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의 은혜/교회법·특별기고

개신교, 상식이 운다

에바다. 2011. 2. 1. 11:51

                    개신교, 상식이 운다
                             개신교는 기본적인 상식의 몰락 
 

   며칠 전에 면목동에 있는 예장합동 교회를 방문한 적이 있다. 약 37년 된 교회인데 경기도 지방아파트 근처로 이사를 한다고 한다. 그 이유는 신도들이 점점 빠져나가 교회성장이 되지를 않는다고 한다. 37년 된 교회의 신도들이 약 100여명 정도. 그래서 자국책으로 30여분 정도 떨어진 경기도 아파트 지역으로 이사를 하는 것이다. 
 

   그 교회 장로의 말에 의하면 최근 소망교회와 제자교회 등 대형교회의 사태로 인해 개신교의 이미지가 너무 실추했기 때문에 아무도 새신자가 등록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개신교는 갈수록 사회로부터 주변부로 밀려나가고 있다. 
 

   오늘날 개신교는 구한말이래로 가장 큰 위기에 빠져있다. 사회로부터 질시를 당하고 냉대를 받고 심지어는 미움 섞인 야유까지 받고 있기도 하다. 이번 소망교회와 제자교회 사태로 인해 개신교의 대한 사회의 정서가 너무 현저하게 노골적으로 드러난 것이 사실이다.  이렇게 된 이유 중의 하나는 개신교가 상식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상식은 영어로 말하면 common sense이다. 모든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감각이다. 법에서도 판사들이 판결을 내릴 때 일반 관습이나 관행, 상식을 중요시하여 판결한다. 법은 상식으로부터 시작되듯이 종교도 상식으로부터 시작이 되는 것이다. 개신교의 문제는 보편사람들이 인식하는 상식을 상실한데서 온다. 헌금을 횡령하고 목사가 불법을 행해도 노회, 총회는 목사편에 선다. 전혀 자정작용이 없다. 
 

   법문화에 있어서 우리 보편사회에 퍼져있는 관행과 관습, 상식이 법조문을 이루는 토대가 된다.  그러나 법은 지킬 수 있는 것을 조문으로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상식을 넘어선 것을 입법화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법은 곧 상식이라고 말한다.   
 

   종교는 초상식
 

   그러나 종교는 법과는 달리 상식을 초월해야 한다. 서로의 다루는 영역이 다르기 때문이다. 종교는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을 탐구하는 것이라면 법은 눈에 보이는 현실적인 것들을 추구한다. 종교라는 것은 우리의 일상성을 떠나 성의 영역으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아들 과거합격을 위해서 정자나무 밑에서 정한 수를 떠놓고 빌거나, 아들을 낳지 못하는 여인네가 절에 들어가서 100일 기도를 드리는 것은 우리의 상식을 초월하는 종교적 행위이다. 모든 종교의 공통점은 속의 것을 성의 영역으로 승화시켜 성의 논리에 따라 움직인다. 
 

   성의 논리의 세계는 정결하고 탐욕을 멀리하여 자신을 비우고, 겸허하며, 남을 미워하지 않고 사랑하며, 아낌없이 베풀며 사는 것이다. 성의 세계 속에서는 살아가는 방법과 나름대로의 원칙이 있다. 종교는 곧 초상식이다. 
 

   종교가 상식을 져버렸을 때
 

   초상식은 현실 이너머의 세계를 지향하는 초현실주이다. 그러나 초현실주의는 상식을 바탕으로 해서 이루어지는 것이지, 상식의 법칙을 버리고 몰아적인 지경으로 빠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역사적으로 종교가 상식을 져버리고 탈세계적이고 몰아적인 경지로 빠져 세계역사에 역행하는 모습을 종종 보아왔으며 자신들만의 섹트만을 중요시 한 종교는 사회의 변두리로 밀려나고 말았던 것을 알고 있다.   
 

   유대교가 상식을 져버리고 자신들만을 선택된 민족으로 보았을 때, 그들은 아랍세계와의 끊임없는 전쟁을 일삼았고, 히틀러로부터 갖은 핍박을 당했으며, 독일기독교가 상식을 져버렸을 때, 정복탐욕에 가득 찬 살인자 히틀러를 양산했고, 오옴 진리교가 상식을 져버렸을 때, 인명을 살상했다. 중세기독교가 상식을 져버렸을 때, 십자군 전쟁을 일으켜, 무력으로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로 만들려고 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처럼 종교가 상식을 상실했을 때, 세계는 악마의 구렁텅이로 빠져들곤 했다. 평화 대신 전쟁이 발생했고, 질서대신 무질서가 찾아오고, 생명대신 죽음이 판을 쳤다. 유대교와 기독교가 상식을 져버린 행동을 했을 때, 모슬렘도 똘똘 뭉쳐 상식을 상실하곤 했다.
 

