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의 은혜/신앙,시사,목양 칼럼

삼위일체 신개념에 대한 왜곡은 인간사회를 황폐시켜

에바다. 2011. 12. 2. 20:49

삼위일체 신개념에 대한 왜곡은 인간사회를 황폐시켜
삼위일체론이 비(非)성경적이거나 비(非)합리적이라 하여 공격을 당하는 일이 종종 있어 왔다 
 

   강희창 목사 
 

    I. 서론
 

    A. 계시와 통일성으로서 삼위일체론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가르침은, 신,구약 성경에 계시된 야훼 하나님의 구속사에 근거하여 성부 성자 성령의 자기 계시의 의미를 서술하는 과정에서 구체화된 것으로, 기독교의 하나님에 대한 주된 특징적 개념이면서도 적절하게 묘사하기가 어려운 개념이기도 하다. 그러면서도 기독교의 다른 모든 가르침들에 대한 근원적 역할을 해온 것이 바로 삼위일체론이다. 교회의 공식적 신앙고백으로서 삼위일체론을 확립하게 된 과정은, 아리우스주의와의 어려운 싸움과 관계된 것으로서, 초기 두 번의 공의회들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그러한 과정을 통하여 확립된 삼위일체론에 근거해서 이후의 동, 서방교회는 나름대로 신학적 방향을 추구하게 된다. 니케아 콘스탄티노플의 삼위일체론이 이후의 다양성을 위한 통일성이 된 셈이다.


   기독교 역사를 통하여 삼위일체론이 비(非)성경적이거나 비(非)합리적이라 하여 공격을 당하는 일이 종종 있어 왔다. 특히 19세기 서구 개신교의 자유주의 신학은 삼위일체론을 중요시하지 않았다. 서구 기독교 사회의 시대정신인 모더니즘의 절정에서, 삼위일체론은 신앙과 신학의 근원적 위치로부터 밀려 나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일, 이차 세계 대전의 파국을 거치면서 서구 모더니즘에 대한 반성과 회의(懷疑)를 통하여 포스트모던 시대를 열어 가는 과정에서 삼위일체론에 대한 인식과 논의가 새로워지게 된다. 논의 방향도 전통적인 쟁점보다는, 삼위일체론의 근원적 의도와 의미에 집중하는 방향에서 이루어져 온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B. 포스트모던 신학의 근원과 토대로서 WCC의 삼위일체론


   하나님에 대한 개념은, 인간의 역사를 통하여 가장 많이 왜곡되고 손상된 개념인데도 불구하고, 인간과 세계에 대한 모든 궁극적 질문들에 대한 대답은 바로 그 신 개념으로부터 제시되어 왔다. 그러니까 신 개념에 대한 왜곡은 어떠한 철학적 개념들보다 더 근원으로부터 강력하게 인간사회를 황폐화할 수 있다. 따라서 신론에 대한 논의는 현대사회의 왜곡된 세계상에 대한 해결의 의지를 지니는 것이 타당하며, 올바른 삼위일체론을 지향하는 신학은 그 방향을 의식할 수밖에 없다. 서구 계몽주의나 자유주의 시대의 신론은, 서구의 시대정신인 모더니즘의 거대담론적 요소를 내장(內裝)한 혐의를 받아왔다. 시대정신이 신론으로 역(逆)침투되었다는 것이다. 그 시대의 정신적 근원(foundation)에는 근대성(近代性)이라는 시대정신이 자리 잡고 있었음을 생각하면 그 혐의와 비판은 타당한 것이다.


   삼위일체론을 주변적 위치로 몰아내고, 모더니즘의 거대담론이 근원과 토대를 차지했던 그 모더니즘에 대하여, 포스트모던 신학은 어떤 하나님 개념을 제시해야 하는가? 이 글은 그러한 의도에서 WCC의 삼위일체론에 대하여 논하려는 것이다. 전통적인 쟁점들보다는, 초기 기독교의 삼위일체론과 연속성을 전제하고, 모더니즘을 극복하는 포스트모던 신학으로서의 성격들을 의식하면서, WCC의 삼위일체론을 제시하며 규명하려는 것이다. WCC의 삼위일체론에 나타난 포스트모던 신학으로서의 성격들을 밝혀나가면서, WCC의 삼위일체론이 바로 포스트모던 신학의 근원과 토대가 될 만한 신론이라는 점을 주장하려는 것이다.


   II. 비판 대상으로서 모더니즘의 특징들
 

    A. 비판적 전제로서의 모더니즘


   초월적 전제들을 근원적 위치에서 물러서게 하고, ‘인간 이성에 근거한 가치중립적 조직체계’를 근원적 보좌에 위치시킴으로써, 모더니즘 시대의 신학은 인식론적 이성이 주도하는 “인간을 주체와 목적으로 하는 인간학적 서술”이 되어갔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삼위일체 하나님의 계시에 근거한 하나님 개념’으로부터 ‘인간의 주체적 이성에 근거한 인식론적 주장들을 내세우는 방향’으로의 전환이, 근대 이전(pre-modern)으로부터 서구적 근대(modern)로의 이행 과정에서 이루어진 일이다.


   19세기 서구 정신세계의 특징은 거대담론으로서의 보편성이 어두운 지배구조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맥락에서 과격한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모더니즘의 어두운 지배구조를 고발하면서 거대담론의 해체를 주장할 때, 그들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종말론적 구속사마저도 거부하려고 했다. 따라서 ‘모더니즘의 어두운 지배구조에 대한 거부’를 인정하면서도, 성서 본연의 하나님 개념을 회복하면서 포스트모던 시대 기독교 신학의 사명과 방향을 제시해가는 것이 포스트모던 신학의 방향성이 될 것이다.


   근대 시기의 가치관이나 시대정신은 더 이상 당연시될 수 없다는 맥락에서 포스트모던 신학에 대한 논의가 시작된다는 점을 생각할 때, 포스트모던 신학에 대한 논의는 비판적 전제로서 모더니즘에 대한 논의를 먼저 제시해야 할 것이다.
  

    B. 모더니즘의 특징적인 양상에 대하여


   커닝햄(Cunningham)은 모더니즘에 대한 비판에서, 합리성(rationality)과 차이(difference), 그리고 '수사'(rhetoric)라는 논점들을 부각시킨다. 필자는 커닝햄의 논지를 따라 그 세 가지 요소를 모더니즘에 대한 비판적 전제로서 받아들이려 한다.
 

