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8회 전국 목사장로기도회 둘째날(26일) 저녁 강의는 강남교회 송태근 목사의 "예수님의 고발"이라는 주제의 강의가 있었다.
예수님의 고발
마가복음 12:41-44 예수님의 고발을 통해 본 한국교회 현주소
송태근 목사(강남교회)
들어가는 말
마가복음 12장 41-44절의 말씀은 우리들에게 매우 익숙한 본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 입구에 놓여 있는 연보궤 앞에 앉아계셨습니다. 당시 문헌의 기록에 따르면 예루살렘 성전 입구에는 쇠로 만든 헌금함이 열 세 개가 비치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이 열 세 개는 각기 다른 항목을 위한 헌금함이었습니다. 예를 들어서 성전 수리를 위한 헌금함, 개척교회 설립을 위한 헌금함, 구제를 위한 헌금함 등의 항목에 따라 성전에 들어가면서 각각의 항목에 맞게 헌금하고 성전에 들어갔습니다.
예수님 당시 화폐는 종이는 없었고, 전부 쇠로 만든 동전이었습니다. 동전이라는 것이 전부다 똑같은 화폐단위가 아니라 크기와 굵기에 따라서 그 가치가 다릅니다. 예를 들면 우리나라에는 일원짜리에서부터 제일 큰 오백 원짜리까지 있습니다. 그러면 부자들은 큰 동전들을 한 움큼 집어서 성전 입구에서 쇠로 만든 헌금궤에 집어넣습니다.
그럼 어떤 소리가 나겠습니까? 거의 탱크 굴러가는 소리가 나는 겁니다. “와르르르!” “와 이거 헌금 많이 바치는 구나!” 성전 안에 있던 자들이 모두 공개적으로 부자들이 많이 헌금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게 됩니다. 그 반면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은 일원짜리 두 개를 넣는 겁니다.
무슨 소리가 날까요? 아마 종지 깨지는 소리가 날 겁니다. “땡그랑!” 이렇게 헌금이 떨어지는 소리로서 헌금을 많이 드리느냐? 적게 드리느냐?가 공개적으로 알려지던 구조였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의 설교 제목을 다르게 말한다면, ‘칭찬받은 헌금?’이라며 물을표를 붙여야 합니다. 이 본문은 전통적으로 크게 두 가지를 위해서 기록했다고 알려져 왔습니다. 먼저는 부자들이 자기가 소유한 전 재산을 드리지 않은 것에 대한 경고이며, 또 한 가지는 가난한 과부가 자신의 전 재산을 다 드린 것에 대한 칭찬이라고 가르쳐져 왔습니다.
이 과부에게 붙여진 ‘가난한’은 절대결핍을 뜻합니다. 즉 이 여자는 전 재산인 두 렙돈을 드리고 나면 끼니를 이어갈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과연 예수님께서 “부자들 봐라. 절대 결핍 상태에 있었고 이 헌금을 드린 다음에는 끼니도 해결할 수 없을 정도로 도움을 받아야 하는 가난한 과부이지만 다 드렸지 않느냐? 그러니까 너희들도 드려야 된다.” 에 초점이 있었을까요? 그러나 여러분들이 마가복음 전체를 보면 오늘 이 내용은 과부에 대한 칭찬에 포커스가 있는 것도 아니고 나가서 부자들이 다 드리지 않았다는 경고를 위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본론
Ⅰ. 드러난 정욕을 경고하시다
우리가 오늘 본문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근본적으로 해야 할 질문이 한 가지 있습니다. “과연 예수님께서 이런 절대 결핍의 상태에 있는 과부가 마지막 남은 가산까지 다 바친 것을 당연하다며 칭찬하실 것으로 이해해야할까요?”
어느 교회의 감동적인 이야기를 하나 들었습니다. 교회 성도 중 한 분이 평소 입버릇처럼 “나는 죽으면 내 재산 다 하나님 앞에 바치겠다”고 말하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말이 씨가 됐는지 일찍 돌아가시게 되었습니다. 이 분에게 젊은 아내와 어린 자식들이 남아 있는 거예요. 이 아내가 먹고 살아야 되는데 마음에 걸리는 겁니다.
남편이 평소 입버릇처럼 얘길 했는데 내가 이걸 다 드리고 나면 자식들하고 먹고 살 길이 막막한 겁니다. 남편의 유산은 가게 등기 권리증 칠천만 원이었고, 그 가게도 이천오백만원에 세를 주고 자기 가족들은 월세방을 얻어서 살고 있었습니다. 이 아내가 몇 날 몇 일을 고민하다가 전 재산들 다 정리해서 남편 말 때문에 교회로 가지고 온 겁니다. 교회는 일단 이 여인의 강청으로 헌금을 받았습니다. 그 교회의 재정원칙은 매월 백만 원만 남겨 두고 모두 지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뜻 밖의 헌금이 들어와 장로님들을 모아 당회를 열었습니다. “아무개 미망인이 이렇게 남편 죽은 다음에 이런 사연 때문에 이렇게 가지고 왔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장로님들이 어이가 없어서 가만히 앉아 계시더랍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제안했습니다. “교회가 일단 이 헌금을 받고, 오늘을 넘기지 말고 바로 지출 집행을 합시다.