   이슬람은 자살테러 폭탄을 터뜨려 대량 인명을 살상하고, 아프칸 인질을 살해하며, 9/11테러를 일삼는 등 비상식적인 행위를 계속 일삼아 왔다. 모두 상식의 상실이다. 종교가 상식을 상실했을 때, 다가오는 결과는 엄청난 후유증이 있었다.
 

   기독교는 원래 상식의 종교로서 밀과 신비의 종교와는 달리 현실에서 윤리적으로 철두철미하며, 근검하고 절약하며, 이웃을 사랑하고 약자들을 돌봄으로서 예수사랑 정신을 현실에 실천하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가는 종교이다. 그런 이유로 서구의 문화는 기독교 문화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독교가 가는 곳에 신분제도가 철폐되고, 미움과 증오가 사라지고, 자유와 평등사상에 기초한 민주주의가 싹트며, 양로원과 학교와 병원이 건설되어 사람들을 위한 종교로서 자리 잡았다는 것은 부인하지 못한다. 특히 기독교는 로마의 법정신에도 크게 영향을 미쳐 법평등을 유도하기도 했고 노예제도철폐에 큰 영향을 미쳤다. 사람들이 일주일에 한 번씩 쉬는 것도 엄격하게 말하면 기독교의 덕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기독교가 몰상식으로 흘렀을 때, 사제들이 타락하고 성전건축이 번성하며, 땅을 사들여 재산을 축적하고, 십자군전쟁과 함대전쟁을 일으켜 정복주의적인 선교를 감행했다. 남미의 기독교사를 보면 먼저 사제들이 들어가고 뒤따라서 총칼 든 군인들이 들어가 땅을 점령했다.  요사이도 하도 성전건축을 많이 해서 교회는 부도 투성이이며 경매로 넘거가는 건물들이 비일비재하다. 
 

   기독교가 몰상식으로 나아갈 때 종교로서의 가치와 본질 상실
 

   이와 같이 기독교가 인간의 탐욕을 위하는 수단으로 전락할 때, 기독교는 정복적 종교로서 변모했다. 겉은 예수의 탈이지만 속은 기득권을 추구하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다.  기독교가 인간의 탐욕의 수단으로 전락해서 몰상식적으로 나아갈 때, 기독교는 중세사회처럼 점점 변방으로 밀려나게 된다. 
   

   한국의 개신교를 한 번 볼까요?  최근의 한국의 기독교는 상식의 기독교가 몰상식의 기독교로 전락해 버렸음을 보여준다. 자신을 버리고 비우는 것이 기독교의 정신이건만, 많은 목회자들이 배를 채우려고 안달이 났다. 목사가 연봉이 억대가 되고, 고급 승용차를 이끌고, 골프장을 가난한 성도나 환자를 심방하는 것보다 더 많이 찾아가고, 여성도를 탐욕의 대상으로 삼고, 교인들의 헌금을 자신의 배와 탐욕을 채우기 위한 물질로서 보고 있는 것이다.
 

   일부목사, 몰상식을 추구
 

   어떤 목사는 법을 좀 안다고 대형교회의 약점을 찾아서 금품을 요구하여 브로커 노릇을 하고, 부동산 사냥을 하고 있다. 특정 인터넷 뉴스나 단체를 만들어 회원들을 위해서 일하지 않고 자신의 배만을 위해서 분규난 교회를 찾아가 부동산 사냥을 하거나 대형교회의 단점을 들추어내어 뒷돈 거래를 하는 브로커노릇을 하고 있지요. 앞에는 성직의 타이틀을 갖고 있지만 뒤로는 브로커 짓을 일삼고 있습니다. 일방적으로 용역을 끌어들이고 플랭카드를 걸어놓고 기존의 교회인들의 집회를 방해하고 있다.  
 
