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의 은혜/교회법·특별기고

‘정교 분리’ 도전 받는 미국

에바다. 2011. 11. 10. 11:56

               ‘정교 분리’ 도전 받는 미국 
                     공화당 주지사 있는 주에서 종교 앞세운 정책 잇따라…
                      “교회와 주정부 분리, 헌법에 없는 것” 주장도 
 

   미국 텍사스 주 레위스빌 시청 광장에 모인 시민들이 손을 맞잡고 기도를 올리고 있다.  ⓒAP연합 
 
   영국에서 박해를 받아 새로운 자유 세계를 만들겠다는 의지로 국가를 건설한 미국에서 종교를 떼어놓는다는 것은 근본을 뒤흔드는 일일 것이다. 종교의 자유는 그래서 철저히 보장되며, 이 덕에 미국에서는 기독교를 중심으로 한 모든 종교가 그 어느 곳보다도 자유롭게 번성하고 있다. 일본을 잡신의 명소라고 하지만 전세계의 모든 종교는 미국에서 번성하고 있다.

    
   미국의 자유가 제대로 지켜지고, 법과 책임이 존중되며, 프리메이슨이 미국 건설 초기 노심초사 완성하고자 했던 새로운 질서(NOVUS ORDO SECLORUM)가 유지되는 기초에는 정치와 종교의 분리가 있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WASP(백인이면서 앵글로색슨이며, 신교도주의자들)가 주류라고 믿는 공화당 진영에서는 종종 이 종교적인 시각을 강조하며, 낙태를 죄악으로 여기고, 동성연애를 터부시하는가 하면 이민족의 유입을 못마땅해한다. 미국에서는 고교생만 되면 학교 내 모든 남녀 학생이 짝을 지어 서로가 남녀인 점을 확인하는 자유 분방한 풍조를 즐기면서도 낙태만은 죄악시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면서도 겉으로는 종교적인 순결함을 내세운다. 조지 W. 부시 공화당 정권 시절에는 이 때문에 법원 앞에 10계명 비석이 들어서는가 하면 의회에도 10계명을 세워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는 등 종종 정치에 종교가 파고드는 모습을 정당화하는 사례가 보였다. 지난 대선 때 공화당 대선 후보로 나선 마이크 허커비 목사가 선거 유세에서 미국의 헌법은 10계명으로 대체되어야 한다고 주장해 기독교인들의 성원을 얻었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민주당 정부가 들어선 뒤 이같은 종교적 입장이 덜 강조되자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공화당 진영에서는 이제 종교적 신심이 무너지면서 미국이 붕괴되고 있다는 해괴한 논리까지 들고 나와 오바마 정부에 반기를 들기 시작했다. 1960년대에 히피족이 온 나라에 ‘벌레’처럼 번성해 도덕 가치가 무너지고 미국의 질서가 붕괴될 것이라는 우려가 나타났었다. 마치 이때처럼 지금도 비종교적인 관념이 넘쳐나 미국의 도덕과 질서가 파괴될 것이라고 우려하는 목소리가 드세지고 있다.


   최근에는 미국의 몇몇 주에서 초등학생들은 ‘교회와 주정부의 분리라는 단어는 미국 헌법에는 없는 말이다’라고 배운다. 지난 공화당 정부 때 도입된, 한국으로 치면 ‘사회’ 과목이라고 할 수 있는 ‘소셜 스터디’ 과목에 새로 추가된 개념이다.


   게다가 최근 텍사스 주에서는 수적으로 우세한 공화당 진영의 교육위원들이 미국의 국가 기초를 다진 국부들이 지녔던 종교적인 관점을 더욱 강조하라는 지침을 결정해 교사들에게 지시했다. 이들은 미국의 헌법에는 ‘헌법을 갖는 공화국’이라는 개념이 더 크며 ‘민주주의’적인 개념은 미약하다는 논리까지 펴고 있다. 민주주의적이라는 단어를 영어로 옮기면 바로 ‘Democratic’이며, 이는 곧 민주당의 냄새를 풍길 수 있다는 점을 의식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정당의 첨예한 대립 구조가 마침내 국가의 기초 개념까지 건드리며 왜곡시키려는 의도가 보이는 지경이다. 주 교육위원들은 이처럼 새로운 개념 설정에 대해 표 대결을 벌여 9 대 5로 확정했다.


