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의 은혜/신앙,시사,목양 칼럼

이지성 작가 '한국의 진짜 목사를 찾아서' 출간

에바다. 2011. 12. 14. 10:15

                "오늘의 교회 위기는 목사들의 탓"
                       이지성작가 '한국의 진짜 목사를 찾아서' 출간 
                       책 속의 7명의 목회자 자성의 목소리 높여 
 

   '리딩으로 리드하라' '스무살 절대 지지 않기를' '여자라면 힐러리처럼' '꿈꾸는 다락방' 등으로 베스트셀러 작가 대열에 오른 이지성씨(사랑의교회)가 최근 흥미로운 제목의 신간 한 권을 펴냈다. '한국의 진짜 목사를 찾아서(15일 출간,다산초당)',그 누구보다 대중과 가까이 호흡해온 그가 왜 이렇게 비대중적인(?) 내용의 책을 쓴 것일까. 알고 보면 "이지성은 개독작가냐" 등 이미 많은 악플을 경험해본 그다. 한편에선 '이번 기회에 내 종교에 대해 좀 더 생각했으면 좋겠다' '한국교회에 부는 자정의 바람이 되었으면 한다' '교회 다니는 친구들에게 적극 추천해줘야겠다' 등 벌써부터 새 책을 기다리는 고정 독자들도 많다.
    
   출간을 2주여 앞둔 지난 1일 만난 이지성작가는 타고난 이야기꾼이었다. 8년간의 초등학교 교사 생활과 작가로서 긴 무명 시절을 보낸 까닭인지 그에게는 수 만 가지의 이야기꺼리가 내재돼있는 듯 했다. "어떻게 하다 기독교가 이렇게까지 됐나 싶어" 쓰게 됐다는 이 책은 7명의 목회자에 대한 인터뷰집이다. 답답한 마음을 풀고자 만난 이들은 한국칼빈주의연구원장 정성구박사,지구촌교회 원로 이동원목사,영등포에서 노숙자를 대상으로 무료급식을 펼쳐온 박희돈목사,단군상 철거로 법적구속까지 갔던 최흥호목사,국내 이단전문가로 통하는 탁지원 탁지일목사 형제,7080 인기가수 출신의 김종찬목사 등이다. "목사도 아닌데다 날라리 신자인 내가 왜 이런 책을 써야 하나 집필 내내 짜증이 났다"는 그는 이날 인터뷰 내내 자신이 만난 인터뷰이(interviewee)들의 말을 빌어 이야기했다.
 

   칼빈주의 기초부터 공부하고 기독교강요를 독파하는가 하면,관련 CD를 10번 이상 듣는 등 그는 한 사람 한 사람 인터뷰하기 위해 꽤 많은 노력을 쏟았다. 인터뷰만 1년 6개월,10개월간 집필에 매달렸다. "11년간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을 기다렸다"는 최흥호목사에게서는 한국교회가 외면해온 우상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를 느꼈고 "영원의 관점에서 돈과 명예의 유혹을 벗어난 삶을 산다"는 김종찬목사에게는 존경심을 갖게 됐다. 탁지원 탁지일형제를 만났을 때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아 몇 번이나 물었다. "아버지처럼 비참하게 죽으면 어떻게 할거냐"고.
 

   7명의 목사들을 인터뷰 한 결과,그는 공통적으로 듣게 된 말이 있다고 했다. 오늘의 교회 위기는 '목사들의 탓'이라는 자성의 목소리였다. "한 대형교회 목사님이 설교시간에 이런 얘기를 하셨대요. 왜 살아있는 목사들이 이미 세상을 떠난 추기경이나 불교 지도자들보다도 존경을 받지 못하는지 안타깝다구요. 그들의 가슴 속에는 국민이 있었어요. 그런데 우리나라 목사님들의 가슴 속에는 교인만 있잖아요." "이 책의 출간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다"고 솔직한 심정을 토로한 작가는 "'너희는 세상의 빛'이 되라고 하신 말씀대로 교회의 빛이 아닌 세상의 빛으로 사람들로부터 존경받고 사랑받는 목사님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고 희망했다.
 