    1) 합리성(rationality)


   인간 이성의 인식 범주를 넘어서는 하나이면서 셋으로 존재하는 역설적인 하나님은 모더니즘의 시대정신과는 맞지 않는다. 모더니즘의 시대정신이 삼위일체를 거론할 때, 세 위격에 대해서는 합리적 분류를 통하여 개별성과 자율성을 지향하게 했다. 노동 분업이나 분할정복(divide and rule)이라는 근대적 서구의 시대정신에 따라, 삼위일체 개념이 왜곡되거나 손상되어갈 수밖에 없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세 위격은 보다 더 근본적으로는 관계들이라”는 근대 이전의(pre-modern) 명제가 세 위격의 은밀한 관계구조(complex relationality)를 중시한 것이라면, 모더니즘의 관계는 합리적 이성의 파악과 지배가 가능한 수직적 권위주의 구조에 가깝게 나타난다. 그러한 모더니즘의 정신적 구조 안에서, 동등함이나 상호관계보다는 권위와 지배라는 관점에서 서구일방주의는 당연시되어온 것이다.
 

    2)차이(difference)


   모더니즘에 대한 비판으로서 차이를 거론할 때, 그것은 과학기술적 세계관에 근거한 서구 근대성의 틀에서 제시된 ‘모더니즘의 보편성’은 진정한 보편성이 아니라 서구 나름의(parochial) 입장을 내세운 것이라는 주장을 전제하는 것이다. 서구 식민주의 시대가 사양길을 걷게 되고, 서구문화가 타문화에 대하여 반드시 우월한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그리고 성(性), 인종(人種), 계급(階級), 교의(敎義) 등과 관련된 전통적 장벽들이 무너져 내리면서, 서구 중심의 획일적 보편성에 모든 것을 편입시키는 것은 진정한 보편성이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지게 되었다.


   근대 이전의 시대에 그랬던 것처럼, 어떤 형태의 차이가 삼위일체 신학 안에 내장되어 있다는 것이 알려졌다. 삼위일체의 세 위격은 단순히 하나님의 양태들(modalities)이 아니라, 한 위격이 다른 위격을 파송한다고 말할 만큼, 두 위격이 서로 대화를 나눈다고 말할 만큼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모더니즘의 획일적 보편성에 묻혔던 그 차이가 포스트모던 신학의 출발 지점에서 부각되기 시작했다.
 

    3)수사(rhetoric)


   19세기에 헨리 뉴먼(John H. Newman; 1801-1890)은 모더니즘의 시대정신을 따르는 논리적 신학자들이 “굽이쳐 힘차게 흐르는 아름다운 생명의 강”을 “인공운하”로 만들고 말았다고 비판했던 적이 있다. 기독교 신학이 삼위일체론에 대하여 말해야 하는 것은, 수학적 논리적 규범이기보다는, 신 구약 성경에 나타난 구속사적 이야기에 관련된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자신을 계시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전하려는 열정”에 관련된 것이다. 
 

   모더니즘의 시대정신이라는 토대로부터 연역(演繹)을 통하여 논리적 완벽성을 추구하는-예컨대, 칸트 혹은 데카르트와 같은 관념론자들과 영국의 버클리 같은 경험론자들의 인식론에 토대한- 토대주의(foundationalism)의 방식으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십자가로 보내신 하나님의 마음”을 논하려는 것은, “생명없는 토대와 방식을 가지고서 하나님의 생명과 열정을 표현하겠다”는 모순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니까 포스트모던 신학은 논리적 규범에 의하기보다는 수사적 형식을 통하여 서술해나가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설득의 방식에 의하여, 설교나 윤리적 실천적 주장들을 가지고서 작업을 추구해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C. 포스트모던 신학의 방향성과 과제에 대하여


   커닝햄은 이상 세 가지 논점에 착안하여, 포스트모던 신학이 극복해야 할 모더니즘의 성격들에 대하여 논했다. 극복해야할 모더니즘의 요소로서 커닝햄이 의식하는 것은, ‘합리성에 근거한 분류와 개인주의,’ ‘생명의 다양성을 무시하거나 억압하는 연역적 논리의 획일성,’ 그리고 ‘인간적 이성의 논리적 연역을 통하여 나타난 가치중립적 체계를 진리로 상정(想定)하는 토대주의적 성향’들이다. 그러한 맥락에서 포스트모던적 삼위일체 신학은 ‘과격한 포스트모더니즘의 해체와 혼란을 극복하는 평화,’ ‘근대적 개인주의를 극복하는 위격(hypostasis) 개념으로,’ ‘사변적 완벽성으로부터 공동체적 실천으로’ 방향 전환을 촉구하게 되는 것이다.
 

    1) 평화


   포스트모더니즘의 많은 입장들은 다양성을 추구하면서도, 다양한 입장들 사이의 경쟁과 대립의 불가피성을 주장한다. 따라서 과격한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주장하는 탈(脫)중심과 탈(脫)자아는 혼돈을 상정할 수밖에 없다. 그런 혼돈에 질서를 부여할 가능성은 인간의 행위로부터 기대될 수밖에 없다.


   그런 포스트모더니즘의 주장에 대하여, 기독교 신학은 격렬한 갈등이나 투쟁이 아닌 하나님의 선하신 의지를 따라 창조된 세상을 말한다. 격렬한 경쟁과 극복의 과정이 아닌, 은혜가 충만한 풍요롭고 평화로운 내어주심의 행위를 통하여 우주만물은 창조된 것이다. 하나님은 영원히 내어주심의 과정 속에 있는 분이시오. 삼위일체 하나님의 내적인 관계는 본질적으로 평화로우며 평화를 주시는 관계들인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격렬한 허무주의를 주장하는 것에 대하여, 포스트모던 시대의 바람직한 삼위일체 신론은 평화롭고 넘치도록 주시는 하나님의 이야기를 제시해야 하는 것이다. 
 

    2) 위격 개념(personhood)


   모더니즘의 시대정신이 ‘중세적 교회적 구속이 없는 무한한 인간의 자유’와 ‘신적 타율적 속박을 벗어버린 인간의 자율성’을 강조할 때, 그러한 근대성의 자유와 자율성 개념이 모더니즘 시대 삼위일체의 위격 개념에 역(亦)투영된 듯하다. 어거스틴의 삼위일체론에 나타난 위격 개념을 생각할 때, 근대 시기의 개념은 근대 이전의 고전적인 개념과는 전혀 다른 방향을 바라보는 것이다.


   따라서 모더니즘 시대의 삼위일체론 논의에서 위격의 개념은 ‘자유롭고 자율성을 지닌 존재’로서, ‘독립된 의식을 소유한 개체적 차원’에서 이해되었으며, 위격 간의 관계나 상호 의존의 필요성 등에 대해서는 별 관심을 나타내지 않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포스트모던 시대의 기독교 신학으로서 삼위일체론은 “위격의 관계적이고 상호의존적 모델” 을 강력하게 주장하게 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포스트모던 신학이-인간학적 자유와 자율성이라는-계몽주의적 토대로부터 벗어나 본연의 신학적 영역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다.


