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 선교의 아버지인 사무엘 즈웜머
요즈음 카이로가 심상치 않다. 민주화 바람이후에 기독교에 대해서 심한 박해의 태풍이 불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은 그 땅에서 17년 동안 사역하였던 한 사람의 선교사를 소개 한다. 사무엘 즈윔머(Samuel Zwemer)는 1867년, 미국 미시간의 홀랜드(Holland)에서 열다섯 자녀 중 열 세번째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개혁교회의 목사였기 때문에 기독교적 토양 속에서 훈련받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여러 형제 가운데에서 생존한 5형제 중 4명도 목회자가 되었으며 누이인 넬리(Nellie)즈윔머는 선교사로서 중국에서 40여년 동안을 사역하였다. 즈윔머가 선교사가 되기로 작정하게 된 동기는 호프대학(Hope College)에 재학중 일 때였다.
그는 4학년 재학 중 일 때에 죤 모트와 헐몬산의 100명을 감동시킨 로버트 윌더의 감동적인 설교를 듣고 7명의 학우 중 5명과 함께 선교사로 자원하였다.
신학교육과 의료교육을 받고난 이후에 즈윔머는 제임스 캔틴과 함께 개혁교회의 선교부에 아랍 쪽의 선교사로 보내 달라고 요청하였으나 거절 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물러서지 않고 스스로 미국아랍선교회(American Arabian Mission)를 조직하여 모금운동을 시작하였다. 쉽지 않는 일이었지만 6,000Km 이상을 여행하며 선교의 도전과 함께 모금 요청을 하였다. 이들의 모금 방식은 특이한 전략을 가졌다. 즉 즈윔머는 캔틴의 모금을, 캔틴은 즈윔머의 모금을 진행하였다. 모금에 대한 어려움을 즈윔머는 “담임 목사님들의 냉담한 반응이 제일 큰 장애 요소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1889년 캔틴은 모금 여행을 마치고 아라비아로 떠났으며 1890년 즈윔머도 뒤를 따랐다. 페르시아만(Persian Gulf)에서의 사역 초기에는 진전도 없었고 반대도 심했다. 그러나 그들은 낙심하지 않았다. 이후에 팀이 나뉘어 사역하게 되었고 독신으로 5년을 고생한 즈윔머는 성공회의 교회 선교회에서 파송된 에이미 윌크스(Amy Wilkes)라는 간호원과 사랑하게 되어 결혼을 하게 되었다.
1897년 미국에서 안식년을 보낸 부부는 이후 페르시아만으로 돌아가 바레인의 무슬림들을 위해서 사역을 하였다. 전도지를 나누어 주고 노방전도를 하며, 가정을 심방하면서 복음을 전했지만 차가운 무슬림의 마음을 녹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후 가정적으로 슬픈 일이 있었다. 1904년 7월 네 살과 일곱 살 난 두 딸이 8일 간격으로 잇따라 눈을 감았다. 이러한 극한 상황 속에서도 결코 하나님을 원망하지는 않았다.
1905년 즈윔머의 아람 선교회는 4개의 기지를 갖게 되었으며, 개종자의 수는 적었지만 용맹스럽게 선교하였다. 이후에 미국으로 돌아가 동원 사역을 감당했지만 마음은 항상 무슬림 땅에 있었다. 결국 1912년 미국 장로교 선교회(United Presbyterian Mission)로부터, 카이로로 옮겨서 전 이슬람 세계를 위해서 선교사역을 하자는 제의를 받아드림과 함께 카이로에서 사역을 시작하였다.
카이로에 도착한 즈윔머는 청년들이 서구로부터 온 지식인 선교사로부터 열심히 배우고자 하는 개방적인 마음을 알았다. 그는 매주 마다 카이로의 아메리카대학에서 강의를 하였는데 학생들로부터 많은 호응을 받았다. 때로는 2만명 가까운 이슬람학생들 앞에서 집회를 인도하기도 하였다.
즈윔머의 사역 가운데 특이한 사건은 한 무슬림청년의 개종 이다. 즈윔머가 배포한 기독교서적을 무슬림 교수가 찢어서 쓰레기통에 버렸는데, 한 학생이 그 찢어진 전도책자를 붙혀서 읽다가 변화를 받아서 기독교로 개종을 하였다.
참으로 하나님의 선교를 알 수 없는 놀라운 일임을 알 수 있다. 즈윔머는 17년 동안을 카이로에 기거 하면서 선교본부를 조성하고 이슬람땅 사역의 교두보를 마련하였다. 이후에 세계를 다니면서 선교회의에 참여하였고, 선교기금을 확보하였을 뿐만 아니라 인도, 중국, 인도차이나, 남아프리카의 무슬림들을 위해서도 사역을 하였다.
즈윔머의 사역은 점점 넓혀져 갔다. 특히 그가 집필한 무슬림 세계(Moslem World)는 영어권에서 무슬림 선교에 가장 권위 있는 책으로 정편이 나있다. 즈윔머의 생애도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 특히 어린 딸과 동료들 그리고 두 아내의 죽음(한명은 1937년, 다른 한명은 1950년)은 참으로 어려운 고통 이었다. 이러한 극한 어려움을 이기고 20여명의 숭고한 신자를 얻었고 무슬림 선교의 아버지가 되었다.
-CP교회연합신문선교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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