   이지성작가는 끊임없이 자신은 '날라리 신자'라고 했다. 어머니는 뱃속에서부터 나실인으로 서원하셨다지만 설교 시간엔 졸고 새벽기도도 안가고 철야기도는 제일 싫다고. 길바닥 돌멩이만 봐도 슬펐다는 무명 시절에는 하나님이 너무 싫어서 하늘에 대고 삿대질을 한 적도 있다고 했다. "하지만 제 책이나 어떤 매체에서도 주님을 부끄러워한 적은 없어요. 출판사에서 기독교적인 내용을 빼라고 해도 전 쓰고 싶은 거 씁니다. 주님이 저를 더 좋아하실 수도 있잖아요?"
 

   기아대책 어린이개발사업 홍보대사이기도 한 그는 자신의 팬클럽 폴레폴레(아프리카 말로 천천히 천천히) 회원들과 함께 서울역 쪽방촌 아이들에게 인문고전 독서교육 봉사를 하고 있다. 어느 목사님의 요청으로 시작한 것이 어느덧 10년째다. 아시아 저개발 국가 및 아프리카에 1백개의 학교,병원을 짓는 것은 그의 벅찬 꿈이다. 그리고 그 꿈의 설레임을 더 많은 독자들에게 나누어줄 참이다. (2011.12.9. 한국기독공보 / 김혜미 기자)

 

 

   출판계 ‘미다스의 손’ 작가 이지성
    “책읽기 쉬운 길은 없다, 힘들게 읽어라”
    20대를 꼬박 책 읽고 글 쓰는데 투자해 ‘한우물 파기’로 어둠의 터널 빠져나와

 

    옛날 선비들은 책에서 길을 찾았다. 살림살이가 좀 궁색해도 양반들은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여기까지는 좋다. 그러나 끼니를 위해 아내가 낮에는 품앗이를 돌고 밤에는 삯바느질을 해야 할 정도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초가삼간에서 고고한 학처럼 양반의 품위를 지켜내고 있는 그를 바라보는 주변의 시선이 달가울 리 없다. 이지성 작가(37)의 삶 역시 한 때, 그 양반 꼴과 다르지 않았다. 지금이야 ‘이지성’이라는 이름 석자가 베스트셀러 작가라는 유명세와 맞물려 있지만, 그의 젊은 날은 희비 쌍곡선 중 하락세의 심연에 콕 박혀 있던 시기도 있었다.


   이지성 작가와 약수동 인근 골목을 누비며 촬영 장소를 물색했다. 세월의 때가 묻은 골목길이 인상적이었지만, 모델 뺨치는 외모에 환한 미소를 머금은 모습과는 어쩐지 부조화! 컬러 풀한 배경에 눈가에 주름잡힐 정도로 파안대소하는 모습이 그의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도 전해지는 듯 했다. 이준호 사진작가


   지옥, 당신에게만 있지 않다!


   혹시 이지성 작가를 모르는 독자에게 그를 소개하자면, 이 작가는 현재 출판계의 미다스의 손이다. <꿈꾸는 다락방>, <여자라면 힐러리처럼>, <스무 살 절대 지지 않기를>, <리딩으로 리드하라> 등은 모두 합쳐서 200만부 이상 판매됐다. 어렵다 어렵다 하는 출판계에 군계일학으로 빛나는 능력자임에 분명하지만, 그가 무명 작가였을 때는 앞서 예를 든 선비의 모양새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전주교대를 나온 그는 청운(靑雲)의 꿈이라기보다 천운(天運)을 얻어 교사가 됐다. 당시 남자 교사가 너무 모자라, 바닥을 기던 그의 학점으로도 교사가 될 수 있었다. 교대에 들어간것 부터가 천운에 비견되는 행운이었다. 남자와 여자를 일정 비율 따로 뽑아 부족한 점수로도 교대에 입학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에게 주어진 운은 거기까지 였다.


   그의 20대는 아버지의 사업 실패에 따른 빚보증으로 암흑의 터널이 시작된 시기다. 대학시절부터 시작한 빚갚기는 교사가 된 후에도 계속됐다.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이씨는 12가구가 화장실을 나눠 쓰는 경기도 성남의 한 빈민가 옥탑방으로 숨어들었다.


   “300만원 보증금에 월 17만원짜리 방이었어요. 시절 좋을 때 우리 집 화장실보다 조금 더 크더라고요. 그 곳에 살았던 3년6개월 중 1년7개월은 그나마 월세도 내지 못했어요. 지옥은내게만 있지 않더군요. 그 곳에서 40대 알코올 중독자인 아들을 70대 노모가 폐지를 주워서 먹여 살리는 모습을 보고 할 말을 잃었어요.”


