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의 은혜/교회법·특별기고

십일조 헌금 논쟁

에바다. 2012. 4. 8. 19:27

조성기 교수는 오래전부터 '십일조를 왜 해야 하나'라는 질문을 던졌고 <십일조는 없다>를 답으로 내놓았다. 3월 29일 그를 인터뷰했다.


 "십일조는 그리스도인과 무관" 
 [인터뷰] <십일조는 없다> 저자 조성기 교수

 강요하지 않는 '연보' 대안으로 제시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교회 오래 다닌 사람이라면 적어도 한 번 이상 들어 본 '말씀'이다. 목회자들은 이 구절을 심심찮게 인용한다. 성경에 명확히 기록돼 있으니 교인들은 '온전한 십일조'를 하려고 애쓴다. 문제를 제기하려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런데 한 신앙인이 감히 질문했고 스스로 연구했다. 1986년 <야훼의 밤>이란 작품으로 이름이 알려진 조성기 교수다. 그는 평신도 공동체 산울교회를 인도하고, 숭실대에서 문예창작을 가르치고 있다. 1991년 <우리 시대의 소설가>로 이상문학상을 받은 소설가이며, 종교심리학을 공부하고 문학과 종교의 접점을 탐색해 <라헤트 하헤렙>이란 작품을 쓰기도 했다.


   그런 그가 오래 전부터 '십일조를 왜 해야 하나'라는 질문을 던졌고, 그 근거를 연구해 <십일조는 없다>는 답을 내놓았다. 조 교수는 십일조의 역사적?성경적 유래부터 신약 시대와 십일조, 한국교회와 십일조 등을 면밀하게 조사했다. 제목이 그렇듯 책은 초대교회 이후 십일조가 필요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문제 제기만 하지 않았다. '연보'를 대안으로 내놓았다. 3월 29일 서울 숭실대 앞 한 카페에서 조성기 교수를 만났다.


   책에서는 날카롭고 강한 느낌을 받았지만 직접 만나 본 그는 부드럽고 온유한 분위기를 풍겼다. 거슬릴 만한 질문에도 그는 하나하나 차분하게 설명했다. 다음은 그와 나눈 일문일답이다.

     
   조 교수는 십일조 문제로 죄책감을 갖는 이들이 많다고 했다. 그들에게 조금이나마 자유를 주고 싶다고 했다. ⓒ뉴스앤조이 성낙희


   - 문학 활동을 오래 해 왔다. 지금까지 낸 작품들이 거의 소설이다. 한국교회의 십일조 생활을 비판한 <십일조는 없다>를 썼다는 것이 의외다. 십일조에 대한 문제의식 어떻게 갖게 됐나.


   대학 때 처음 선교 단체에서 신앙생활을 했다. 당시 금액으로는 십일조 이상의 헌금을 했다. 십일조라는 말을 듣지도 못했을 때였다. 졸업 후 아내와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다. 전업 작가라서 수입이 일정하지 않았는데, 1986년께 인세 800만 원이 들어 왔다. 궁핍한 살림에도 불구하고 십일조 80만 원를 준비하고 있는데 아내가 권사 취임하면서 500만 원 작정 헌금을 했다고 하더라. 그때 십일조에 대해 새삼 질문하게 됐다.


   - 십일조와 한국교회의 관계가 매우 깊다. 전도할 때 사람들이 "교회 가려면 십일조 내야 하지 않느냐"고 할 만큼 뿌리가 깊다. 이렇게 된 이유를 무엇으로 보나.


   한국 기독교 초기 선교사들이 십일조를 많이 강조했다. 또 오순절 계통의 교회가 성장하면서 그것이 확산됐다. (목회자들이) 십일조 안 하면 사업이 망할 것처럼 이야기했다. 샤머니즘 문화와 사람들의 두려움이 만나면서 문제가 커졌다. 목회자들이 십일조를 강요하고 세뇌당한 사람들은 사업이 잘 안 되면 '십일조를 안 해서 그런가' 하는 생각을 한다.


   - 한국교회의 다양한 문제 가운데 십일조를 꺼내 든 이유는.


   교회의 다양한 문제들이 거의 모두 돈과 관련돼 있다. 십일조를 들여다보면 그런 문제들과 여러 경로로 연관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교회 다니지 않는 사람들은 십일조를 매우 껄끄러워 한다. 전도가 잘 안 되는 중요한 요인 중 하나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 중에는 십일조 문제로 죄책감을 갖는 이들도 있다. 어떤 사람은 십일조를 잘 하지 못해 마음이 힘들었는데 책을 읽고 해방감을 느꼈다고 고마워했다.