   기독교의 삼위일체 신학에서의 위격은 자율적 의식 중심(autonomous centre of consciousness)이거나 사적(私的) 존재가 아니다. 위격은 다른 위격들의 삶 속으로 얽혀 들어가며, 다른 위격들의 삶에 참여한다. 그것이 바로 모더니즘적 토대로부터 포스트모던 신학을 향하는 방향성과도 같은 것이다. 그러니까 포스트모던 신학이 하나님의 세 위격들에 대하여 말할 때는, 상호의존적이면서도 관계적인 방식으로 말해야 하는 것이다. 개별자들이라고 말하기 보다는 고유한 위격들이라고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3) 실천(practice)


   삼위일체 신학은 전통적으로 하나님의 피조질서와의 관계를 묘사하는 구원사라는 포괄적 거대담론을 따라 움직여왔다. 그런데 기독교 특유의 이 거대담론은 그 자체로 존재 가능한 것이 아니라, 기독교 신앙인들로 구성된 공동체 특유의 이야기들과 구체적인 실천을 통하여 구현되었을 때만 의미를 지니게 된다. 삼위일체적 사고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고 성령 사이의 관계들을 이해할 필요에 응답하는 맥락에서 발전된 것이며, 삼위일체 신학은 그 관계들을 지속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삼위일체 신학이 순전한 추상(抽象)으로 향하여 소수의 전문 신학자들의 관심사에 그칠 때마다, 삼위일체 신학은 별 의미를 지니지 못하게 된다. 삼위일체 신학이 삶의 다양한 지점에서 영향을 미칠 때라야만, 삼위일체 신학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으로서 인정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포스트모던의 주장들은 그 이론들이 출원한 구체적인 공동체적 실천을 향하여 다시 돌아가야 할 것을 요청한다. 추상적인 이야기 세계로 빠져들지 않기 위하여, 구체적 공동체적 실천에 대면하여 검증을 받으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포스트모던의 주장들이 상식적인 관찰의 수준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거나 일반적인 독자들에게 충분히 이해 가능해야 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포스트모던 시대의 삼위일체 신학은, ‘공동체적 실천’과 ‘인간 삶의 현장과 역사성’이라는 차원에 닻을 내리는 것이어야 함을 말하는 것이다. 삼위일체론이 구속사라고 하는 거대담론에 근거한 것이면서도, 기독교 공동체와 기독교인 개개인의 역사적 상황 속에서의 구체적 실천과 관련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사변적 논리와 추상적 세계로만 나아가지 말고, 논리적 완결성에 대한 강박관념에서 벗어나서, 일상적인 삶과의 관련 속에 기독교적인 삶과 사고에 관련하여 삼위일체론을 펼치라는 요청이다.  


   III. WCC의 삼위일체론
 

    A. 1910년 에든버러에서 ‘하나의 신앙고백’(Confessing one Faith)까지


   모더니즘의 절정에 서있던 1910년 에든버러 세계선교대회(WMC)는 교파적 정체성을 유지한 모임으로서, 거기서 교파들 간에 신학적 쟁점이 될 의제는 거론되지 않을 것으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폐회 석상에서 미국 성공회의 브렌트 주교는 “앞으로 신학적 논의를 해나가자”는 제안을 했고, 거기서부터 에큐메니칼 운동에서 신학적 논의를 담당할 ‘신앙과 직제(Faith and Order)’가 출발한 셈이다. 이후로 신앙과 직제 운동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과 구세주로 고백하는 온 세상의 모든 기독교 교파들”에게 교회 일치를 위한 신학적 논의를 시작할 것을 촉구해 왔다.


   그러한 신학적 일치 추구의 노력은 교회론적 변증과 신학적 논쟁의 시기를 거쳐야 했고, 이후에 삼위일체에 대한 이해가 확장되고 깊어져 감에 따라, 기독교적 일치의 근원과 모델과 목표로서 그리고 신학과 영성의 갱신을 위한 근거로서 삼위일체의 신비를 재발견해가게 된다. 교회의 삶과 기독교 일치를 위하여 삼위일체의 신비가 일치 논의의 근원과 중심에 위치해야 한다는 요청이 여러 에큐메니칼 사건들에서 나타났고 확장되어온 것이다.


   근대 에큐메니칼 운동의 신학적 일치 추구에 대한 서술에서 겐나디오스 리무리스는 1888년 영국성공회의 제 3차 람베드 주교회의에서 채택된 람베드 4원칙을 그 시발점으로 언급한다. 람베드 4 원칙은 기독교 신앙의 본질적 요소에 대하여 “...세례신조로서 사도신경과 기독교 신앙의 충족한 진술로서의 니케아 신조”를 언급한 바 있다.


   WCC 제 1차 총회인 암스테르담에서는 기독론 중심의 WCC 헌장이 제시되었다. 그런데  1961년 뉴델리 WCC에서, WCC 교리 헌장(the Basis of WCC)은 동방교회의 요청에 따라 삼위일체적인 것으로 확장되어 나타난다. 1963년 몬트리올 신앙과 직제에서, “성서의 기원인 한 복음 전승(T)이 다양한 문화 속에서 다양한 신학전통을 형성해왔음을 주장하게 되는데, 거기서 복음은 그런 신학 전통들의 통일성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1963년 몬트리올 신앙과 직제에서, 예배에 있어서 삼위일체적 관점에 대한 관심이 나타난다. “아들에 의하여 구속받고, 성령의 능력 안에서 지속적으로 새로운 삶을 발견해가는 백성들에 의한 아버지 하나님을 향한 예배로서,” 예배에 대한 삼위일체적 관점이 나타난 것이다. 몬트리올에서 1975년 나이로비에 이르는 길목에서는, 복음과 삼위일체 하나님이 교회들의 모든 다양한 신학적 가르침들의 통일성이 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며, 삼위일체에 근거한 협의회적 성격(conciliarity)이 확정되어 나타난 것이 바로 나이로비에서 이루어진 일이다.
 

   나이로비의 WCC는 무엇을 ‘사도적 신앙의 공동 표현’으로 할 것인가?를 신앙과 직제로 하여금 연구케 했고, 신앙과 직제는 결국 니케아 콘스탄티노플(A. D. 381) 신조를 채택하였다. 그리하여  니케아 신조 1600주년인 1981년 이후 집중 연구하여, 1991년에 “하나의 신앙고백”(Confessing one Faith)으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B. 사도적 신앙과 ‘하나의 신앙고백(Confessing one Faith)’


   교회들로 하여금 ‘하나의 신앙과 하나의 성만찬 교제로 이룩되는 가시적 일치’를 추구하게 하는 것이 WCC의 우선적 기능이며 목표이다. 그러한 가시적 일치를 위하여 필요한 요소들은 ‘사도적 신앙의 공동고백,’ ‘세례, 성만찬, 직제(BEM)에 대한 상호인정,’ ‘의사결정과 권위 있는 가르침, 그리고 증거와 봉사를 위한 공동의 기구적 구조’(1)의 세 가지라는 것이 밝혀지게 되었다. 신앙과 직제가 내놓은 “하나의 신앙고백“의 의도하는 바는, 교회들로 하여금 세 가지 중 첫 번째 요소인 ‘사도적 신앙의 공동고백’을 향하여 나아가게 하는 데 있는 것이다.


