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이 가르치신 기도(1)<상>
우리는 1,2장에서 예수님의 기도생활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다. 예수님의 삶 전체는 기도로 시작하여
기도로 끝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누가는 기도 없이
살지 않으신 예수님을 우리 눈 앞에 분명하고 명확하게
소개한다. 예수님은 멸시와 천대받는 많은 사람들, 가난한 자,
고아,과부,죄인들, 창녀,세리 등 사회에서 버림받은 자들을
진정 따뜻한 온정과 사랑으로 대하셨다. 그래서 어느
복음서에서 보다도 누가복음에 예수님과 이러한 죄인들과
만남이 두드러지게 부각되었다. 어떻게 보면 예수님은
사람들이 대하기 가장 부드럽고 부담없는 분이었다.
한번 예수님을 만나면 그의 사랑, 용서,온정의 열기에
돌같이 단단하던 마음이 녹아 그 누구도 변화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극히 평법해 보이면서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능력을
누구보다도 많이 지니셨던 예수님이 철저하게 기도하시는
분이었음을 누가는 독자들에게 각인시키고 싶었다.
지성인 누가는 기도의 깊은 세계에 사신 예수님을 이해
하지 못하면 그의 인격과 사역을 바로 평가하고 이해하기
힘들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누가는 예수님이 기도의
사람이었음을 부각시키는 것으로 그의 임무를 다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행여 독자들이 예수님이시니까 그렇게
기도할 수 있었겠지 하는 그릇된 생각을 가질까, 그는
두가지로 예수님의 기도생활을 조명했다.
첫째, 예수님의 기도를 경건 생활의 맥락에서 제시했다.
누가는 경건한 싱앙인들은 기도하는 사람이라는 중요한
사실로 그의 복음서를 시작했다. 그래서 누가복음 앞부분에는
기도하는 경건한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기도하는 사가랴와
그의 아내 엘리사벳에게 세례요한의 탄생은 기도 응답이었다
(눅 1:13), 사가랴가 성소에 들어가 하나님 백성들의
기도를 상징하는 분향을 할 때 온 백성들은 기도하고 있었다
(눅 1:10), 예수님이 난지 40일 되어 예루살렘에 올라가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는 예식을 행할 때, 이스라엘의 위로,
곧 구원을 기다리며 기도하는 경건한 시므온이 있었다
(눅2:25), 결혼 생활 7년만에 남편을 사별하고 80살이
되기까지 과부로 혼자 살면서 성전을 떠나지 않고 밤낮으로
기도하던 선지자 안나가 있었다(눅2:37).
누가는 이렇게 기도하는 경건한 사람들을 기록하면서 예수님'
의 기도행활도 아울러 묘사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예수님의
기도생활은 경건한 사람들의 기도생활의 연속임을 보여주어
주님을 믿는 경건한 사람들이라면 기도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둘째, 더욱 적극적으로 기도생활에 대한 철저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기도해야 할 것을 친히 가르치신 내용을
기록함으로 기도생활을 떠난 믿음생활은 있을 수 없음을
분명히 한다. 그래서 그는 아주 구체적이고 체계적으로
기도생활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기록하였다.
간청하는 기도의 비유(눅11:5-8),
불의한 재판관과 과부의 비유(눅 18:1-8)
교만한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 비유(눅18:9-14)
재림을 준비하는 기도의 삶(눅 21:34-36)등이 누가복음에서
독특하게 등장하는 기도의 가르침이다. 본장에서는 이들 내용
중 강청하는 기도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 다음 장에서 그
나머지를 생각해 보다.
아래 본문은 1절에서 기도의 본보기인 예수님의 기도를
2-4절에서 기도의 매용을 , 5-8절에서 기도의 방법을, 9-13
절에서 기도의 응답을 각각 다루고 있다. 우선 본문의
내용을 보자.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주옵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우리에게 날마다 인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고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 하라 또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벗이 있는데
밤중에 그에게 가서 말히기를 벗이여 떡 세 덩이를 내게
빌리라 내 벗이 여행 중에 내게 왔으나 내가 먹일 것이 없노라
하면 저가 안에서 대답하여 이르되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소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 하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됨을 인하여서는 일어나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강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소용대로 주리라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너희중에 아비 된 자 누구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면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면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눅 11:1-13)"
본문에 비추어 기도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종종 만능기도니 하늘의 보좌를 뒤흔드는 기도니 하는
말을 듣는다. 심지어 어떤 성도들은 기도를 도깨비 방망이인 양
생각한다. 이러한 인식은 참으로 잘못된 기도관에서 비롯된
것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본 예수님의 기도 모습은 이와는 다르다.
예수님은 인기 절정기에도 특별히 시간을 내셔서 기도하셨다.
일이 안 될 때만 기도하신 것이 아니라 성공과 출새의 절정에 이를
때에도 기도하신 분이다. 주님은 세상의 그 무엇보다 하나님과
기도의 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최상의 복으로 여기셨다.