   - 문제는 십일조 자체보다 십일조를 어떻게 활용하는가에 있는 것 아닌가. 잘 활용하면 되지 없앨 필요까지 있다고 보나.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십일조의 유래다. 십일조는 토지소산 가운데 10분의 1을 내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소산만이 아니라 사업 투자비용 등 이미 10분의 1 이상을 헌금한다. 중요한 것은 예수 부활 이후 신약성경에 십일조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인들 자체가 이제는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이라고 선포하고 있다. 예루살렘교회에 흉년이 들었을 때 바울이 연보를 모았다. 의무처럼 십일조를 내라고 할 수 있는데 바울은 교인들에게 마음에 정한 대로 하라고 했다.

     
   조 교수는 연보를 대안으로 내놓았다. 신약 시대 이후 십일조는 이미 폐지됐고 연보로써 어려운 이웃을 도와야 한다고 했다.


   - 십일조에 대해 역사적 유래와 교회사적 배경 등을 폭넓게 연구했는데, 결론은 지금은 십일조는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인가.


   구약의 것은 모든 소득이 아니라 토지소산의 십일조다. 어떤 목회자가 "아무개 집사, 30억짜리 땅 팔았다며, 3억 십일조 할 거지?"라고 하더라. 이것은 토지소산이 아니잖나. 이레니우스 교부 등 초대교회 지도자들은 이미 교회의 헌금과 구약의 십일조는 관계없다고 선포했다. 지금도 외국에서 십일조를 강조하는 교회는 많이 사라졌다. 세계에서 보편적인 것인데 한국에서만 특별한 이야기인 듯하다. 십일조는 그리스도인과 무관하다. 자유로움을 가지고 마음에 정한 대로 연보를 하면 된다.


   - 목회자들 중 십일조의 복을 믿는 이들도 있는데.


   (목회자들은) 어려서부터 그렇게 교육 받았기 때문에 확신이 됐을 것이다. 교회 운영 상 어쩔 수 없이 강조하기도 한다. 이미 그렇게 운영하는 교회는 바뀌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신학생들이 10가정만 얻으면 교회 개척할 수 있다는 '십일조 프리미엄' 생각만 버려도 많이 바뀔 것이다. 교회 개척과 목회와 관련하여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 연보를 대안으로 제시했는데, 십일조에서 연보로 바뀌면 어떻게 달라지나.


   바울이 제시한 것처럼 소득의 10분의 1이든 20분의 1이든 자유롭게 연보로 해야 한다. 하나님은 돈이 필요한 분이 아니다. 연보로써 어려운 이웃을 도와야 한다. 적어도 십일조 강박관념을 없앨 수 있다. 마음의 자유를 줄 수 있다.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아니라 이웃에게 나누는 삶이다. 십일조 개념을 극복하는 것이 목표다. 세월이 좀 흐르면 이 책에서 말한 내용은 보편화할 것이다. (2012.4.1.뉴스앤조이 / 성낙희)
 
 
                  십일조는 공동체를 세운다 
                          느헤미야가 세운 헌금의 원리 
 
   김범수 목사(시애틀 드림교회)

 

   십일조 논쟁과 느헤미야


   십일조 헌금 논쟁이 뜨겁다. 어떤 이는 성경적 근거가 분명하지 않은 것도 문제지만 수입의 1할을 꼬박꼬박 교회에 바치는 십일조 관행이 세계에서 드문 현상이란다. 십일조의 용도도 제사장과 성전을 위한 것이 아니라 구제를 위해 사용되었다고 한다. 반대편에서는 성경적 근거가 충분하다고 보며 오히려 철저한 십일조 헌금이 한국교회 부흥의 원동력이 되었다고 옹호한다. 둘 다 맞는 말이다. 성경적 근거는 있지만 대략적인 언급만 있을 뿐 세부적인 사항은 불명확하다. 그러나 동시에 먹을 것 입을 것 아껴서 하나님나라 위해 힘껏 드리는 정성은 다른 나라 교회들이야 어찌하든 비교할 필요 없이 우리 교회의 미덕으로 삼고 권장해야 할 덕목이기도 하다.


   나도 안다. 십일조 논쟁의 핵심이 헌금하는 돈이 아까워서가 아닌 것을. 십일조를 거두어 엉뚱한 데 사용하고 회계도 불투명한 한국교회의 모습을 보며 십일조를 희생양으로 삼는 것이다. 걸걸한 홀리 보이스로 깡패처럼 위선하며 돈을 밝히는 삯꾼 부흥사들이 십일조, 말라기, 축복 축복 노래를 불렀기에 나도 그게 얄밉다. 교회를 전면적으로 갱신하려면 그 삯꾼들이 밝히는 십일조부터 바로잡아서 교회를 세워야겠다는 심경에 공감한다. 교회들의 실망스런 모습을 보면 여태 드린 헌금도 돌려받고 싶다는 심정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성경에 십일조에 관한 내용이 정말 없는 것일까? 그 십일조는 목사 사례비가 아닌 구제하는 용도로만 사용되어야 했을까? 모세오경에 십일조가 기록되었다고 해서 신약을 사는 우리가 수입의 10% 라는 구체적인 기준까지 그대로 따라야만 하는 것일까? 이 논의는 이미 다른 분들이 다루셨기 때문에 반복할 필요는 없다. 대신 내가 십일조 드리는 이유로 삼는 '공동체를 세우는 십일조' 정신을 이야기하고 싶다. 느헤미야서에 10장에 나오는 이야기다.


