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이 가르치신 기도(1)<하>
넷째는 우리의 죄를 용서해 달라는 것이다.
하나님께 죄를 용서를 구하는 우리는 어떤 자들인가?
자기에게 죄를 지은 자를 너그럽게 용서해 주는 우리이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를 지은 자를 용서하는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한다.하나님의 자녀들의 삶에서
죄 용서의 삶이 응답 받는 기도의 전제 조건임을 보여준다.
내가 형제들과 세상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지 않으면서 하나님
아버지께 나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할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 나는 사람들이 내게 저지른 잘못을 용서하지 못하고
용서할 수 없고 용서할 마음도 없지만 그래도 나의 죄를
용서하옵소서" 하고 기도할 수도 없다.
기도하는 하나님의 자녀는 사람들에게 해를 주는 사람이 아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피해와 상처를 받는 사람이다. 사람들에게
피해와 상처를 받을망정 자기는 자기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지 아니하는 사람이요 나에게 해를 끼친 자를
너그럽게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진 자이다.
다섯번째는 우리를 시험에 들지 않게 해 달라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시험은 사탄이 하나님의 자녇르을 유혹하여
하나님을 시험하고 되를 범하게 하는 각종 음모를 말한다.
마태는 "다만 악에서 구원하옵소서" 라는 항목을 덧붙였다.
여기서 악은 추상적인 악이 아니라 악한자,곧 샅을 의미한다.
누가는 사탄의 유혹과 음모에 빠진 사람들을 11장에서 들고 있다.
이들은 예수님의 구원 사역을 곡해하고 반대하는 종교지도자들이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능력 곧 성령의 역사를 힘업어 귀신을
쫓아내고 있는데, 그들은 예수님께서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주장했다(눅 11:15) 이들은 예수님을
대적하고 예수님의 원수 사탄 편에 선 자들이다.
이들은 예수님을 대적하고 반대할 때 추호도 자신들이 사탄의
편에서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예수님의 눈에 그들은 사탄의 유혹에 빠져 자신도 모르게 이용당하는
사람들이었다. 사탄은 광야 시험에서 예수님을 유혹하여 그를 은연중
자기 수하의 종으로 만들고자 했다. 에드워드 슈바이처에 따르면
누가에 나오는 주기도의 내용들은 예수님의 광야 시험에서
등장하는 세 가지 유혹과 관련되어있다. 빵(돌로 빵을 만들어 먹어라).
세상 나라의 권세와 영광(내게 절하라), 그리고 자기 과시(성전에서
뛰어 내림)가 그 세가지이다(눅 4:1-13) 주기도에서는 이 세가지가
역순으로 기도의 내용으로 등장한다.
자기를 영화롭게 하고 자기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의 삶이다. 사탄이 제고하는 세상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삶의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 실현이 삶과 기도의 목적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떡을 위해서(의식주를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가야 할 자들이다. 떡은 우리가 만들어
먹어야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 세가지 유혹을 다 이기고 승리하셨다.
이 세가지 사실과 관련하여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
하는 기도의 내용을 생각해 보자. 사탄이 예수님에께 던진 세가지
유혹에 빠지는 것이 우리가 들어가지 말아야 할 시험이요, 여기서
빠져나가는 길이 예수님이 기도의 내용으로 말씀하신 세가지 기도이다.
하나님의 자녀는 자기의 이름과 영광을 위해 살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산다. 세상 나라의 권세, 주와 영광을 위해 살지 않고
하나님나라의 실현을 위해서 산다. 의식주를 위해 살지 않고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남의 일에 전념하며 산다.
주기도에 반영된 기도의 내용을 간단하게 말하면 순종적인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 곧 하나님의 뜻인 내 인격, 가정, 교회와 사회에
이루어지게 해 달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실천하는 것이
기도하는 말이다. 우리의 고민, 염려, 걱정은 하나님께서 맡아서
처리해 주시기 때문에 이런 것들을 염려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우리의 인격, 성품에 심기는 이 일을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 이것이 참 기도이다. 나의 변화되는 삶, 하나님께
가까워지는 것이 바로 기도의 본질적인 내용이어야 한다.
세상에는 힘의 원리가 있다. 물이 높은 데서 낮은 데로 흐르듯이
기도도 아래 있는 우리가 높이 계신 하나님께 영향을 끼치는
것이 아니고 보좌에 계신 하나님이 낮고 유한한 우리에게 영향을
주고 변화시키는 것이다. 그러기에
기도는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 보좌를 움직여 우리를 주님이
원하는 모습으로 바꾸는 방편이다.