집행 대상자는 그 여자입니다. 그 여자에게 이것을 구제금 항목으로 그대로 드리십시다. 그래서 자녀들과 살아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줍시다.” 장로님들이 모두 동의하였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마지막 남은 동전 두 닢 드리고 이제 오늘부터 굶어야 할 여자의 헌금 상태를 보시면서 그걸 칭찬의 차원에서 다른 사람들 기죽일 의도로 이 본문을 썼을까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믿습니다. 이것은 거기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상황을 몰고 갈 수밖에 없었던 이 서기관들, 헌금 차별을 통해서 그렇게 만들어 버린 이 서기관들의 드러난 정욕을 경고하신 겁니다.
앞의 40절은 오늘 본문의 기록에 대한 이유를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하시니라.”(막 12:40)
서기관들의 외식적인 행위를 비판하시면서, 그들이 중한 판결을 받게 될 것임을 경고하신 후에 오늘 본문이 실증을 위한 예로 등장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과부가 생활비 전부를 바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실 만큼 몰인정하고 무자비한 분이 아니십니다. 오히려 신명기서에서 과부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셋째 해 곧 십일조를 드리는 해에 네 모든 소산의 십일조 내기를 마친 후에 그것을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에게 주어 네 성읍 안에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신 26:12)
과부는 오히려 레위지파와 더불어 십일조를 통해 혜택을 받아야할 대상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실 오늘 본문이 속한 마가복음의 일관된 흐름이기도 합니다. 마가복음은 종교적 경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인간의 생존적 필요라고 일관되게 견지합니다. 안식일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밀밭 사이로 지나가다가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그들의 규칙상 해서는 안되는 이삭을 따서 허기를 채웁니다.
이 때 예수님의 제자들이 한 일을 바리새인들이 보고는 예수님을 공격합니다. “어찌 안식일에 일하여 배를 채우느냐!” 이에 대하여 예수님이 대답하십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막 2:27) 또 종교적 형식주의에 빠져 있던 유대인들이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면서 부모를 섬기지 않았습니다. 돈을 드리지 않아도 된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드림이 되었으니 됐다는 말이죠. 이것을 예수님께서 맹렬하게 지적하십니다. “차라리 그것을 하나님께 드리지 말고, 부모님께 드려라! 살아 있는 부모를 공경하지 않으면서 그것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되겠느냐?”(막 9:11~13) 그래서 마가복음의 일관된 흐름은 하나님 앞에 제물보다 중요한 것이 이웃사랑이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오늘 이 본문의 가장 중요한 타킷은 서기관들입니다. 서기관들은 작은 예물에 대하여는 무시하며, 종교적 기복주의를 교묘히 이용해 자기의 생활비 전부를 드리지 않으면 안 되게끔 조장하는 종교 지도자들의 작위적 행태에 대한 지적입니다.
Ⅱ. 과부의 가산까지 삼키는 종교지도자에게 상황을 이 지경까지 몰고 간 책임을 물으시다
역사가 요세푸스가 쓴 ‘유대사’와 ‘미드라쉬’를 살피면, 본문의 말씀과 유사한 상황이 등장합니다. 한 가난한 과부가 드릴 것이라고는 밀가루 한 움큼 밖에는 없었습니다. 이걸 들고 와서 드리니까 그 옆에 제사장 하나가 쫓아 나와서 “이걸 지금 하나님 앞에 예물이라고 드렸소?”라며 야단을 하고 호통을 치는 거예요.
작은 예물에 대해서 무시하고 창피를 주는 겁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뛰쳐나오셔서 기가 죽어 있던 과부 앞에서 “이 과부는 한 움큼의 밀가루를 드린 것이 아니라, 자기 생명을 드린 것이다. 네가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냐!”며 제사장을 야단치시죠. 그 제사장은 깜짝 놀라 깨어 보니 꿈이었다는 기록입니다.
물론 요세푸스의 문헌은 성경의 권위에 미치지 못하지만, 이 이야기는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의 관행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무시할 수 없습니다. 과부는 두 렙돈, 밀가루를 드리고 나면 오늘부터 굶어야 하는데, 이런 절대 결핍 상태에서도 드리지 않을 수 없도록 종교지도자들이 몰고 간 것입니다.