   ‘사도적 신앙’에 대한 연구는 두 개의 다른 ‘신앙과 직제’ 프로그램들과 관계되어 있다. 우선, 사도적 신앙연구는 교회론적 초점을 지닌 BEM 문서를 위한 폭넓은 기초와 틀을 마련해 주려 한다. 그리고 사도적 신앙 연구는 창조, 구속 및 완성이라는 하나님의 구원행동에 대한 보다 폭넓은 삼위일체적 전망을 제공하려는 것이다.(9)


   1982년 리마에서 모인 신앙과 직제 위원총회는 세 가지 차원에서 사도적 신앙에 대한 연구를 발전시키기로 결정하였다. 그 세 가지 차원은, 사도적 신앙에 대한 공동 인정, 공동 해석 그리고 공동고백인 것이다. 그런데 1983년 10월 로마의 신학협의회는 세 가지 차원들 중에서 ‘해석’이 본 연구의 출발이 되어야 하고 강조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10) 그리고 신앙과 직제는 ‘해석되어야 할 사도적 신앙의 근본적 요소들’을 제시하기 위하여, AD 381년의 니케아 콘스탄티노플신조를 신학적이고 방법론적인 도구로 사용하기로 한 것이다.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신조는 ‘사도적 신앙의 본질적 내용에 대한 규범적 표현’으로서 그 어떤 다른 신조들보다 더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졌고, ‘현대 기독교가 보유하고 있는 역사적 유산’의 한부분이며, 교회의 동일한 신앙을 표현하기 위하여 오랜 역사동안 예배의식을 통하여 사용되어 왔기 때문이다. 니케아신조는 이처럼, 현대적 상황에서 진술된 신앙이 교회가 오랜 역사에 걸쳐 고백해온 신앙과 동일한가, 혹은 그렇지 않은가를 지적하는 일에 사용되는 것이다.(12)  첫 단계의 연구 결과, 1987년 신앙과 직제 No.140으로 잠정문서가 나왔고, 그 수정판이 1990년 신앙과 직제 상임위원회의 공인을 통하여 “하나의 신앙고백”으로 출판된 것이다.(29) 이제 바로 그 “하나의 신앙고백”을 중심으로, WCC의 삼위일체론에 대하여 논할 순서이다.
 

   C. “하나의 신앙고백”을 통하여 나타난 WCC의 삼위일체론
 

    1) ‘교회의 신앙고백’으로서 에큐메니칼 신조


   “하나의 신앙고백”은 그 처음에 니케아 신조의 신앙고백이 “우리는 믿습니다.”로 시작됨을 말하면서 시작한다. 사도신경이나 다른 예식서들이 일인칭 단수인 것에 비하여, 니케아신조는 “개인의 신앙고백이 전교회의 신앙고백과 함께 일어나야 한다”는 전제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개인인 인간의 주체적 이성의 인식을 통하여 전개되는 모더니즘 시대의 신학적 방법론을 생각할 때, 전 교회의 공동체적 신앙고백으로서 에큐메니칼 신조를 말하는 것은 초대교회로부터 이어져온 기독교의 신앙유산이요, 동시에 포스트모던 신학이 이어받아서 전개해나갈 전통적 공동체적 전승의 내용이다.
 

    2) 구속사에 근거한 송영론적인 삼위일체


   공동체적 예배의 실천 속에 구속사를 통하여 계시된 세 위격의 코이노니아를 말하는 것은, 인식론적 이성인 근대적 개인의 자의식(Selbstbewusstsein)이 모더니즘의 시대정신이라는 토대로부터 논리적 연역을 통하여 신에 대하여 서술해나가는 모더니즘의 방식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세 위격들의 구별성과 위격적 특징은 모더니즘의 논리체계에서는 외면 당해온 논제들이다. 다음의 인용은 그에 대한 내용들을 나타내고 있다.
 

   한 분 하나님은 그의 역사 속에서의 구속행동에 근거한 삼위일체로 이해되었다... 동방교회나 서방교회나 모두가 하나님의 통일성과 위격들의 구별성을 항상 예배 시에 동일하게 고백해 왔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위격적 특징이 가장 분명하게 나타나는 것은 예배에서이다...전체적으로 니케아신학은 구속사를 통해서 계시된 하나님 안에 있는 세 위격 각각의 독특성과 이 세 위격이 한 신적인 존재 안에서 코이노니아를 통하여 일치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10)
 

   3) 삼위일체에 대한 성서적 증언  
 

   이스라엘의 역사와 계시, 그리고 그에 대한 성서적 증언으로부터 삼위일체를 말하는 것은 초대교회로부터 이어져 온 기독교 신앙과 신학의 통일성에 해당하는 것으로, 기독교 공동체의 실천적 삶을 통하여 표현되고 또 전해져온 것이다. 다음의 인용문에 그러한 내용이 잘 나타난다.
 

   이스라엘은 자신의 역사 과정 속에서 하나님의 독특성을 믿게 되었다...(11) 구약이 강조하고 있는 하나님의 유일무이성은 신약으로 이어졌다...(12) 하지만 신약성경은 또한 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와 특별하고도 독특한 관계 속에 있다는 사실을 밝히 말하고 있다...(13) 동시에 신약성경은 또한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신 성령(요15:26)을 아들에게 연결시킨다...초기 사도들의 설교와 가르침에 보면 성부, 성자, 성령, 셋이 모두 함께 불리어지고 있다.(고후13:13, 엡4:4-6)(14)
 

    4) 구속사적 계시를 앞세운, 경세적 삼위일체와 내재적 삼위일체의 일치 


   유대교와 이슬람이라는 일신교들과 달리 기독교 신앙에는 삼위일체적 신론의 특수성과 차이(difference)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삼위일체적 구속사에 해당하는 경세적 삼위일체 하나님이 영원 차원의 삼위일체 하나님과 동일한 분이라는 다음 인용문에 나오는 주장은, 인식론적 이성을 앞세우는 근대성의 방법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다음의 인용은 그런 내용을 잘 나타내고 있다. 
 

