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모님 전상서
윤대영 목사(처음교회)
사랑에 눈이 멀어 목회자와의 동반의 길이 어떠한지 생각해보지도 않고, 길 없는 길로 동행을 하게 되신 분, 나도 한 번 주님의 종의 아내로서 십자가를 지고 싶어 목회자의 동반자가 된 분이 계실 것이며, 혹 성공한 목회자의 사모가 존경받고, 사랑받는 것을 보고 나도 사모가 되겠다고 짚신 열 켤레 달구어 가며 목회자만 따라다니면서 목회자와 동반자가 되신 분도 계시겠지만, 어찌되었든 사모님 되신 분과 앞으로 사모님이 되실 분들에게 존경과 위로를 드리는 바이다.
어느 날 목회자와 사모가 마주 앉았다. “도대체 당신은 알 수가 없다”면서 설교를 어쩜 그렇게 잘하시는지, 당신의 설교를 들으면 은혜 받지 않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고 말을 한다. 그리고 이어서 그런데, 왜 살아가는 실제 삶은 설교와 정반대인지 신기하기도 하고,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말씀만은 하지 않으시면 안될까? 설교란 목회자가 행위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면 사모님이 긍정하실까? 목회자의 양심을 두 손에 빼어 들고 이야기 하지만, 목회자는 설교할 수가 없다. 다만 성서가 목회자로 하여금 설교하게 한다는 것을 믿어 주었으면 좋겠다.
설교자가 설교를 하면서 설교 할 때도 ‘나도 지켜야지’라고 골백번 맹세를 하고, 설교를 한다. 그러나 설교를 하는 이나 설교를 듣는 성도들이나 말씀 앞에서는 동일하게 계시의 수신자라는 사실만은 이해해 주었으면 한다. 설교자가 자기 말을 한다면 당연히 지킬 수가 있다. 또한 내가 지킬만한 말만하고 말 것이다. 그러나 성령이 말씀을 전하게 하고, 하나님은 나를 종이라고 세우시고, 성서대로 이렇게 말하라고 구체적으로 글로 적어 설교자 앞에 펼쳐 놓았는데, 어찌 설교자가 성서대로 설교하지 않으랴!
불교는 자기의 깨달음으로 말할 수가 있다. 두꺼운 방석을 몇 겹이나 깔고 그 위에 올라앉아 거드름을 피워가며 멋진 가사를 입고 죽장을 짚고 마음껏 이야기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그가 지켜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철학을 하는 사람 역시 자기의 사상이나 자기의 인생관과 세계관을 마음껏 이야기하고 그 길로 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목회자는 마치 무당과 같다. 무당이 신이 내려서 점을 치거나 굿을 하고 자기가 한말이 무엇인지, 자기가 무슨 짓을 했는지, 어떻게 작두위에 올라서서 맷돌을 이고 춤을 추었는지 비결도, 방법도, 이론도 없다. 다만 그 사건 안에 있었던 것뿐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목사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사건에 참여 되었을 뿐 그 이상 하나님의 말씀에 자기의 능력으로 이루어진 것은 전혀 없다는 것이다. 만약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사건에 자기의 능력이나 생각이나 자기의 철학이나 주관대로 한 바가 있다면 이는 설교자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설교자가 설교를 한 다음 문제가 되는 부분은 자기가 자기 말로 한 부분이 항상 문제가 될 뿐이다. 계시대로 전한 것은 하등의 문제가 될 수가 없다. 그런데 사모님이 당신은 설교는 그렇게 하고 살아가는 것은 이렇게 살아가느냐고 손가락질을 하면서 분노하여 한마디 하면 설교자는 그 자리에서 얼어 붙고 만다. 그리고 그 다음 감정은 그대는 나를 진실로 사랑하지 않는다고 오해가 생긴다.
항상 고민하고 가슴아파하고 힘든 것이 바로 말씀대로 살지도 못함이라는 커다란 부담이 목회자를 짓누르고 있다는 것을 가장 잘 알면서 비난하기 때문이다. 나름대로 말씀을 전하고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을 한다. 최선을 다한다. 그러나 그 최선의 공과는 그 사람의 성장과정에서 형성된 인성이다. 현재 그의 살아가는 삶의 상황이나 그리고 복잡한 인간관계에서 영향을 많이 받는다. 좋은 환경이나 여건이나 상황이 조성되어 호전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얼마 전 드라마에서 유행한 대사 “최선입니까?”이 최선이라는 최선은 아마 모든 목회자가 다 동일하게 살아가는 모습일 것이다. 그러나 그 결과는 가지각색으로 나타난다. 이를 놓고 수많은 사람들이 평가하고, 비판하고, 칭찬하고, 존경하고, 다양한 반응이 목회자에게 돌아오는 것이다. 수많은 성도들 사이에서 살다보면 이런 시각, 저런 잣대로 평가하고 비판을 할 때 목회자는 거북이의 등처럼 감추고 있는 방어벽이 있다. 그래서 가끔은 거북이 목을 끌어들여 죽은 듯이 엎드려 있는 자기 보호벽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죽은 듯이 있기도 한다. 그러나 들려오는 이야기 날아오는 날카로운 말의 파편은 그 속에서 다 맞는다. 그리고 숨죽이고 홀로 눈물을 흘리곤 한다.
목회자 그는 언제나 혼자이다. 아무리 사모가 옆에서 사랑하다고 해도 목회를 도와주고, 가끔은 목회자 편에서 어느 장로, 어느 권사, 어느 집사를 꾸짖고 원망하는 대리 공격을 해 줄때도 있고, 실제 목회자의 실수와 잘못을 감추어 주고 숨겨 줄때도 있다. 고맙기도 하고 감사하기도 하다. 그러나 목회자는 사모가 자기의 편이 되어서 실수의 변명 내지는 잘못의 두둔을 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항상 자신을 완전히 알몸으로 내어놓고 자기비판을 서슴지 않는 것이 목회자의 열성이다.
당신은 잘못이 없다고 해도 전혀 위로도 합리화도 정당화도 안 된다는 사실을 아시는지? 그래서 혼자다. 마치 재림 주 앞에 서 있는 죄인의 모습으로 자기를 자기가 보고 아파하고 고통 받고 있다는 사실을 사모는 아시는지? 그래서 집에 와도 말이 없다. 침묵의 시간이 많다. 몸은 그대 사모 앞에 앉아 있으나 정신은 하나님 앞에 있다. 벌벌 떨고 서 있을 때가 많다는 것이다.
사모님, 사모님, 우리 사모님, 목회자편에서 변명만 해대는 것 같지만 사모는 목회자의 사랑의 동반자가 되어 얼마나 외롭고 힘들고 괴롭겠는가? 잘못 택한 한 번의 선택이 일생으로 이어진다고 후회는 하지 않음이 좋을 듯하다. 하나님이 사모님의 노고와 희생을 낱낱이 아시기 때문이다. (2011.3.23. 목회자신문)
'말씀의 은혜 > 교회법·특별기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예수님의 고발 (0) | 2011.05.11 |
---|---|
장로 시벌사건이 빈번한 이유 (0) | 2011.05.11 |
원로 장로를 세우는 공동의회 결정은 과반수인가 3분의 2인가? (0) | 2011.03.23 |
장로회는 해체되어야 한다 (0) | 2011.03.23 |
“책임과 권한 함께 위임돼야 사역 기쁨" (0) | 2011.03.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