이런 과부가 두 닢이 전부인 재산을 절대 결핍 중에 다 드린 겁니다. 이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감격을 해서 “놀랍다! 너희들도 이 믿음을 본 받아라.” 하신 것이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은 절대 결핍 중에 있던 과부의 헌금에 대한 칭찬이나 전부를 다 드리지 않은 부자들에 대한 경고도 아닙니다. 본문의 초점은 상황을 이렇게까지 몰고 간 서기관들의 죄를 드러내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자들”이었습니다.
여러분, 저는 강단에서 이 표현이 지나치다 싶어 절제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우리 목회자들은 오늘 기도하기 위하여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솔직하게 한국교회와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할 역사적인 시점에 와 있습니다.
죄송한 표현이지만, 많은 교회 속에서 거의 협박 수준, 공갈 수준의 헌금 강요가 만연되어 있습니다. 연약한 성도들의 상황과 마음에 대한 목자의 심정을 사라지고, 목회가 개인의 명예를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면서 헌금에 대한 강요는 더 만연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우리 교회 어느 장로님은 “목사님, 헌금 강조 좀 하십시오.” 부탁하기도 하십니다. 제가 그 심정을 이해를 해요. 그리고 어떤 성도님들은 오해를 하시더라고요. “우리교회 목사님은 절대 강대상에서 헌금 강조도 안하고 헌금 설교도 안 한다.” 이거 잘하는 거 아닙니다.
헌금은 말 안 하는 게 잘 하는 게 아니라, 바로 가르치는 게 잘 하는 겁니다. 너무 이것에 대한 부작용들이 많으니까 제가 의도를 가지고 삼가는 것이지, 그것을 말하지 않는 것이 좋은 것이 아닙니다. 헌금은 바르게 가르쳐져서 바르게 드려져야 합니다.
그러나 저는 모든 것을 떠나서 여러분에게 매우 근본적으로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 교회의 성도님들이 헌금을 안 하게 된다면, 여러분의 교회가 될까요, 안될까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어떤 의미에서 한국교회가 올바른 방향으로 전진할 수 있는 나침반이 된다는 의미에서 매우 중차대합니다.
분명히 됩니다! 돈 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것이 전부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사람이 헌금을 드리고 드리지 않고, 혹은 사람이 똑똑하거나 그렇지 못하거나, 혹은 사람이 능력이 많거나 그렇지 못하거나, 이런 인간의 실력과 조건에 흔들리지 않는다는 믿음이 우리 지도자들에게 필요합니다.
오늘 여기 과부의 두 렙돈의 헌금도 이런 의미에서 당시 종교지도자들을 향한 경고의 메시지입니다.
나가는 말 : 경고와 위로
결론적으로, 오늘 본문을 통하여 이 기도회에 교회의 지도자들로서 모인 우리에게 주는 경고와 위로의 말씀이 있습니다.
먼저는 목회에 있어서의 개인적인 탐욕을 경계해야 합니다. 이 탐욕이 가장 잘 드러나는 소재가 우리가 살펴본 대로 서기관들이 저질렀던 “돈”의 유용입니다. 개인의 욕심을 하나님의 뜻인 것으로 탈바꿈시킨 작위적인 목회는 성도 개인의 영혼을 죽이고 있을 뿐 아니라, 불행하게도 한국교회 전체의 만성병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인간의 연약한 종교성을 교묘히 이용해 개인의 배를 불리며, 종교라는 껍데기를 거기에 덮어 씌우며 행해지는 목회 안에서의 목회자들의 자기합리화는 이제 거의 중독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지금 우리는 눈 앞에 이런 병리적 현상이 한국교회 속에서 하나 둘씩 드러나고 있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오히려 이렇게 불거진 문제를 영적 도약의 기회로 삼을 수 있습니다. 지도자들인 우리에게 근본적인 질문이 있어야 합니다. “목회는 누가 하는가?” “씨와 열매를 누가 주시는가?” 이에 대하여 고린도후서는 매우 웅장하게 선언합니다. “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는 이가 너희 심을 것을 주사 풍성하게 하시고 너희 의의 열매를 더하게 하시리니”(고후 9:10)
교회의 지도자들로 세워진 우리가 받을 수 있는 위로가 무엇입니까? 모든 것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이 하십니다. 목회는 하나님의 목회입니다. 성도는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가 부족하고 연약해도 하나님이 하십니다. 만약 교회가 돈으로 운영된다면, 기업과 다를 바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이 기도회에 모인 교회의 지도자 여러분, 이 위로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인간적으로 보기에는 힘없이 죽어간 성자의 죽음이 위대한 구속사역이었다는 사실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런 하나님의 일하심에 동역자로 서 가지는 은혜와 기쁨이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2011.4.27. 리폼드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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