이렇게 기도하신 예수님에게 기도는 원하는 것을 하나님의
주머니에서 꺼내는 열쇠나 원하는 것을 만들어내는 도깨비
방망이도 아니다. 또한 나쁜 것은 피하고 좋은 것만 누리게 해주는
마술의 공(magic ball)도 아니다. 기도를 도깨비 방망이나 마술
공쯤으로 보는 것은 인본적이고, 토석적이며 샤머니즘적인
기도관을 가지고 있는 성도들을 종종 본다. 그러나 전정한 기도는
주님의 주권적인 뜻을 구하고 찾는 것이지 내 욕망과 주장으로
하나님을 설득하고 감동시켜 내가 원하는 것을 주님으로부터
얻어내는 것이 아니다.
교회 역사 속에서 유례없는 부흥을 이룩한 교회가 한국 교회이다.
'한국 교회'하면 상표처럼 따라 붙는 표현이 있다. 그것은 한국
교회는 기도하는 교회라는 말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한국
교회의 부흥은 순교와 기도의 결과라고 한다. 사실 그렇다,
한국 교회가 가난, 일제 치하의 수난과 6.25 전란의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가난하지 않기 때문에 기도의 열정이 식어가는 것 같다.
삶의 외형적인 수준이 높아지면서 기도의 눈물, 간절함과 애절함이
점점 더 사라지는 것 같다. 기도가 있다면 특별한 기간에만 국한된다.
입시철만 되면 교회는 절과 같이 기도하는 사람들로 가득 찬다.
그러다가 입시철만 지나면 기도의 열기가 언제 그랬느냐는
식으로 싹 사그러든다.
우리의 잘못된 기도관을 수정하고 바른 기도관을 제시해 주는 것이
위에 제시된 분문의 가르침이다. 오랫동안 친히 기도하시는 예수님을
보아온 제자들이지만 한번도 그의 기도를 본받지 않다가 마침내
이 본문에서 예수님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달라고 요구한다.
예수님은 본문에서 자신이 친히 기도하는 내용과 기도하는 방법을
제자들에게 가르치셨다.누가복음 11장 1-4절까지 무엇을 기도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말씀한다. 마태복음 6장에도 주기도가 나오는데
누가의 주기도문보다 상세하고 고정된 틀을 가지고 있다.
기도의 내용과 관련하여 먼저 알아야 할 것은 기도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자녀만이 할 수 있는 특권이라는 것이다. 기도할 때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을 향하여 아버지라고 부른다. 이것은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인 예수님의 기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누가복음 10장 21절에는 예수님의 기도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서 예수님의 하나님을 아버지로 호칭한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것은 그는 영원히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이다.아들 예수님과 관련하여 하나님 아버지가 항상 아버지였듯이
예수님이 인간이 되어 오시기 전에도 그 후에도 그는 여전히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예수님은 본성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자격이 있었다.
그러나 신자들이 하나님을 아버지라 고 부를 수 있는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공로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구원받은 자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진 특권이다(요 14:12-14;
15:16). 이 특권이 십자가 공로로 인한 것임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때마다 마음에 기쁨과 즐거움을 경험하게 된다.
많은 신자들이 따로 다른 기도를 드리지 않더라도 하나님 앞에 나와
"아버지!"하고 부르기만 해도 근심과 걱정이 사라지는 경험을 한다.
만일 신자가 이론적으로만 자신을 하나님의 자녀로 알고 있고
실제로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기를 꺼린다면
그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닐 가능성이 있다.
그러면 바른 기도와 내용은 무엇인가?
그것은 주기도를 자세히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아버지여,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하시며, (당신의) 나라가 임하게 하시며,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날마다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자를
용서 하는 것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소서" 이다. 이것은 다섯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 보자.
첫째,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해달라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들이 아버지를 닮은 삶을 통해서 세상
사람들 앞에 거룩하게 인정 받고 높음받는 것을 말한다. 즉 자녀들의
바른 삶을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가 영광을 받으시는 것을 말한다.
세상 사람들이 신자들의 삶과 행실을 보고 하나님을 비난하고 욕하고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께 영광과 존귀를 돌리는
것이다(마5:16)
둘째 내용은 첫번째와 관련되어 있다."당신(하나님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게 하옵소서" 라는 기도는 하나님께서 그의 통치를
나타내시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나라는 자녀들의 삶을 통하여
이루어진다.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할 때.
하나님께서 그의 통치를 임하게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나라의
도래는 사탄 나라의 세력을 꺽고 무너뜨린다. 사탄 나라의 세력을
꺽을 수 있는 힘은 오직 주님에게서만 온다(눅 11:21,22).
그리고 사탄의 부하인 악령들이 다스리던 자리를 하나님의 성령이
차지하게 될 때 하나님의 나라는 신자 개인 안에서 이루어지기
시작한다(눅 11:25,26)
셋째, 오늘 하루 사는 데 필요한 양식을 그날에 달라는 것이다.
앞에서 하나님나라를 위해서 기도하고 그 다음 우리의 필요한
양식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너희는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는 말씀이 실천방안이다
(마6:33). 먹을 것이 없이 굶어 죽는 사람이 하나님나라를
추구할 수 없다. 하나님의 영적인 사업에 전념하기 위해서는 하나님
께서 물질적인 삶을 책임져 주셔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전적으로 책임져 주지 않는다면 우리가 어떻게 의식주를 걱정하지
않고 하나님나라의 실현을 위해서 힘과 정성을 다할 수 있는가?
-다음장에서 뵙겠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로 돌아가자에서-
♡주의 사랑으로 오늘도 행복하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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