   사는 꼴이 그랬으니 집을 들고날때 집주인의 눈치를 살펴야 했다. 의대를 다니던 그의 여동생도 학교를 휴학하고 학비를 벌고 있을 때라, 가족 모두가 누구에게 의지할 수 없이 각개전투로 현실과 싸우고 있었다. 사방팔방이 숨막힐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 곳에서 그는 세상의 끝을 봤다.


   평가하기 급급한 세상, ‘평균이하’의 반란


   궁색함을 넘어 비참한 생존의 현장에서 그가 찾은 것은 책이었다. 궁색한 삶에도 책을 놓지 않은 양반의 의지처럼 책에서 길을 찾은 것이다. 그런 모습에 주변 사람들의 힐난이 쏟아진 것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20대를 꼬박 책을 읽고 글을 쓰는 데 투자했어요. 대학시절 수많은 출판사에 내 글을 보냈지만, 우편함에는 반송 우편만 쌓이더라고요. 그렇게 우편물이 쌓일 수록 대학 친구들의 비아냥도 쌓여만 갔죠. ‘왕따’가 됐어요. 교사가 돼서도 글쓰기는 멈추지 않았죠. 동료 교사들도 저를 멀리하더군요. 바른 소리 잘 하고, 책과 글쓰기에 빠져있는 교사에게 호의적인 사람은 없었어요.”


   홀대를 넘어 비난의 말을 서슴지 않았던 그들의 모습은 아직도 상처로 남아 있다. 가끔 그들에게서 오는 칭찬 일색의 이메일이 당황스러운 이유다. 이 씨는 “속이 좁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 내 마음 속 아쉬움을 이해심으로 더 채운 후에나 만나고 싶다”고 잘라 말했다.


   결국 주변 사람이 틀렸고, 이 씨가 맞았다. 마치 책을 놓지 않던 궁색한 양반의 금의환향을보는 것처럼…. 이 씨는 재벌·연예인을 포함해 사람들이 가장 만나고 싶은 ‘1인’이 됐다. 이 씨에게 꼬리표처럼 따라붙던 4억원 안팎의 빚도 이젠 추억이 됐다. 작가로 성공한 뒤 미련없이 교사직을 던졌다. 여전히 자신 명의의 집이 없지만, 조만간 서울 은평 뉴타운의 넓은 평수 집에 전세 입주할 예정이다. 집이 작업실인만큼 자신의 공간을 꾸밀 수 있는 크기다. 구형 기아차 로체를 현대차 신형 그랜저로 바꾼 것도 변화다.


   “강연 등을 하러 가면, 주차관리원이 차만보고 행사장에서 너무 먼 곳으로 안내를 하더라고요. ‘제가 강사인데요!’라고 얘기해도 믿지 않아요. 강단에 서기도 전에 기분부터 상하니 강연의 질도 문제가 생길 때가 많더군요. 차 하나 바꿨을 뿐인데, 그 이후 그런 말을 듣지 못했어요.”


   한우물 파기, 이제 정말 우물을 판다


   우리 사회의 허례는 언제나 우리 옆에 동행하고 있는 셈이다. ‘이지성 작가’란 이름도 적지 않은 사람들에게 허위의식으로 자리잡고 있다. 이씨는 자기한테 책에 관해 조력을 구하는 목소리를 ‘허위의식’의 실체라고 말한다. 그는 책 읽기는 “힘들게 읽으면 된다”고 잘라 말한다.


   “책읽기에 관한 우리 사회의 조력자들은 독서법을 돈벌이의 대상으로 생각합니다. 어른들은 책을 읽지 않고 자기 사색은 없으면서 뭐든지 돈으로 쉽게 얻으려 하잖아요. 저 역시 힘들게 책을 읽어왔습니다. 책 읽기에 쉬운 길이 있다면, 14년 무명 작가를 거치며 힘들게 읽고 처절하게 써왔던 내 자신의 삶을 부정하는 거잖아요.”