   성부, 성자, 성령의 자기 계시가 한분 하나님에 대한 기독교 신앙의 특수성의 근거이다. 따라서 창조, 화해, 종말론적인 완성을 향한 구속사에 해당하는 하나님의 경세가 삼위일체 하나님 신앙의 기초이다. 동시에 한 분 하나님은 영원의 차원에서도 성부, 성자, 성령이시다. 경세적 삼위일체 하나님과 영원 차원의 삼위일체 하나님은 동일하신 분이시다...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역사적 자기 계시에 근거해서만 교회의 삼위일체 하나님 신앙을 설명할 수 있다. 삼위일체 교리는 추상적 사변의 결과물이 아니라,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어떻게 계시되었는가의 요약이다.(15) 
 

    5) 십자가와 부활에 근거한 종말론적 삼위일체


   “하나의 신앙고백”에 나타난 WCC의 삼위일체론은 근대적 합리성(rationality)과 분류를 따라 인과론적 관계를 따지는 방식으로 가지 않고, 합리성 이전의 은밀한 관계들과 인과론 이전의 삼위일체 하나님의 종말론적 목적론을 제시함으로써, 근대 이전의( premodern) 신학적 틀을 회복하면서 포스트모던 신학으로 나아간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십자가에 달리셨던 분을 부활시키사, 새 생명, 썩어지지 않을 생명이 되게 하셨으니, 이 생명은 종말론적 미래에 우리의 생명들과 전창조세계의 최종적 변화와 영화를 가져올 것이다.(16)
 

   결국 종말에 가서는 하나님께서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실 것이고(고전 15:28), 신천신지가 있게 될 것이다(벧후3:13,계21;1, 비교:사65:17, 66:22). 모든 피조물들과 자연 그 자체는 변화되어 하나님의 새로운 세계에 참여할 것이다(롬8:19-23).(72)   교회는 몸의 미래 부활과 장차 올 세계의 영생을 확고히 믿으면서 창조자와 구속자의 긍극적인 목적에 대한 비전을 갖고 있다.(73)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의 왕국들과 관련을 갖는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세속 왕국들에게-비록 그것이 임시적이기는 해도-궁극적 운명의 시야를 제공하고 장차 오실 심판주가 이들에게서 기대하시는 표준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세계사는 이 심판주의 심판을 염두에 두고 형성되어야 한다. 즉 세계사는 모든 창조세계의 통치자이신 전능자의 왕국에 비추어서 형성되어야 한다.(191)
 

   모더니즘의 토대주의적 방법론에 있어서 근원과 토대가 되는 궁극성이 곧 모더니즘의 시대정신이라면, 기독교 신학 본연의 궁극성은 전능자의 왕국으로부터 논의되는 것이요. 삼위일체 하나님의 종말론적 완성을 전제하는 것이다. 따라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종말론적 완성”은 본연의 기독교 신학이면서 동시에 모더니즘적 시대정신에 대한 반제요. 포스트모던 신학의 방향성을 명백히 하는 것이다. 


    6) 통일성과 상호 관계성


   '백인의 짐(whithe man's burden)‘이라든가 서구일방주의, 또는 노동 분업, 분할 통치와 같은 모더니즘의 언어들을 생각할 때, ’세 위격들의 상호 내주‘ ’통치가 유지되는 상호관계성‘은 근대성의 범위를 벗어나는 내용들이다. 기독교의 본래성이 근대성의 해체를 주장한다면, 바로 이런 내용들이 대표적인 것이다.
 

   세 위격들의 상호 내주(內住)는 삼위의 일체성을 특징짓는다...삼위의 통일성이 성부에게서 기원하지만 아들의 순종과 성부 안에서 성자를 영화롭게 하시고 성자 안에서 성부를 영화롭게 하시는 성령의 증거 안에서 유지된다...성부의 통일성 있는 통치가 유지되면서도 삼위간의 상호관계성이야말로 신적 통일성의 구체적인 모습으로 이해되어야 한다.(18) 삼위일체의 하나님은 그 창조세계에 있는 다양성과 통일성의 근거이시다.
 

   삼위일체란 통일성을 파괴하지 않는 다양성의 모형이요, 획일주의와는 달리 다양성을 질식시키지 않는 통일성의 모형이다. 따라서 한분 하나님께서는 그의 다양한 피조물들 안에 창조적으로 현존하신다.(20) 이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창조자로부터 소외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실존의 심층 속에 현존하신다.(21)
 

   근대 시기 서구 중심의 보편성은 모더니즘의 획일성이었다는 점을 생각할 때, 통일성과 다양성을 동시에 지닌 살아있는 보편성으로서의 삼위일체 하나님은 인류와 우주만물을 향한 진정한 보편성이 되신다.
 

   유한자들의 세계와 세속적인 사회체제는 모두가 초월적 실재를 자신들의 기초로 갖고 있지 않는 한 궁극적인 의미와 목적을 가질 수 없다.(29)
 

   모더니즘의 토대주의적 방법론에서는 그 토대인 시대정신이 신론으로 역침투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그렇게 형성된 신론은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주장대로 해체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모두가 초월적 실재를 자신들의 기초로 가져야 한다”는 주장은 모더니즘의 토대주의에 대한 반격이면서 동시에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해체론에 대한 포스트모던 신학의 대응이기도 하다.
 

    7) 성서적 세속화(secularization)와 모더니즘의 이분법적 세속주의(secularism)
 

   세계를 설명함에 있어서 세속 학문으로 만족하는 자만에서 나온 무신론과 현대사회의 세속주의는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다. 이 세속주의는...종교를 단순히 사사로운 일로 격하시키고 국가와 사회의 공공질서가 하나님 앞에서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거부한다. 우리는 이 같은 세속주의(secularism)를 세속화(secularization)와 혼동해서는 안된다...초대 기독교는 현 사회질서에다가 궁극적인 가치를 부여하지 않았다. 거기서 일어난 것은 세속화이다. 그 세속화가, 사회질서를 하나님의 궁극적 실재로부터 풀어놓거나 분리시키는 것을 의미하는 않았다. 그런데 현대사회에서의 세속주의에서는 바로 그런 분리가 일어났다. 그러한 세속주의는 유럽과 미국의 문제일 뿐 아니라 근대화(산업화+관료행정)의 확산으로 전세계의 도처에 퍼져 나갔다.(28) 
 

   기독교 사상이 가끔 일상적인 이원론에 빠질 유혹을 받는 것이 사실이지만, 창조세계의 가시적 측면들과 비가시적인 측면들 사이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세계관에 있어서 ‘물질적’ 세계와 ‘영적’ 세계 사이의 이원론이나 분리는 없다. 이 둘 사이의 긴장은 시간적 제약 하에 있는 우리의 세계에 속하는 것인데, 종말론적 비전의 실현에 있어서 극복될 것이다.(76)
 

   초대기독교의 세속화가 근대의 이분법적 세속주의로 왜곡됨으로써, 모더니즘의 ‘지배와 종속,’ ‘주체와 객체,’ 등의 이분법적 사고구조로 나아갈 수 있는 전거가 되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거기서부터, 삼위일체 하나님의 종말론적 완성에 근거한 통일성을 신학적 본문으로 삼아서 참여적 종말론적 통전성을 추구해나가는 것이, 하나의 신앙고백을 통하여 WCC의 삼위일체론이 주장하는 내용이요, 포스트모던 신학의 방향이 될 것이다.
 