바른 기도는 이 점에서 철저하게 신본적이다.
주님의 목적이 나의 목적, 주님의 생각이 나의 생각,
주님의 주장이 나의 주장 되게 하는 것이 바른 기도이다.
진정으로 하나님의 주권을 말하는 사람은 기도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을 구하는 것이 바른 기도의 내용이라고
했는데, 그러면 어떻게 이뜻을 구하는 기도를 해야 하는가?
그 방법에 대하여 가르치는 것이 누가복음 11장 5-8절에 나오는
강청하는 비유이다. 어느날 한 밤중에 어느 집에 친구가
찾아왔다. 이런 일은 이스라엘에서 흔히 있을 수 있다. 더위를
피해서 사람들이 주로 밤중에 여행을 하기 때문이다. 손님을
갑자기 맞은 이 집은 너무 가난해서 손님을 대접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사람들은 보통 갑자기 오는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서 신선한 빵 세덩이를 준비해 놓는다. 그러나 이 집은
너무 가난해서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친구 집에 빵 세덩이를
구하러 갔다. 그러나 친구집에 찾아가서 빵 세덩이를 구할 때,
이웃집 친구는 이미 온 가족이 잡을 자고 있어서 일어나 주려고
하지 않았다. 온 가족이 방 하나에서 살고 있으니 일어나 요구하는
빵을 주는 것은 정말로 성가신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일어나지 않으려고 했다.
침상에 있는 친구는 사실 손 대접의 미덕이 없는 못된 사람이다.
그 당시 어느 한 집의 손님은 온 마을의 손님이기 때문에 손님
대접을 위해서 먹을 것을 빌리는 것은 마음의 미덕이었고,
이웃은 이때 손님 대접에 필요한 것을 빌려주어야 할 책임이
있었기 때문이다.그러나 이웃집 친구가 손님 대접의 미덕을 잘
실천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손님을 맞은 사람은 강청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이웃에게 원하는 것을 얻는 방법은 이웃집
사람이 더 이상 견딜 수없어 일어나 줄 때까지
강청하는 방법밖에는 없다. 그래서 그가 일어나 줄 때까지 소리를
지르고 대문을 계속 두드려 빵 세 덩이를 얻어낸 것이다.
이 비유를 통해서 예수님은 주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를 할때와
이와 같이 강청하는 기도를 해야 함을 기르친다.
우리는 우리의 문제를 놓고 기도할 때는 눈물 콧물을 흘리며
있는 정성을 다 들여 기도하지만, 주님의 뜻을 구할 때는 간절함
이나 애절한 마음이 없이 기도하는 경향이 있다. 이 비유의 가르침에
비추어 볼 때 이러한 간절함이 없는 기도는 잘못된 기도이다.
우리가 왜 강청하는 기도를 해야 하는가? 주님이 못된 이웃집 친구
같은 분인가? 우리의 기도를 받으시는 하나님은 전혀 다르신 분이다.
기도를 하지 않으면 아주 섭섭해 하시는 아버지이시다. 하나님은
차음부터 당신이 우리에게 주시기로 계획하신 것을 주고
싶어하시는 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하나님은 기다리며 강청하는 기도를
하게 하시는가? 그것은 기도 응답의 지연을 통하여 진정한 기도를
드리게 하고 하나님의 뜻만 사모하는 사람으로 만들며, 기도 응답
보다 기도를 통한 하나님과 가귐의 교제에 더 초점을 두도록 하기
위하심이다. 강청하는 기도 과정을 통하여 점점 더 주님의 원하는
사람으로 변화된다. 주님은 너무 신속한 응답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버릇없는 자식이 되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따라서 강청하는 기도를
히도록 기도 응답을 지연시키신다. 이 과정을 통하여 우리는 구하는 자.
찾는 자, 문을 두드리는 자가 된다. 다시 말해서 기도하는 것이 우리의
본성과 본질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끈질긴 기도를 통하여 자식된
우리가 영구적으로 사귀기를 원한다.
주님의 뜻에 따라 강청하는 자세로 기도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어떤 응답을 하시는가? 누가복음 11장 9-13 절 말씀이 기도 응답에
대하여 가르치고 있다. 본 절은 기도 응답에 대하여 일반적인 가르침을
내 놓는다.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린다는 면에서 바로 앞에서 소개된
강청하는 기도와 다를 바가 없다. 핵심은, 이렇게 간구하는 자들에게
응답이 있다는 것이다. 구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가 찾고 문을 두드리는
자에게는 열리는 것이 기도의 응답이다. 한두 번 구하는 것이 아니고
구하는 것이 천성이 된 사람이다. 그래서 구하는 자마다, 한두 번 찾는
것이 아니고 찾는 것이 직업이 된 사람이다. 한두 번 문을 두드리는
것이 아니고 문을 두드리는 것이 습관이 된 사람이다. 바로 이것이
강청하는 기도이고 바로 이들에게 응답의 복이 주어진다.