   이 씨는 “수천만원을 받는 독서 및 자기계발 프로그램으로 돈 벌 생각이 없다”고 말한다. 이렇게 주장하는 것은 돈의 유혹 앞에 스스로 약해질까봐, 악다구니를 쓰는 것이다. 그리고돈을 버는 대신 쓰는 방법에 대해 목소리를 높인다. 그것은 기부와 봉사에 관해 것이다. 그의 드림 프로젝트는 꿈이 아니라 이미 현실이다. 아프리카 국가에 우물파기 지원과 캄보디아에 학교를 짓는 사업이 벌써 시작됐다. 아프리카와 캄보디아에 2개의 학교를 자비로 설립했고,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과 학교 짓기를 이어가고 있다.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라 했다. 하늘은 그의 책읽기와 글쓰기에 ‘감천’했다. 이제 그의 봉사에 ‘감천’할 차례다.


    “어수선한  집 분위기, 오히려 집중력 키워”


   이지성 작가의 집필실은 집이다. 산만할 수 있는 집안에서 내는 책마다 수백만 명이 열광하는 베스트셀러가 양산됐다. 집안 분위기에 남다른 점이 있는 것은 아닐까? 이에 이 작가는 “아버지는 내가 글쓰기를 시작하면, 세탁기를 돌리신다”며 “그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집중력이 커진 것 같다”고 해석했다. 결국 서툰 목수가 연장 탓하듯, 뜻을 세우면 주변 환경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진실을 그의 글쓰기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란 말이 있다. 세상을 얻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할 일은 뜻을 세우는 것이다. (2011.10.31. 스포츠경향 / 강석봉 기자)

 

 

           나의 20대, 살아있는 채 지옥에 끌려온 것 같았다
           작가 이지성


   <꿈꾸는 다락방>, <여자라면 힐러리처럼>, <스무 살 절대 지지 않기를>, <리딩으로 리드하라> 등 모두 200만부 이상 책이 판매된 베스트셀러 작가 답지 않게 이지성(37)은 여리고 겸손한 사람이었다.


   "안철수 선생님만해도 서울대 나오고, 20대에 의대 교수가 되고, '백신'까지 만드셨잖아요. 시골의사 박경철씨 같은 분도 병원 원장 아닙니까. 이분들에 비하면 저는 (20대의 멘토가 되기에) 자격이 없죠. 다만 그분들이 줄 수 없는 것을, 젊은 친구들이 저한테서 받는 것 같아요."


   고등학교 시절 10등급 중에서 5등급, 남자 여자 따로 뽑던 시절 운 좋게 지방교대(전주교대)에 진학했고, 학점이 좋지 않아 임용고시에 응시할 자격조차 안됐지만 남자 교사가 모자라 또 운 좋게 초등학교 교사가 됐다. 하지만 성인들 사이의 '왕따'라는 게 이런 거구나 싶을 만큼 20대를 외롭게 보냈고, 아버지 사업이 망하면서 교사 월급은 빚 갚는데 다 들어갔다. 작가가 되고 싶었지만 출판사 80곳으로부터 거절을 당하며 14년을 무명작가로 보냈다. 가진 것도, 내세울 것도 없었다.


   이런 이지성이 펴낸 책들에 대한민국 20대가 열광하고,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 등 정재계와 연예계 유명 인사들이 그에게 만나기를 청하고, 2만5천명 회원을 거느린 팬카페도 만들어졌다. 대체 안철수, 박경철이 가지지 못한 무엇을 가졌길래 수많은 20대가 그의 얘기를 들으며 힘을 얻고 있는 것일까.


   지난 달 30일 이지성이 사는 서울 약수동 인근 카페에서 2시간여 만나 내린 결론은 이것이었다. 20대라는 것이 과연 어디까지 힘들 수 있는지 그는 경험해 봤다는 것. 그리고 지하 100층까지 추락하는 좌절에서 그는 올라왔고, 올라오는 방법을 그는 알고 있다는 것. 이 두 가지였다.


   "나의 20대, 살아있는 채로 지옥에 끌려온 것 같았다"


   스무 살 때 이지성의 꿈은 시를 쓰는 것이었다. 200명이 교대를 졸업하면 50~60명은 임용고시에서 떨어지던 시절이었지만 그는 책보고 시만 썼다. "그때는 작가의 운명을 타고난 줄 알았어요. 도서관에 갔을 때 책이 저한테 확 다가오는 느낌 말이죠. 진부한 말일 수 있지만 가슴에 꿈틀거리는 꿈을 믿었죠."