    8) 부성과 인격적 이름으로서의 아버지 이미지
 

   인간의 이성은 초월적 하나님의 본성과 존재를 완전하게 파악할 수 없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에 관하여 말할 때, 하나님 묘사의 부분성과 근접성을 인정하면서 인간의 언어, 상징 등 및 이미지들을 사용하지 않으면 안된다...하나님의 기원에 관한 진리들을 표현하는 인간적 경험에서 나온 말들의 사용은 그 어떤 성적(性的) 함축도 갖고 있지 않은 것으로 의도되었다. 이러한 말들에 의해서 교회는 아들의 생명이 하나님 안에서 아버지에게서 기원했다고 고백할 수 있다.(49)
 

   위 인용문은 신학적 용어들이 지녀야 하는 수사적 표현이 왜 필요한지를 설명해 준다. 하나님에 대한 묘사는 인간의 논리적 언어로 완벽하게 처리될 그런 내용이 아니기 때문이다. 초월적 하나님에 대한 서술이 과학기술적인 논리로 처리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상징과 이미지들을 사용하는 부분성과 근접성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이 바로 포스트모던 신학의 수사적 표현인 셈이다.
 

    9) 참여적 삼위일체


   가치중립적 논리체계를 진리의 토대처럼 인식했던 것이 근대성이라면, 포스트모던 신학의 창조신앙은 생명의 관계와 환경에 대한 윤리적 책임을 앞세우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나는 인간의 회복은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창조 세계와 환경에 관한 윤리적 책임을 확립시킨다...기독교의 창조 신앙은 과학과 기술에 대한 배려 깊고도 책임적인 사용, 인류의 파괴에 대한 항거 및 물질보다 인간 생명과 인간관계의 선호를 요구한다.(88)
 

   모더니즘의 방법론이 역사적 우연적 사건들을 초월하는 가치중립적 논리체계를 숭배했다면, 기독교의 계시는 특정한 구체적 역사적 사건을 통하여 인간들과 관계 맺으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계시이다. 근대성의 질문으로부터 기독교의 토대를 공격해오는 논리적 질문과 해답의 방식이 아니라, 고난의 삶 속에서 제자들의 영혼을 일깨우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계시가 신학의 토대요 방법론을 결정해야 하는 것이다. 다음의 인용에서 그런 내용이 잘 나타난다.
 

   ‘본디오 빌라도에 의하여’란 구절이 신조의 표현 중 특히 중요하다. 그것은 하나님의 성육신하신 아들의 죽음과 고난이 하나의 특정 역사적 사건이라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빌라도는 일반적인 의미에서 피식민지 국가에 대한 정치적 억압을 대표한다. 또한 그는 기회주의적인 이유들로 인한 개인의 인권유린을 대표한다...예수께서 본디오 빌라도에 의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는 진술은 그의 죽음이 개인의 사사로운 일이 아니라 공적인 사건이요. 그의 생애의 끝이 그 당시 팔레스타인의 정치적 상황과 깊숙이 관련되어 있다고 하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이 그가 태어난 나라의 사회, 정치적 여건들과 여러 다른 방법으로 뒤얽혀 있다는 사실은 오늘날의 그의 제자들의 삶, 헌신 및 죽음을 위해서 의미를 갖는다.(148)  
 

    10) 화해의 방법론
 

   현대의 성서학은 대체로 역사비평적 방법론을 따른다... 사도들이 증거하는 그의 지상 사역과 그의 부활이 모든 현대 기독론 연구의 출발점을 이룬다. 이러한 접근 방법과 니케아의 접근 방법 사이에는 긴장이 있어 보인다.(106) 그러나 ‘니케아’의 접근법은 송영적(doxological)이고 신앙고백적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현대의 역사적 석의 방법론은 교부들의 신앙고백적 접근방법을 제외시킬 필요가 없고, 후자는 기독론적 전통의 성장 과정에 대한 분석을 제외시키지 않는다. 이 두 접근 방법은 양립할 수 있으며 서로를 풍요롭게 한다. 기독론적 전승발전에 있어서 초기의 암묵적인 내용이 후기에는 명시적 내용으로 발전되는 가능성이 배제되지 않기 때문이다.(109)
 

   니케아의 송영적이고 신앙고백적인 접근법과 ‘기독론적 전승사를 따라 진화론적 논의를 추구하는 현대적 방법론’ 사이에는 화해가 가능하다는 주장이다. 그러한 화해가 구체적인 신학적 방법으로 활용된다면, 근대 이전의 고전적 방법과 근대의 진화론적 방법과 포스트모던 신학의 방법은 화해와 연속의 의미를 지니게 될 것이다.
 

   이러한 화해 방식은 성령론에서 필리오퀘(filioque) 논의에서도 나타나게 된다.(148)
   서방교회는 성령과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표현하기 위하여 filioque라는 개념을 도입하여 논쟁을 일으켰다...서방과 동방의 기독교인들은 성령이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셨다고 하는 니케아-콘스탄티노플신조의 본문에 충실하기를 원하게 되었고, 오늘날 이 양측은 성령이 아들에게 종속되는 듯한 인상을 주지 않으면서 아들과 성령의 친밀한 관계를 주장하는 데에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다....이들은 이 공동의 신앙에 바탕하여 본래의 공동고백에 충실한 방법을 찾아서 이같은 상이한 해석을 피차간에 설명하려고 한다...이들은 점점 더 본신조를 본래의 형태로 함께 고백하고 있다.(210)    


   포스트모던 시대의 동,서방 교회 형제들은 니케아 신조의 본래 형태에 함께 가까이 다가가면서 상호간의 수용 가능한 차이(difference)를 확인하면서 포스트모던 신학의 영역으로 함께 나아가고 있다.
 

