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의 은혜/교회법·특별기고

결혼식과 장례식

에바다. 2011. 2. 15. 10:54

                  결혼식과 장례식 
 

   김태복 (홍익교회 원로목사) 
 
   목회하면서 늘 ‘이상하다’고 생각하게 한 중의 하나가 결혼식과 장례식 주례자에 대한 사례금에 대한 것이다. 결혼식 주례를 해주면 가난한 가정이나 부유한 가정이나 관계하지 않고 대부분 사례금이 담긴 봉투를 들고 인사를 온다. 어느 가정에서는 만류함에도 양복 값을 놓고 가서 과분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게 한다. 심지어 신혼여행지에서 가지고 온 특산품을 선물로 받는 경우가 많다. 결혼식의 주례자가 한 수고는 별로 크지 않다. 결혼 전에 잠시 만나 인사를 나눈 것과 순서지 초안을 해준 것과 결혼식 30분 동안 주례한 것뿐이다.


   그런데 비해서 장례식의 집례는 결혼식의 주례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수고가 크다. 임종 앞두거나 임종 후에 심방하고 드린 예배, 발인예배, 하관예배 등 담임목사가 정상적으로 집례 해야 할 예배만도 적어도 3-4번은 된다. 그래도 요즈음 장례식은 예전에 비하면 속된 말로 ‘거저먹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년 전만 해도 교인이 돌아가면 염습(焰襲)은 교회가 맡아서 할 때 많았다. 지금은 누가 임종이 가까우면 병원으로 모셔가지만, 예전에는 병원에 입원했던 분들도 임종이 가까우면 가정으로 모셔왔다. 병원에서 돌아가면 ‘객사(客死)’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가 임종했다고 연락이 오면 담임목사는 상조위원과 함께 방문하고 수족을 깨끗이 닦은 후에 칠성판에 누이고 몸을 가지런하게 묶은 후 흰천으로 덮고 평풍으로 가리고 예배를 드렸다. 그리고 돌아간 후 하루가 지난 다음 수의를 입히고 입관(入棺)을 한 후 입관예배를 드렸다. 지금은 시신을 병원 영안실에서 냉동으로 보관했다가 염습함으로 시신이 전혀 상한 모습이 아니지만, 집에서는 시신이 하루만 지내도 상하고 냄새가 진동했다. 특별히 여름날 병원에 입원했다가 모셔온 시신에서 흐른 물이 방바닥에 흐를 정도이니 그 악취가 감히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시신을 알코올로 닦고 수의를 입힌다는 것은 너무나 고역이 아닐 수가 없었다. 가까운 식구들조차도 그 방으로 들어오기를 꺼려할 정도이다. 30-40분 동안 두 세 사람이 염습을 마치고 나면 온 몸이 땀으로 범벅이 되기 일 수이다. 다행이 홍익교회에서는 염습하는 일을 도맡아서 수고한 장로님(남자 교인인 경우)과 권사님(여자 교인이 경우)이 계셔서 나는 옆에서 거들어 들이는 것으로 끝날 수 있었다. 20년 이상 그런 일에 너무나 수고한 분들이라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의 목회자들은 거의 시신을 목격하지 않은 채 장례식을 마칠 수 있다는 것은 여간 다행이 아닐 수 없다.


   장례식에 따르는 또 하나의 고역은 화장터나 선산에서의 하관예배이다. 벽제 화장터 같은 경우에는 여러 시간을 기다리다가 순서가 되면 잠간동안 예배를 드리어야 한다. 과거에는 홀이 따로 있어서 나름대로 의미 있는 예배를 드렸지만, 지금은 불가마를 바라보는 2평 남짓한 조그만 장소에서 예배를 드림으로 거의 형식적으로 끝내기 일 수이다. 더욱이나 유족 중에 유별하게 크게 통곡하는 분이 있거나 옆 불가마 앞에서 목탁을 두드리는 불교가정을 만나면 한껏 목청을 높이어 외쳐도 들리지 않을 정도니 공허한 외침으로 끝날 때가 많다.


   멀리 선산(先山)으로 장지(葬地)를 정한 경우에는 새벽예배를 마치고 상조위원들과 떠나야 했다. 멀리 경상도나 전라도 지역인 경우는 5-6시간이 걸리는 경우가 적지 않다. 어느 가정은 선산이 깊은 곳에 위치해 있어서 차가 갈 수 없는 곳에는 관을 운구하기 위해 갖은 고생을 다해야 한다. 어느 가정은 너무나 비싼 관을 쓴 관계로 운구하는 분들이 몇 번씩 바꾸어 들어야 하기도 한다. 살을 찌르는 듯한 칼바람이 부는 겨울, 뙤약볕이 쏟아지는 여름에는 그 수고가 배가 되기도 한다.


   그런데다가 기독교식으로 장례식을 진행하는 것에 불만을 품은 유족이나 동네 친척들의 노골적인 반발은 갖은 고생을 다해 찾아간 교인들의 마음을 더욱 지치게 만든다. 나는 초년 목회 시에는 이런 반대를 만나거나 관이 마을에 도착하면 노제(路祭)를 지내려 하거나 하관시에 자기들 식으로 진행하려고 하면 공연히 목소리를 높이면서 말다툼을 벌이고는 했다. 그러나 어느 날부터 ‘그들도 돌아간 분에 대해서 자기들 식으로 예를 갖추어 조문(弔文)하고 싶어하는 것이 아니겠는가?’라는 깨달음이 왔다.


   그래서 선산에서 하관예배를 드리기 전에 그 동네 어른 분에게 말씀 드리기를 “이 분이 믿다가 돌아가신 분이기에 기독교식으로 장례를 지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기독교식으로 예배를 드린 후에 우리는 하산하겠습니다. 그 다음에는 여러분들의 방법으로 진행하십시오.”라고 하면 그 분들이 흔쾌히 협조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예배를 드리면서 기도하는 시간에는 좀 떨어진 곳에 앉아서 예배를 구경하고 있는 동네 사람들이 들을 정도로 큰 소리를 그 마을과 주민들을 위해 잊지 않고 복을 비는 기도를 했었다.


   나중에 유족들이 전하는 말에 의하면 동네 사람들 중의 적지 않은 분들이 기독교식으로 장례하는 것을 보니 너무나 깨끗하고 돌아가신 분에 대한 예의가 깊이 느낄 정도여서 좋았다고 했다. 그렇게 하관예배를 마치고 마을 회관이나 들판에서 뜨끈한 육개장에 밥을 말아먹고 상경하면 완전히 녹초가 되기 일 수이다. 그렇게 갖은 수고를 다했음에도 나중에 집례자에 대해서 사례하는 가정은 많지 않은 것을 발견하면서 ‘30분 정도 수고한 것에 불과한 결혼식에 대해서는 분에 넘치는 사례를 하면서 3일 동안 갖은 수고를 다한 것에 대해서는 왜 사례하는 가정이 많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지금도 지울 수 없다. (2009.11.13.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