   하지만 시를 써서 수 백번 출판사로 보내도 집과 학교로 반송우편만 수북이 쌓였다. 대학 친구들은 되지도 않는 시인의 꿈만 꾸던 그에게 "'또라이' 중에 저런 '또라이'가 없다"고 비아냥거렸고 후배들은 "저 선배 만나면 큰일난다. 물들면 끝장난다"고 수근거렸다. 늘 외톨이로 지내던 그에게 "불쌍하다"며 위로해주는 친구도 있었지만, 얼마 안돼 그들 역시 멀어져 갔다.


   대학시절 매달 넷째 주 목요일에는 아버지가 빌린 돈 이자를 갚기 위해 하루종일 전주 시내 은행과 새마을금고 등을 돌면서 10만원씩 이자를 돌려 막았다. "너무 비참했습니다. 20대에는 꿈을 믿고 나가면 머지않아 좋은 일이 벌어질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사실 그렇지 않아요. 저 또한 그렇지 않았고요."


   스물 일곱, 그는 운 좋게 초등학교 교사가 됐다. 방과 후면 퇴근도 않고 글만 써대는 그를 보면서 동료 교사들은 '이상한 선생'이라고 불렀다. 아버지의 빚은 더 늘어나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면서 이지성은 12가구가 재래식 화장실을 나눠 쓰는 빈민가 옥탑방에서 살아야 했다.


   "스물부터 스물 아홉까지 처절도 그렇게 처절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계속 추락했죠. 10년 동안 내 꿈을 위해 사람도 안 만나고 미친 듯이 책만 읽고, 글만 썼는데 '재능이 없는 사람에게 세상은 이렇게 가혹하구나' '재능이 없는 사람이 꿈을 꾸려면 완전히 미친 놈이 되는구나'라는 생각만 들었습니다. 저 같이 아무것도 아닌 사람은 밑바닥에 떨어져도 그 밑에 또 지하실이 있어요. 1층, 2층 끝없이 내려가는 거에요. 스물 아홉이 되던 해 12월31일 제 느낌은 초고속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100층에 도달한, 더 이상 갈 데도 없고, 전원도 끊기고, 그런 막막한 느낌이었죠."


   "지옥 같은 곳을 지나고 있다면, 최대한 빨리 지나가라"


   그러던 어느날 그는 문학과 철학 대신 자기계발서를 집어 들었다. "빈민가에 떨어지니깐 살아 남아야 한다는, 가족을 다시 모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은 1%도 없었어요. '문학과 철학은 나의 경제적, 사회적 삶조차 구원하지 못하는 구나' 고민하기 시작했죠. 그래서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인지 파고들었습니다."


   그는 처칠 위인전에서 '만일 지옥 같은 곳을 지나고 있다면 최대한 빨리 지나가라'는 구절을 읽고 무릎을 쳤다. "그땐 하루하루가 지옥이었죠. 그런데 이 말을 보는 순간 '이런 사고방식도 있구나' 했습니다. 그래서 20대에게도 정말 지옥 같은 곳에 있다는 생각이 든다면, 거기에 주저앉아버리면 영원히 지옥이니깐, 하지만 진짜 지옥은 아니니깐, 최대한 신속하게 이동하면 된다고 말하고 싶은 거지요."


   바로 마음의 힘이었다. "제가 재능으로는 다른 사람들 발끝에도 못 미치지만, 꿈을 믿는 마음은 그들이 제 발끝에도 못 미친다고 생각했습니다. '난 분명히 되겠구나' 확신했죠. 만약에 안되면 그건 우주가 잘못된 것이고, 나는 아무 잘못이 없는 거에요. 수많은 위인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이런 자신감을 갖게 됐죠. 뭐랄까. 전교 꼴지인데, 기말고사 답안지를 미리 받은 것 같은 느낌 말이죠. 답안을 외우면 전교 1등이 될 수 있잖아요. 내가 읽은 책에 꿈을 이루는 답안이 다 들어있고, 그대로 하기만 하면 되니깐 말입니다. 인생의 답안을 미리 본 기분이었죠. 그러니 내 꿈이 이뤄지는 것은 시간 문제일 뿐, 이루어진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지하 100층에서 올라오는 방법은 멀리 있지 않다"


   그래서 이지성이 20대에게 권하는 독서법은 '스펙 좋은 멘토'들이 권하는 독서법과 달랐다. "저보다 더 대단한 분들의 독서법은 어차피 그분들만의 성공 방법이죠. 그분들의 독서를 따라 한다고 일반인들이 성공할 수 있는 건 아니에요. 그분들은 어렸을 때부터 자기 할 일은 자기가 체계적으로 알아서 하고, 사회에 나가 일이 맡겨지면 최고로 잘하고, 이런 식으로 성장해온 분들 아닙니까."