    일부 부로커 목사들은 교회, 총회도 닥치는 대로 고소고발을 밥 먹듯이 하여 교인들의 헌금을 갉아 먹고 있고 일부 장로들은 변호사비를 부풀려 교인들의 헌금을 착취하고 있다. 속은 그의 영혼이 썩어가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하나님을 버리고 돈을 선택했다. 이처럼 몰상식한 개신교도들이 개신교를 몰상식한 종교로 만들어 버리곤 한다. 장로, 목사 할 것없이 돈이 있는 곳이라면 아골골짝 빈들도 마다하지 않고 쫓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있어도 물질과 탐욕이 없이는 하루라도 살 수 없는 하루살이와 같은 존재들이다. 그들의 코는 예민해서 부동산과 돈이 있는 곳이라면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지옥까지도 찾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이미 물질과 탐욕이 그들의 신이 되어버렸다. 헌금에 대해서도 예배 때는 하나님께 바쳤다고 기도하면서 예배가 끝나면 자신들의 주머니로 가져가고 있다.  
 

   한국기독교, 몰상식을 추구
 

   한국의 기독교는 6.25와 헝그리시대를 겪으면서 재물과 이익만 추구하는 기복 종교, 북한을 무조건 반대하는 반민족 종교, 독재정권과 결탁하는 야합종교, 부패정치인을 지지하는 천민자본주의 종교, 미국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사대주의적 종교, 평신도의 권리는 무시하고 목회자들의 권리만 남은 중세 사제주의적 종교, 사회와 국가의 정책을 무시하는 분리주의적 종교, 신앙인의 행동보다 성경의 자구만을 중심으로 하는 바리새적 종교, 유력한 대통령후보에게만 줄서는 권력지향적 종교로 전락하여 몰상식의 길을 추구하고 있다.
 

   그들은 의를 위하여 핍박을 당하고, 가난한 자와 약자의 친구가 되며, 섬김을 받기 보다는 섬기고, 잣구보다는 삶을 중요시하고, 사회와 국가의 정책을 따르며, 유력한 정치인과 권력에는 관심도 없는 예수의 정신과는 너무나도 동 떨어져 있다.  
 

   이외에도 한국의 기독교는 건푹중독에 걸려 현재 수많은 교회가 경매에 넘어가고 있으며 교회 건축 빚이 14조원을 넘어 하늘을 찌르고 있다. 교회는 성장하면 전국 방방곡곡에 사찰 이상으로 많은 기도원을 건설하여 기복신앙과 몰아적인 신앙을 부채질하고, 도처마다 수억, 수십억짜리 교회건축을 하여 빚더미에 올라와 있다.
 

   뿐만아니라 헌금을 강조하는 부흥사들의 타락과 위선 교회개혁자들의 타락도 극치를 달리고 있다. 그들은 앵무새 같은 설교를 계속 반복하거나 교회개혁을 겉으로는 부르짖고 피켓을 들고 약자들의 인권을 외치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주머니와 잿밥에 관심이 있다. 주머니가 텅 비면 불안해서 부들부들 떠는 사람들이다. 이미 공허한 마음에 성령으로 채우지 않고 돈으로 채우는데 익숙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그들의 심령에서 떠난 지 이미 오래되었기 때문에 무언가를 채워야 안정이 되는데 그것을 물질이나 부동산사냥을 통해서 채우는 것에 익숙해 있다.
 

   어리석게도 토끼나 양처럼 순진한 교인들은 이리처럼 교활하고, 여우처럼 간교한 목사브로커들에게 속아 넘어갑니다. 그들은 목사와 브로커를 구분할 밝은 눈을 가지고 있지 못하는 어리석은 맹종자들로 전락했다. 그저 ‘은혜’하면서 온갖 비리를 보면서 한마디도 못하고 피해버리고 마는 겁쟁이, 회피주의자로 전락을 했다.
 

   에라스무스의 우신예찬에 나오는 (광)우신이 몰상식을 추구하게 해
 

   에라스무스의 우신예찬에 나오는 광우신이 그들에게 들어가서 목회자에게의 맹종을 헌신신앙이라고 생각하도록 만들어놓았다. 교회개혁도 돈을 위해서, 회개촉구도 돈을 위해서, 부흥회인도도 돈을 위해서 하는 이리 같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영혼이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을 감지하지 못하고 있다. 돈에는 민감하지만 영혼구원에는 둔감한 것이 그들의 특징이다.    
 