   느헤미야의 십일조


   모세오경에는 십일조에 대한 내용이 나오기는 하는데 성전을 섬기는 제사장들을 위한 사례비 성격의 헌금인지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기 위해서 하는 모금인지가 불분명하다. 역사서에서는 십일조가 그다지 등장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율법이 주어진 뒤 이스라엘이 지키지 않은 까닭이 크다. 이스라엘이 철저히 십일조를 드렸다면 요즘 말로 하면 본봉의 십일조인지 보너스까지 더한 금액의 십 퍼센트인지, 혹은 세금 떼고 난 뒤의 총소득의 십일조인지 갖가지 시행 세칙이 분명하게 나오고 그 논쟁과 사례들이 이스라엘 역사 구석구석에서 당연히 발견되었을 테니 말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십일조는커녕 하나님까지 저버리고 멸망을 맞게 된다.


   십일조는 포로기 이후에 다시 등장한다.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이 에스라를 통해 율법을 듣는 장면은 감격적이다. (느헤미야 8장) 이때 이들은 율법을 읽고 당장 초막절을 지키기로 한다. 성경은 놀랍게도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수아 이후 한 번도 초막절 절기를 지키지 않았다고 기록한다. 율법에 명백히 기록된 삼대 절기중의 하나인 초막절도 지키지 않은 이스라엘이라면 가난한 사람에게 구제를 하였든 혹은 레위인과 제사장과 성전을 보살폈든 자기 수입을 기꺼이 나누어 주었을 리가 없다.


   개심한 이스라엘이 율법을 지키겠다며 하나님께 서약을 하는 장면은 더욱 극적이며 출애굽 후 시내산에서의 언약을 연상시킨다. (느헤미야 10장) 이 단체 서약에서 이방인과 통혼하지 않으며 안식일을 지키겠다는 다짐에 이어 첫소산을 드리고 십일조를 드리겠다는 약속이 이어진다. 이스라엘 성읍을 다시 세우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하나님의 계획대로 참이스라엘 백성이 모인 율법 공동체를 만들어 보자는 결의가 충만했다. 그러려면 레위인과 제사장을 세우고 성전을 돌보도록 그들의 생계를 돌봐주어야 한다. 이스라엘은 이때 다시 십일조를 선택한다.


   공동체를 세우는 십일조


   느헤미야는 율법을 따르되 문자 그대로 따를 수 없었다. 여호수아가 요단강을 건넌 때로부터 수백 년의 시간이 흘렀을 뿐 아니라, 북이스라엘이 궤멸되면서 열두 지파와 레위 지파로 이루어진 지파 중심의 체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이렇게 잿더미에 시작하는 그들에게 성전의 제사 기능과 율법 교육을 정상화시키기 위해서 십일조가 필요했다. 그리고 이 십일조는 율법의 정신에 따라 이스라엘 공동체를 세우는 데 초점이 맞춰진 실용적인 선택이었다. 현대 교회는 레위기의 십일조보다 느헤미야의 십일조를 더 주목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우리 교회가 시작하면서 세운 원칙 중의 하나도 등록 교인의 경우 십일조를 드리는 것을 약속하는 것이다. 율법이라서 억지로 십일조를 드리는 것도 아니고, 복 받기 위해서도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고 나와 후손들에게 지속적인 말씀이 선포되도록 하기 위해서 십일조를 드린다. 십일조를 모아 넉넉하지는 않아도 목회자 사례로 드리고 교회 운영비를 감당하며 사역을 뒷받침한다. 대신 다른 명목의 헌금은 거의 하지 않아도 되었다. 첫소산과 십일조만 드려도 공동체를 세우기에 충분하다고 믿었던 느헤미야처럼 우리도 그렇게 하나님의 교회를 몸과 시간과 재정을 드리며 세워 나간다.


   10%는 적은 금액은 아니지만 맘만 먹으면 할 수 있는 정도의 부담이다. 분명한 목적을 위해 자발적으로 드리는 십일조는 더 이상 굴레나 짐이 아니게 된다. 십일조를 기꺼이 드리며 하나님나라를 세우는 데 동역하는 진성 교인들이 많은 한 하나님의 교회는 언제든지 재건될 희망이 있다. 2500년 전 이스라엘을 재건했던 느헤미야 선배에게서 십일조를 배우는 이유도 이것이다. (2012.4.4.뉴스앤조이)

 


♡주의 사랑으로 오늘도 행복하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