   하지만 20대는 성공보다는 좌절하는 삶을, 체계적인 삶보다는 망설이고 주저하고 우왕좌왕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 현실. "대부분의 20대는 자기관리 능력이 없어요. 훌륭한 분들이 문학과 철학과 고전을 권하지만, 자기관리능력이 없는 20대가 섣불리 고전에서 시작하면 머리만 커지고 인생은 더 나빠질 수 있어요. 20대에게 필요한 것은 오히려 위대한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지하 100층에서 올라오는 방법을 제시했다. 첫째, 성공한 사람들의 책을 통해 내 안의 부정적 사고방식을 없애는 것. '내가 과연 할 수 있을까'가 아니라 '내가 이것을 못하면 우주가 잘못된 것이야'라고 자기 확신을 갖는 것이다. 둘째, 자신의 행동에 실제적인 변화를 만드는 것. 누가 봐도 인정할만한 파격적인 변화를 만들어야 한다. 셋째, 기부와 봉사를 하는 것이다.


   "아토피 때문에 대학을 중퇴하고 7년을 방안에서 지낸 친구가 제 책을 보고 찾아왔어요. 책부터 많이 읽게 했죠. 어느날 '영어학원 차리는 게 꿈'이라고 하길래 '그럼 다음달에 차리면 되잖아'라고 했어요. 20대를 방황하다 방통대를 졸업한 한 친구도 찾아와 사업을 하는 게 꿈이라고 하길래 제가 그랬죠. '그럼 다음달에 사업 시작하면 되잖아.' 사업은 돈으로 하는 게 아니라 열정으로 하는 겁니다. 당장 자신의 행동에 실제적인 변화를 만들지 않으면 영원히 변화할 수가 없어요." 이 두 사람은 지금 각각 연매출 3억원의 학원과 50억원대의 사업체를 운영하고 있다.


   기부와 봉사는 왜 중요할까. 이지성은 "자기계발은 자기를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남을 위해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비참하게 사는 사람들을 위해 하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얼마 전 정용진 부회장과의 인연을 끊었다"고 말했다. "참 좋은 분이지만 지난 7월 등록금 벌려던 대학생 등 인부 4명이 이마트 냉동창고에서 사망한 사건에 대해 아무 조치를 취하지도 않는 걸 보며 실망했죠. 정 부회장 뿐 아니라 이름만 들으면 알만한 분들이 만나자고 해서 많이 만났어요. 솔직히 모든 스케줄 중단하고 '대한민국은 지적(知的)으로 망했는가'라는 책을 쓰고 싶을 정도로 분노했습니다. 어떻게 이런 사람들이 대한민국을 이끌고 있나 싶었습니다."


   "20대가 꿈을 추구하는 것은 생존의 문제"


   이지성이 20대에게 던진 화두는 '꿈'이었다. 하지만 그가 얘기하는 꿈은 낭만도, 도전도 아니었다. 생존의 문제였다. "1980년대만 해도 대학 나오면 안정적인 삶을 살 수 있었으니깐, 그땐 꿈이 낭만이었죠. 하지만 지금은 학점 잘 받아 대기업 들어간들 인생이 바뀌나요. 10년 뒤에는 어떻게 할건데요. 과로사하든지, 나와서 피자가게 하다가 망하든지, 오히려 남들처럼 그렇게 사는 게 가장 불안한 삶, 불안한 길 아닌가요. 지금 한국의 20대는 단체로 침몰하는 배에 타고 있습니다. 집단 사이에 묻혀 있으니 그 순간은 안심이 되죠. '100만명이 설마 다 죽겠어'하면서 말입니다."