   그들 중 대부분은 역사 앞에서는 비굴하고, 개인의 기득권과 기복, 헌금 앞에서는 유난히도 강하다. 그것이 목사 브로커들의 본질이지요. 브로커들은 교회이고, 노회이고, 총회이고 갖은 일거리를 만들어 돈이 생기는 데는 다 달려든다. 수치스러운 것도 부끄러운 것도 모른다. 그야말로 후안무치이다. 그들은 창피는 잠시 뿐이지만 이익은 영원합니다고 생각하고 있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특징은 자신들의 기득권이라도 뺏길 것 같으면 검찰에 고소고발해서라도 기득권을 차지하고 마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있는 힘을 다하여 집착했고, 빼앗기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으며 가지려고 젖 먹는 힘까지 다했다. 그러나 그들의 영혼을 사단에게 빼앗기지 않으려고 안간힘은 전혀 쓰지 않고 있다. 이미 광우신이 그들의 영혼에 들어 앉아 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 vs 예수 바라바
 

   기독교인이면 마음을 비우는 것인데 일부 브로커목사들과 브로커 부흥사들, 대형교회 목사들은 끊임없이 물질과 부를 추구하여 예수바라바(어떤 사본에서는 바라바의 성이 예수로 나옴)를 추구하는 것인지, 예수 그리스도를 추구하는 것인 지 헷갈릴 때가 많다. 대부분이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예수 바라바를 찾는다. 상식을 잃어버린 목사들 천지이다. 상식의 상실은 분쟁교회에서 잘 나타난다.
 

   분쟁이 난 교회를 보면 대부분이 서로 재산을 빼앗으려고 경호원까지 동원하고 수 천만원, 수 억원의 변호사비까지 지출하여 성도들의 헌금을 탕감하고 있다. 원로목사와 후임목사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놓지 않기 위해 자신들의 지지파를 결집시키고 자신들의 영달과 안위를 위하여 싸우고 있다. 성도들은 십자군의 전사들처럼 같은 성도들끼리 마귀, 사단이라고 하면서 맹렬히 싸운다.
 

   예수의 비움의 정신은 온데 간 데 없고 탐욕과 이기심의 정신만 남아있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몰상식현상입니다. 목회자들은 교인들이나 당회원들 싸움에 아랑곳하지 않는다. 자신의 자리만 굳건하면 그만이다. 당회를 수차례 파행시켜, 부목사들의 입지가 불안해져도 관심 없어 한다. 사회가 무어라고 냉대해도 물질의 따듯한 이불을 덮고 있으면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기독교는 초상식의 종교
 

   엄격히 말하면 기독교는 상식의 종교가 아니라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을 토대로 하여 종말론적으로 예수의 재림을 손꼽아 기다리는 초상식의 종교이지요. 그러나 초상식의 종교는 상식을 초월해서 존재하는 것인데 상식을 초월하여 몰상식의 종교로 전락했다. 일단 기독교가 초상식의 종교로 가기 위해선 몰상식을 초월하여 원래의 본질로 개조가 되어 상식을 추구해야 한다. 
 

   한국의 기독교가 상식으로부터 다시 시작 할 때, 초상식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 기회가 생기는 것이다. 이랜드사태나, 아프간 사태는 기독교가 상식이 아니라 몰상식의 길을 자초했기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이제 한국의  기독교는 구한말의 교회, 프랑스의 위그노, 네덜란드의 개혁교도, 미국의 초기 청교도처럼 국가와 그 사회에 빛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상식의 종교로 도약하기위해서 개조되어야 한다.  국가, 교육, 사회, 언론이 점점 개조되어가고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한국의 개신교도 개신교 본질을 추구하기 위해서 보다 나은 모습으로 변모되어야 한다.   
 

   상식의 종교로 가기 위해서는 교회의 법치주의 회복
 

   교회안에서만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려하지 말고 교회밖에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해야 된다. 그리고 개신교의 울타리를 높은 담을 쌓고 사는 키다리 아저씨의 집으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누구나 쉼과 안식을 위해 쉽게 찾아들 수 있는 아름다운 공간으로 꾸며놓아야 한다. 개신교는 선교를 비롯하여, 교회제도, 설교, 신학교 등 다양한 부분에 있어서 상식성을 띠어야 하니까. 상식의 종교로 가기 위해서는 교회의 법치주의 회복이 있어야 한다.
 

   현행 한국개신교의 문제는 기본적인 상식을 상실했기 때문에 초상식의 세계로 진입하지 못하고 몰상식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이다.  목사의 타이틀을 갖고 노조를 운영하여 교회로부터 금품을 뜯어내고, 문제있는 교회에 들어가 부동산을 사냥하고, '짐은 곧 교회'니라 하면서 교회의 재정을 독점하고, 업자들과 내통하기 위하여 교회 내 비밀통로를 만들고, 신도들은 예배처소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자신은 교회 안에서 천국생활을 누리고 있다.
 

   그들은 천국은 심령이 가난한 자의 것이라는 것을 모른다. 그래서 목사들이 동산과 부동산을 계속 채우려고 하는 것은 하늘나라의 땅이 가슴에 없어 공허하기 때문이다. (2011.2.1.에클레시안/황규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