이라고 약속했다. 이 단락은 예수님의 용서 기도와 예수님의 낙원 약속으로 끝을 맺는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이 단락을 구성함으로써 누가는 한 강도의 구원을 예수님의 용서 기도의 결과로 제시하고자 했다. 우리는 예수님이 죄 용서를 위해 기도하신 다음에 십자가에 달린한 강도가 주님께 돌아온 사실을 우연으로 돌려서는 안 된다. 누가는 이 사건을 유일하게 기록하면서, 그가 앞으로 사도행전에서 소개할 스데만의 기도와 사울의 회개를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세 마디 말씀을 하셨다. 그 중에 두 마디 말씀은 "저희를 용서해 주옵소서"와 "나의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 23:34,46)이다. 똑같은 말을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으면서 했다. 그는 예수님과 같이 그의 영혼을 예수님께 부탁했을 뿐만 아 니라, 그를 죽이는 자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했다(행7:59-60).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 적극 가담한 자들 중에는 사울이 있었다(행8:1). 마침내 시도행전 9장에서 사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한 예수님을 만나 개종한다. 바울의 개종은 결정적으로 그리스도의 계시에 영향을 받았지만 스데반이 드린 기도의 영향이 전혀 없었다고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저들을 용서하옵소서" 할 때 구원을 받은 사람은 십자가상의 한 강도였듯이, 예수님을 본받아 스데반이 그를 죽이는 자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말라고 했을 때에 역시 구원을 받게 된 사람은 바울이 된 사울이다. 이 두 사건에는 아무런 연관성도 없는가? 우리는 예수님의 용서 기도와 그 결과로 한 강도가 구원얻는 것을 보며 무엇을 배우는가? 왜 누가가 이 사건에 비추어 스데반의 용서 기도와 사울의 개종을 기록했는가? 예수님의 용서 기도는 예수님에게서 끝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이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용서의 기도를 해야 함을 가르치기 위함 아닐까? 예수님의 죄 용서를 위해서 지불한 대가는 십자가 처형이요, 스데반이 지불한 것은 순교였다. 이 엄청난 희생의 값을 지불하면서 주님은 용서의기도를 했다. 이 용서의 기도가 죄인의 마음을 움직여 주님께 돌아오게 했다. 용서의 기도를 할 수 있는 사람은이미 주님의 용서를 받은 사람이요, 또한 기꺼이 다른 이도 용소할 수 있는 사람일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사소한 잘못이나 실수도 용서하지 못하는 불용(不容)과 불목(不睦)의 시대에 살고 있다.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용서하지 못하겠다는 사람들이 많아진다. 한번 사이가 틀어지면 말도 하지 않고 서로 피하는 모습을 많이 본다. 청소년들이 가출하는 것도 많은 경우에 자기를 용서하고 수용할 수 있는 선생과 부모가 없어서다. 자기가 남에게 준 상처와 아픔은 기옥하지도 않고, 남들이 자기에 준 상처와 아픔을 보물 단지처럼 마음속에 두고 원망과 불평의 넋두리 를 하고 있는 사람들을 본다. 주차문제 시비로, 진로 방해로, 혹은 일조권의 문제로 이웃을 죽인 일들이 언론에 보도되기도 했다. 이와는 정 반대의 일도 본다.자신의 음주벽으로 온갖 고생을 하다가 죽은 아내에게 죄책을 느낀 나머지, 용서를 구하는 마음으로 아내의 무덤을 개조하여 그 속에 방을 만들고 그 속에 살고 있는 사람도 있다. 죽은 부모에게 저지른 불효를 뉘우치며 부모의 무덤 가까이 천막을 치고 사는 사람도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우리에게 주시는 용서를 진정으로 경험하지 못하고, 용서하지 않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시대에 용서가 사람을 녹이고, 용서의 기도가 사람을 바른 사람으로 바꾼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용서의 기도와 용서의 삶을 힘써 살아가야 한다. 우리가 종종 기도에 실패하는 이유는 죄 용서를 위한 기도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응답받는 기도의 중요한 요소가 죄 용서가 죄 용서를 구하는 기도이다. 주님께서 주기도에서 죄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기도의 본질적인 요소로 소개하셨다.(마6:12;눅11:4).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우리들 자신의 죄 용서를 구하는 기도는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들을 용서하는 행위와 필연적으로 연결 되었다는 점이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한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내가 내 형제의 잘못을 용서하지 않으면서 하나님께 나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할 수 없고. 용서해 달라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용서하리라 기대할 수 없다.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용서하지 않고는 내가 주님 앞에 죄 용서함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죄 용서가 없는 가운데 드리는 기도는 진정한 기도가 될 수 없다. 죄 용서가 없는 기도에는 기쁨이 전혀 없다. 사람들과 원수가 되고 이 원한의 관계를 풀지 않은 상태에서 바른 기도를 드릴 수 없다. 주님은 마가복음 11장 25절에서 "서서 기도할 때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의 아버지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고 분명하게 밝히셨다. 또한 주님께서는 일만 달란트 탕감 받고 자신은 일백 데나리온 빛진 동료를 탕감해 주지 않은 종에 관한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마태복음 18장 35절에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오늘날 교회에서 소위 기도한다는 사람들이 용서하고 용납하지 아니하는 것을 자주 본다. 서로 원한을 품어서 말고 않고 얼굴도 마주치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사람들과 원한의 관계를 풀지 않으면 그 기도는 잘못된 기도라는 것이다. 우리가 원한 관계를 풀지 않는 한 하나님이 그러한 기도에는 응답하지 않는다. 죄 용서를 계속적으로 받지 않는 사람의 기도를 어떻게 주님이 응답하실 수 있는가? 나의 허물과 죄를 용서받고 상대방의 죄를 용서하는 관용의 삶은 바른 기도의 선결 조건이다. 이것 없이는 깊은 기도로 들어갈 수 없다. 형제나 다른 사람들에게 잘못한 것을 사과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이보다 한단계 더 나아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만저 용서하고 용납하는 열린 마음을 품어야 한다. 이것이 우리 주님의 십자가 사랑의 원리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대신하여 죽으시기 전까지 우리와 하나님은 원수의 관계였다.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가 된 것은 그 책임이 전적으로 우리에게 있다. 게다가 우리는 자발적으로 하나님께 나아와 원한 관계를 풀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잘못이 없으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죄를 용서하셨기 때문에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화친 관계가 성립되었다. 우리가 죄 용서를 구하기 전 그의 원수요 불경건한 자일 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죄 용서의 길을 제공하셨기 때문에 이 죄 용서에 근거하여 하나님께 나아와 비로소 죄 용서를 개인적으로 경험하게 되었다. 우리는 바른 기도를 위해서 사람들과 화목한 관계를 유지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고. 원한 관계를 맺고, 사람들의 눈에서 눈물이 나게 하면서 바른 기도생활을 하겠다는 것은 아주 잘못된 생각이다. 물질적인 손해를 끼쳤으면 그 당사자에게 그 손해를 보상하고 하나님께 용서를 받고 나야 기도가 바로 될 수 있다. 바른 기도는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가지고 사람들과 용서와 화목의 삶을 살아갈 때 가능함을 깊이 새겨야 하겠다. 만일 기도가 잘 안되면 사람들과의 관계. 형제들과의 관계를 깊이 전검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진정한 기도를 통하여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더 유익을 주는 사람으로 변하게 된다. 이러한 용서의 삶과 용서의 기도가 우리 주변 사람들을 하나님 앞에 돌아오게 하는 결과를 낳는다. -예수님의 기도로 돌아가자에서- ♡주의 사랑으로 오늘도 행복하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