   이지성이 얘기하는 꿈은 죽지 않기 위한 탈출의 수단이자, 생존 방법이었다. "재능 없고, 돈도 없고,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을수록, 너무 평범하고 열등할수록, 그럴수록 믿을 건 꿈밖에 없습니다. 절실하게 꿈에 매달려야 합니다. 그 절실한 마음이 재능과 스펙을 가진 사람들을 압도하게 되고, 거기에서 기적이 생기는 겁니다. 기적을 일으키는 건 마음이지, 스펙이 아니거든요. 누군가는 침몰하는 배에서 헤엄치고 육지로 나와야 합니다. 그래야 보트라도 끌어다 줄 수 있고, 신고라도 할 수 있는 것 아닌가요. 그래서 꿈은 생존의 문제입니다. 20대라면 가슴에 흐르는 피가 뜨겁잖아요. 딱 한번 뿐인 10년인데, 진짜 딱 10년밖에 없는 건데, 그 귀한 시간 죽을 각오로 치열하게 살면 안되나요. 그게 곧 생존을 보장 받는 최고의 방법 아닌가요." 지하 100층까지 추락해 봤던 이지성이 살아왔던 방식이기도 하다. 여린 줄 알았던 이지성은 참으로 강한 사람이었다. (2011.10.5. 머니투데이 / 대담=유병률 기획취재부장, 정리= 이현수, 최우영 기자 기자) 

 

 

육군6사단 사령부 내에 설치된 항공기 앞에서 이지성 작가


                작가 이지성  
                      똑같이 주어진 시간, 제대 후 인생을 결정한다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 이지성이라는 이름을 입력하면 “‘14년 7개월의 긴 무명작가 시절 동안 내가 꿈을 배반하지 않으면 꿈도 나를 배반하지 않는다’라는 마음가짐으로 살았더니 여기까지 도달했다”라고 적힌 인터뷰 기사가 눈에 들어온다. 친구가 추천한 류시화 시인의 작품들을 읽고 20대에 시(詩)만 썼다는 그는 가능성 없는 작가의 길을 포기하라는 주위의 냉대 속에서도 자신을 꿋꿋하게 믿어온 자기계발의 대가이자 뚝심의 작가다. 초등학교 교사라는 안정된 삶을 접고 불확실한 미래를 선택한 그에게 책은 인생 나침반이자 고단한 몸을 누일 휴식처였다. 밀리언셀러 ‘꿈꾸는 다락방’에 이어 ‘여자라면 힐러리처럼’ ‘스물일곱 이건희처럼’ ‘리딩으로 리드하라’ 등을 발표해 베스트셀러 작가로 명성이 높은 이지성 작가는 군 장병의 인생을 바꿔줄 지혜의 메시지를 또박또박 글을 써내려가듯 전했다. 
 
   ■ 이지성 작가는
   97년 시집 ‘언제까지나 우리는 깊디깊은 강물로 흐르리라’로 데뷔. 2000년부터 약 9년간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했으나 2500권에 달하는 책을 읽고 150권이 넘는 책을 베껴 쓰며 작가의 삶에 올인하기로 결심, 지금까지 50권에 가까운 책을 집필했다. ‘꿈꾸는 다락방’을 통해 100만 권 신화를 달성하면서 초심을 잃지 않고자 나눔과 기부를 실천하고 있다. 현재 1년 365권 멘토링을 통해 성공신화를 달성한 멘티들의 뜨거운 찬사가 회자되고 있다.


   “25살이던 1997년 6월 입대해 99년 8월 전역했습니다. 육군6사단 본부대 행정병이었어요. 행정병이라고 하면 컴퓨터 앞에 앉아 잡무나 본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제 경우는 좀 특별했습니다. 경비소대 소속이었기 때문에 위병근무를 서야 했죠. 부대 정문을 지키려면 체격도 크고 폼도 좀 나야 할 텐데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제가 7시간 반 맞교대를 쉬지 않고 했던 것은 소대원들이 행사에 자주 불려 갔기 때문이랍니다. 열 맞춰 국기게양대로 행진하는 군인들을 본 적 있으시죠? 가운데 서 있는 장병은 1.8㎏이나 되는 국기함을 들고 당당하고도 힘차게 걷지요. 보통 그 일을 한 달 정도 하는데 전 8개월이나 했답니다. 국기함 진짜 무거워요. 할 때마다 어깨가 빠질 것만 같았답니다. (하하) 저를 지키는, 아니 정확히는 국기함을 지키는 호위병들이 제 후임들이었는데 단지 그들보다 키가 좀 작다는 이유로 늘 무거운 국기함을 들어야만 했답니다.”


 오랜만에 군 생활을 떠올리니 가슴 훈훈하게 하는 추억들이 참 많다며 이지성 작가는 대대 전술훈련과 삽 들고 점호했다는 이야기까지 전하고서 기분 좋게 웃었다. 하지만, 솔직히 훈련과 내무반 생활이 전역 후엔 흐뭇한 추억으로 남을지 몰라도 당시엔 엄청난 스트레스일 것이다. 그는 그 시간을 어떻게 보냈을까? 자기계발의 대가답게 대답은 짧고 명쾌했다. ‘미래를 꿈꿔라!’ 더욱 높게 비상할 내가 반드시 디뎌야 할 인생의 계단 중 하나라고 여겼던 것이다.