    11) missio Dei의 교회론
 

   교회의 기원은 인류의 구원을 위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계획에 뿌리내리고 있다.(216) 본신조의 제3항목은 그 순서를 보면 성령에 대한 신앙으로부터 교회에 대한 신앙으로 움직여가고 있다...이것은 교회가 고립된 신앙의 대상으로 나타나는 것을 방지하고 있다(219)  교회의 삶과 일치의 근거는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교제이다...이처럼 교회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일체에 의해서 일치된 하나님의 백성이다.(225)  
 

   그리스도께서 인류를 위해서 그리고 인류에게 아버지에 의해서 주어진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이 세상 속에 파송받는다...이 공동체는 하나님과 인류를 섬김에 있어서 명상적이면서 동시에 활동적이고, 모든 것을 포함하고 모든 것을 회복하는 하나님의 나라에로 받아들여질 마지막 때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그렇다.(230) ...따라서 교회 그 자체는 삼위일체 하나님에 의하여 약속된 미래로 인도받는 순례하는 백성이다.(전에는 이것이 전투하는 교회와 승리하는 교회에 의해서 표현되었다.)(234) ...예언적 징표로서의 교회는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활동적이고 개변시키는 현존의 수단이다.(236) 
 

   모더니즘의 자율적 교회론과는 방향을 달리하는 것이다. 모더니즘의 거대담론이나 이를 과격하게 해체시키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목적 상실과는 달리, 종말론적 목적론적 차원이 선명하다. missio Dei가 주로 과격한 참여적 행동주의로 인식되는 한국 기독교 사회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종말론적 도구라는 교회론적 의미는 새롭게 인식되어야 한다. 신앙과 신학의 궁극적 목표가 교회성장인 것처럼 살아온 한국개신교 전반이 새로워지려고 할 때, 바로 이러한 missio Dei의 교회론이 필요하다. 한국 개신교의 포스트모던 신학에서 교회론은 missio Dei의 교회론으로부터 새롭게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12)포스트모던 시대의 다원성에 대한 에큐메니칼 교회론
 

   은혜와 진리로 충만하신 그리스도께서 이미 이 땅 위에서 보편적 교회 안에 현존하신다. 은혜와 진리의 충만함은 각 개교회 안에 있다. 그래서 보편성이란 이 같은 모든 개교회들의 교제를 요구하고 각 개교회의 정체성에 관련되어 있으며, 이 개교회들의 교제라고 하는 본질적 특성을 구축한다...교회의 이러한 보편성은 민족주의, 특수 전통들 및 모든 인간적 장벽들을 초월한다.(240)
 

   개교회 위주로 교회성장을 추구하며 살아온 한국 교회들은 시대적 다원성에 대하여 적극적인 대처 방안을 찾지 못하고 있다. 이제까지 살아온 방식이 보편성을 외면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다원주의가 아닌 다원성에 대처하는 포스트모던 신학을 위해서 WCC의 삼위일체론은 신학적 근원과 토대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다.


    III. 결론
 

    A. WCC의 삼위일체론에 나타난 포스트모던 신학
 

   기독교적 통일성에 대하여: 유대교와 이슬람이라는 일신교들과 달리 기독교적 하나님의 특수성과 차이(difference)를 말하는 것이 삼위일체론이다. 삼위일체적 구속사라는 하나님의 경세가 영원 차원의 삼위일체 하나님과 동일하다는 주장은 모더니즘의 인식론적 이성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역사와 계시, 그리고 그에 대한 성서적 증언으로부터 삼위일체를 말하는 것은 초대교회로부터 이어져온 기독교 신앙과 신학의 통일성에 해당하는 것으로, 근대적 이성의 논리적 추론을 통해서는 해명될 수 없는 주제이다. 전(全) 교회의 공동체적 신앙고백으로서 삼위일체적 에큐메니칼 신조를 고백하는 것은 초대교회로부터 이어져온 기독교의 신앙유산이요. 동시에 포스트모던 신학이 이어받아서 전개해나갈 공동체적 전승으로서 기독교 신학의 통일성이다.
 

   근대성의 이분법에 대하여: 초대기독교의 세속화가 근대의 이분법적 세속주의로 왜곡됨으로써, 모더니즘의 ‘지배와 종속,’ ‘주체와 객체,’ 등의 이분법적 사고구조로 나아갈 수 있는 전거가 되었다면, 삼위일체 하나님의 종말론적 완성에 근거한 통일성을 신학적 본문으로 삼아서 참여적 종말론적 통전성을 추구해나가는 것은, WCC의 삼위일체론이 주장하는 포스트모던 신학의 방향이 될 것이다.


   '백인의 짐(whithe man's burden)‘이라든가 서구일방주의, 또는 노동 분업, 분할 통치와 같은 모더니즘의 언어들을 생각할 때, 삼위일체론에 있어서 ’세 위격들의 상호 내주‘ ’통치가 유지되는 상호관계성‘은 근대 이전의 고전적 내용들이면서 동시에 포스트모던 신학의 내용들이다. 기독교의 포스트모던 신학이 근대성의 해체를 주장한다면, 바로 이런 내용들을 주로 의식하는 것이다.


   근대 시기 서구 중심의 보편성은 모더니즘의 획일성이었다는 점을 생각할 때, 통일성과 다양성을 동시에 지닌 살아있는 보편성으로서의 삼위일체 하나님은 인류와 우주만물을 향한 진정한 보편성이 되신다.
 

   수사(修辭): WCC의 삼위일체론은 신학적 서술에서 수사적 표현이 왜 필요한지를 설명해준다.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묘사는 인간의 논리적 언어로 완벽하게 처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초월적 하나님에 대한 서술의 부분성과 근접성을 인정하면서 상징과 이미지들을 사용하려는 것이 포스트모던 신학의 수사적 표현인 셈이다.
 

   모더니즘의 방법론에 대하여: 모더니즘의 방법론이 인식론적 이성에 근거한 가치중립적 논리체계를 신학적 본문처럼 받아들였다면, 전통적인 기독교 신학의 본문은 특정한 구체적 역사적 사건을 통하여 인간들과 관계 맺으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계시이다. 근대성의 질문으로부터 기독교의 토대를 공격해오는 논리적 질문과 해답의 방식이 아니라, 고난의 삶 속에서 죄인들의 영혼을 일깨우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계시가 신학의 토대와 방법론을 결정해야 하는 것이다.


   니케아의 송영적이고 신앙고백적인 접근법과 ‘기독론적 전승사를 따라 진화론적 논의를 추구하는 현대적 방법론’ 사이에는 화해가 가능하다는 것이 WCC 삼위일체론의 주장이다. 그러한 화해의 흐름 속에서는 근대 이전의 고전적 방법과 근대의 진화론적 방법과 포스트모던 신학은 화해와 연속의 의미를 지니게 될 것이다.
 

   모더니즘의 토대주의에 대하여: 모더니즘의 토대주의적 방법론에 있어서는 근대성의 시대정신이 궁극성의 위치를 차지했다고 생각할 때, 기독교 신학의 궁극성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나라로부터 논의되는 것이요. 삼위일체 하나님의 종말론적 완성을 바라보는 것이다.
  