누가복음 11장 11-13절은 기도 응답의 성격을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먼저 부모가 자식에게 주는 것을 예로 들고 있다. 자식이 좋은것,
즉 생선이나 알을 구할 때 부모가 나쁜것, 뱀이나 전갈을 주겠느냐는
것이다.몰론 그런 부모는 없다. 나쁜 부모라도 자식들에게 좋은 것을
주고자 하는 것이 부모의 마음이다.하물며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마음은 더욱더 그러하다는 것이다. 간구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인간 부모와 비교되지 않게 더 응답하신다(눅11:13)
하나님 아버지께서 기도 응답으로 주시는 선물은 무엇인가?
마태는 막연하게 좋은 선물이라고 말하고 있다(마7:11), 누가는
그의 이방 독자들을 위해 구체적으로 최상의 선물을 성령님이라고
밝힌다. 이미 앞에서 보았듯이 예수님이 세례 시에 기도할 때 성령이
그 위에 임했다(눅3:21) 초대교회가 기도할때 성령이 교회 위에
임했다(행 2:1-4).
성령이 왜 최상의 선물인가? 이에 답은 성령으로 충만한 예수님의
삶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성령이 예수님의 모든삶의 원동력이었다.
그의 복음 선포, 기적의 사역, 죄인들의 용서와 그들과의 교제, 기도생활,
사탄 세력과 영적인 싸움에서 성령의 역할은 예수님의 삶에서
절대적으로 중요했다. 성령의 역사를 떠나서 예수님의 메시아로서
구속의 완성을 이룬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 성령의 중요성은
구원받는 성도에게 대등하게 중요하다. 성령의 선물이 수반되지 않은
구원은 있을 수 없고 성령의 계속적인 역사 없이 신자 속에 주어진
구원은 완성될 수 없기 때문이다.
성령의 선물을 받는 것이 구원의 본질적임을 가장 분명하게 제시하는
책이 사도행전이다. 성령이 오시면 신자들을 하나님의 모든 진리로
인도하신다. 이로써 육신의 죄악된 욕망과 성령의 거룩한 욕망이
분별된다. 성령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성의 충만함을
보게 된다.성령은 그리스도 예수를 우리 마음 속에 높이신다.
이러한 역사를 통하여 결국 우리를 예수님의 형상을 갊은 사람이
되도록 역사하신다. 성령은 신자 속에 아직도 제거되어야 할
더럽고 추악하며 냄새 나는 옛사람의 모습을 드러내어, 이런
것들을 버리고 주님안에 있는 온전하고 거룩한 새사람으로 계속
적으로 변화시킨다. 이런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에서 말하는
인격을 가진 사람으로 살도록 신자를 바꾸시는 역사를 하신다.
그래서 기도의 응답으로 성령을 주시는 것이 최상의 선물이다.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강청하는 기도를 하는 자에게 성령을
선물로 주신다. 여기서 성령을 선물로 주신다 함은 성령을 한 번도
받지 않은 자에게 주심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이미 구원받은 자녀들을 성령으로 다시 충만케 하시는 것으로
이해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강청하는 기도로 주님의 거룩한 뜻을
이루고자 할 때, 성령의 충만한 역사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뜻을
성취할 수있게 된다는 말씀이다.
마지막으로 주님은 올바로 기도했고 하나님의 뜻만을 구했으며
또한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을 받으셨을 뿐만 아니라 계속적으로
성령의 능력을 체험하신 분이다. 주님이 이렇게 기도하시는 분으로
사셨는데 어떻게 기도 없이 주님을 본받는다고 할 수 있겠는가?
주님의 기도를 본받지 않고는 결코 주님이 원하는 사람이 될 수 없다.
오직 기도하는 사람으로 하나님 앞에 설 때 하나님이 원하는 사람이
되어 주님의 뜻을 이 땅에서 이루는 사람이 된다.
신자의 삶은 네 단어, 하나님의 뜻, 기도, 성령의 역사, 하나님의
계획 성취로 요약될 수 있다.
-예수님의 기도로 돌아가자에서-
♡주의 사랑으로 오늘도 행복하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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