 “몸이 힘들죠. 왜 안 그렇겠습니까? 한창 가슴도 뜨거울 나이지요. 그런데 뜨거운 가슴을 계속 품지 않고 다들 식히려고만 들어요. 그럼 군 생활의 에너지가 사라집니다. 힘들어도 하루하루가 설레야지요. 나만 하는 것도 아닌데 작은 생각의 차이가 군 생활을 풍성하게 만들지 않을까요? 바쁘다, 바쁘다, 힘들다, 힘들다, 라며 불평 많이 하지요? 뜨거운 가슴을 그대로 간직한 채 미래를 그려보는 겁니다. 혼자만의 시간을 단 1분이라도 만들어서 그렇게 해보면 하루하루 달라지는 나를 그대로 느끼게 됩니다. 모든 군인에게 시간은 똑같이 주어지지만 낭비하느냐, 아껴 쓰느냐, 풍성하게 쓰느냐에 따라 전역 후 인생이 180도 달라집니다. 반드시 명심해야 합니다.”


 가수 휘성과 미스코리아 조은주 등 유명인들의 멘토로 활동하며 드림헬퍼(Dream Helper)라 불리는 만큼 장병에게 전하는 메시지도 희망을 가득 품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호연지기의 삶을 군대에서부터 실천해야 한다고 말했다. 진짜 남자다운 삶, 배울 게 정말 많은 선임, 당당하고 활기차게 생활하는 후임은 그냥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선 위계 문화부터 바뀌어야 한다며 자신의 경험담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어떻게 보면 후임들을 무작정 풀어준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이미 전역했던 선임들이 봤으면 식겁했겠지요. 군기 바짝 들게 해야 하는데 말이죠. 하지만, 전 책임이 따르는 자유를 요구했을 뿐입니다. 그들을 배려한 거지요. ‘뭐 저런 내무실장이 있는 거야’라며 처음에는 다들 혼란스러워했을 겁니다. 내가 고생했다고 해서 그들까지 고생시키는 쩨쩨한 남자가 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유격 훈련 끝내고 돌아오면 누구라도 컵라면에 콜라가 떠오르는 건 당연한 겁니다. 선임이라고 해서 나만 살짝 숨어서 먹진 않았다는 거지요. 전우애가 뭔지 보여주며 더 열심히 으?으? 어깨동무를 하자는 의미였으니까요. 내무반 분위기는 더없이 좋았습니다. 물론 제가 내무실장직을 그만두고 나니 원래대로 되돌아가더군요. (하하)”


 일병이었을 당시 연대 훈련 중 사단지휘소에 설치돼 있던 정수기 물을 겁도 없이 몰래 마셨던 사실, 부대 바깥 작업을 마치고 복귀하던 중 소대장이 건넨 붕어빵 반 토막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었기에 하루 종일 행복했던 기억, 뼛속까지 시린 한겨울 야간 보초 근무 중 군종병이 건넨 유자차와 초코파이에 가슴 뭉클했던 추억까지 더듬어보며 그래도 군 생활 할 만했다고 흐뭇해하는 이지성 작가. 어찌 보면 그에게 군대란 자기계발의 초석을 견고하게 닦아준 인생경영의 첫 장이 아니었나 싶다. 이등병은 20대를, 일병은 30대를, 상병은 40~50대를, 병장은 60~70대를 그려야 한다며 청유형이 아닌 명령형을 선택한 그의 확고한 메시지를 경청하고 있으니 출발점은 같아도 도착점이 다른 우리네 인생을 제대로 설계해야겠다는 경각심이 들었다. 그리고 그는 마지막으로 독서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특히 군인들은 ‘논어’를 반복적으로 읽고 필사해본 뒤 사색해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며 최근 그가 몰고 온 인문고전 독서법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강조했다. 군대에서 머리가 굳는다고 불평하지 말고 굳지 않는 방법을 찾는 데 도움이 되고 싶다는 이지성 작가의 조언은 고기가 아닌 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주는 지혜와 일맥상통해 있었다. (2011.2.11. 국방일보 / 조기준 대중문화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