   신학적 근원과 토대의 위치에 시대정신이 위치할 경우, 그 시대정신은 신론으로 역(逆)침투할 수밖에 없으며, 그렇게 형성된 신론은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주장대로 해체 대상이 되는 것이다. “모두가 초월적 실재를 자신들의 기초로 가져야 한다”는 WCC 삼위일체론의 주장은 모더니즘의 토대주의에 대한 반격이면서 동시에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해체론에 대한 포스트모던 신학의 대응이기도 하다.


   근대적 합리성과 분류(分類)를 따라 인과론적 관계를 따지는 방식으로 가지 않고, 공동체적 예배의 실천 속에 구속사를 통하여 계시된 세 위격의 코이노니아를 말하는 것은, 논리적 연역을 통하여 신에 대하여 서술해나가는 모더니즘의 방식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세 위격들의 구별성과 위격적 특징은 모더니즘의 논리체계에서는 외면 당해온 논제들이다.
가치중립적 논리체계를 진리의 근원과 토대처럼 인식했던 것이 근대성이라면, 포스트모던 신학의 창조신앙은 생명의 관계와 환경에 대한 윤리적 책임을 앞세우는 것이다. 
 

   B. 서방교회의 신론과 WCC의 삼위일체론


   서방교회의 정통주의 시대 신학작업은 기존의 공리로부터 논리적 추론을 통하여 일관성있는 체계를 추구해가는 이른바  토대주의의 방식이었다. 그런 방식에서 전개되는 신론은, 형이상학적이고 인식론적인 질문으로부터 출발하는 De Deo의 방식으로서, “자연인이 알 수 있는 하나님에 대하여” 논한 셈이었으며 계시신학이기보다는 신학적 인간학의 가능성을 지닌 것이었다. 따라서 구원론이나 교회론적인 주제에 대해서는 활발히 논의되었지만, 계시의 근원에 해당하는 삼위일체론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그러한 정통주의의 흐름은 이후의 서구 모더니즘 시대에도 이어져 나타나게 된다.


   그러한 서방교회의 신론 논의 방식에 대하여, WCC의 삼위일체론은 토대주의를 해체하는 계시신학으로서의 면모를 회복한 것이며, 구원론이나 교회론 이전에 신론을 논하는 본래적인 방식의 회복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한 토대주의적 방식과 개별자(individual)에 무게를 두는 방식이 정통주의 시대 이후 서방교회의 전형적인 방식이라고 생각할 때, 세 위격 간의 관계에 무게를 두며 그것을 본질적인 차원에 위치시키는 논의 방식은 서방교회의 신론에 대한 교정적 차원을 지니는 것이다.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에서 소외되었던 삼위일체론은 헤겔우파에서 소생되어, 바르트에게서 재건된 것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한 삼위일체론의 재건은 현대신학의 근원적 흐름을 바꾸어놓았으며, 20세기 신학의 새 장(場)을 연 것으로 평가된다. 그런데 바르트는, 인간 이성에 근거한 ‘개체로서의 자의식’(Selbstbewusstsein)이라는 서구 모더니즘의 인격 개념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성서적 계시에 근거한 세 위격(位格) 사이의 구별이나 사회적 관계로 나아간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의 통일성을 강조하면서 양태론적 경향을 보이게 된다.


   통일성을 강조하는 바르트의 삼위일체론이 모더니즘을 극복하는 차원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위격의 관계적이고 상호의존적 모델’을 강조하는 것이 포스트모던 시대의 기독교신학이라는 이 글의 논지를 따라 생각할 때, 바르트의 삼위일체론 역시 WCC의 삼위일체론으로부터 교정을 받아야할 여지를 지니고 있는 셈이다.
 

   C. 포스트모던 신학의 근원과 이정표로서 WCC의 삼위일체론


   근대성의 흐름 속에서 신학자들로부터 외면 당해온 많은 중요한 신학적 주제들에 초점을 맞추면서 포스트모던 시대의 신학은 그 문을 열어왔다. 서구의 근대 시기에 잊혀진 듯 했던 삼위일체에 대한 연구가 어느 시기에 갑자기 쏟아져 나오던 것과 포스트모더니즘의 도래(到來)가 동시에 이루어졌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런 맥락에서, 커닝햄은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올바른 해석은 물론이요 삼위일체적 통찰력들을 올바로 이해하고 받아들일 때에만, 포스트모던 시대의 기독교 신학은 성공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계몽주의적 자율적 교회론과는 달리 WCC의 삼위일체론에서는 교회의 종말론적 목적론적 차원이 선명하게 나타난다. missio Dei가 주로 과격한 행동주의로 인식되어온 한국 기독교 사회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종말론적 도구라는 교회론적 의미는 새롭게 인식되어야 한다. 신앙과 신학의 궁극적 목표가 교회성장인 것처럼 살아온 한국개신교 전반이 새로워지려고 할 때, WCC의 삼위일체론에 근거한 missio Dei의 교회론이 한국 교회의 포스트모던 신학으로서 실제적 역할을 해야 할 것이다.


   보편성을 외면하면서 개교회 위주로 교회성장을 추구해온 한국 교회들은 시대적 다원성에 대면하여 적극적인 대안을 찾지 못하고 있다. 다원주의가 아닌 다원성에 대처하는 포스트모던 신학을 위해서 WCC의 삼위일체론은 신학적 근원과 토대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다. 
   포스트모던 시대의 동,서방 교회 형제들은 니케아 신조의 본래 형태에 함께 가까이 다가가면서 상호간의 수용 가능한 차이를 확인하면서 포스트모던 신학의 영역으로 함께 나아가고 있다는 것이 WCC의 삼위일체론을 통하여 나타난다.


   삼위일체론이 기독교의 공식적인 신앙고백이요 교리로서 등장할 당시에, 교회는 아리안주의라는 심각한 문제와 싸우는 중이었다. 20세기 초, 모더니즘의 절정과 파국으로부터 출발한 현대 에큐메니칼 운동의 흐름 속에서 형성되어 20세기 말에 “하나의 신앙고백”(Confessing the one Faith)로 열매맺은 WCC의 삼위일체론은 기독교 서구 근대 시기의 부정적 결과들을 극복하면서 교회일치의 신학적 초점과 토대로서의 기대를 받아왔다.
 

   근대 이전의 전통적인 내용들에 대한 연속성을 의식하고, 모더니즘의 공격적 거대담론에 대해서는 해체를 주장하면서, 동시에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과격한 해체와 무질서에 대해서는 기독교 본연의 질서를 제시하는 WCC의 삼위일체론은 포스트모던 신학의 근원과 토대가 되기에 적합한 신론임을 주장하는 바이다. (2011.12.2. 로앤처치)
      

강희창박사는 서울대와 장신대학원을 졸업하고 이형기교수로부터 지도를 받아 교회사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서울장신대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