   이처럼 새로운 개념은 앞으로 10년 동안 텍사스 주 내 4백80만명에 달하는 학생들에게 가르쳐질 것이다. 이들 학생은 그동안 민주주의에 바탕을 둔 3권 분립을 기초로 미국이라는 나라가 설립되었다는 개념보다는 교회와 신의 도덕성에 근거해 국가가 설립되었다는 새로운 논리를 교육받게 되는 것이다.

    
   진화론을 창조론으로 대체한 생물 교과서 사용하자는 움직임도


   바야흐로 기독교를 기초 이념으로 갖는 국가의 개념이 서서히 미국 텍사스 4백80만명의 학생들 머릿속에 각인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움직임은 최근 각 주정부에서, 특히 공화당이 주지사로 있는 주에서 잇달아 종교적인 관념이 정치에 도입되는 작업의 일환이기도 하다.


   켄터키 주에서는 다윈의 진화론은 그 근거가 희박하고 누군가의 선별적인 선택에 의해 생명체가 발전한다고 주장하는 새로운 창조론이 학교 커리큘럼에 도입되는가 하면 남부의 이른바 딥 사우스(Deep South) 지역에서는 고교 생물 과목에서 진화론이 폐지되고 창조론으로 대체된 교과서를 사용하기로 결정하는 움직임도 벌어졌다.


   찰스 다윈의 업적이자 지금까지의 과학 업적으로 불리던 진화론이 갑작스레 사라져버리고 느닷없이 창조론으로 교과서가 대체되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가뜩이나 과학 과목에서 뒤처지는 미국 학생들의 장래도 걱정이지만, 더욱더 우려되는 것은 바로 교육에 정치적인 입김이 작용해 마구 왜곡시켜도 이에 제동을 걸 견제 장치가 없다는 점이다.


   공화당 진영의 의도와 목표가 어떤 것인지는 언뜻 파악하기 어렵다. 분명한 것은 그들의 종교적인 관점을 관철시키기 위해 학생들이 배우는 과학 과목에 이르기까지 종교적인 맹신을 강요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어버릴 수 있다는 발상 자체가 과연 이전의 미국다운 태도인가가 의문시된다.


   신의 속박 속에 있었던 중세 1천여 년 동안 사람들은 지구가 편편하며, 태양이 지구 주변을 돌아야 신에 부합하는 것이라는 논리에 갇혀 지낸 적이 있었다. 그러나 다시 수백 년이 지난 시점에 미국에서는 다시 이처럼 신의 관념에 몰입한 창조론에 교실을 압도하는 분위기가 연출되고 있다. 앤 던컨 교육부장관은 이에 대해 “교육의 방향과 정책은 그 지역의 고유 권한이다. 그러나 교육에 정치가 개입해서는 안 된다”라는 말로 불개입 방침을 표명했다. 교육부장관으로서 이미 교육위원 자체가 선거를 통해 정치적으로 선출되는 마당에 이를 어떻게 막을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모두가 공화당이 우세한 주들에서 벌어지는 일들이다. 과연 공화당의 정강이 더불어 사는 인류애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는지, 혹은 사해동포주의적인 시각을 저버린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우선되어야 할 시점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종교가 정치에 결부되어야 한다는 논리에서부터 인도주의적 지원이 개인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다는 논리로 발전하는 미국의 정치 흐름이 과연 다음 단계에서는 어떤 주의를 만들어낼지 주목된다. (2010.6.2. 시사저널 / 워싱턴·최철호 통신원) 

 
 
               참된 미국 선조 신앙인들의 모범 
                     '정교분리'의 논리와 교회 
 
   '정교분리'는 이 용어가 직접 표시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물론 서방 기독교 전통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나, 첫째 국가는 교회의 말씀 선포에 관여할 수 없다. 설령 그 말씀 선포가 그 국가나 정부의 부정의와 불의, 권력의 남용,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인간에의 침해, 경제적 불평등 구조 등에 대한 명료하고도 구체적인 지적과 심판의 선언을 의미한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이후 이것은 민주 헌법을 가진 나라에서는 근본적으로 침해할 수 없는 보편적인 사상과 양심의 자유가 되었다. 따라서 이것은 굳이 '정교분리'라고 하지 않아도 오늘날, 더구나 하나님의 말씀에만 의무를 지는 교회에 이미 헌법상 인정되는 권리이다. 저 고대 신정국가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처럼, 저 서구 개혁의 전통을 가진 도시국가 및 기독교 국가들, 그에 이어 이를 그 역사적 상황 속에서 정교분리로 정착시킨 종교 자유의 나라 미국 등과, 그 후에 서구의 민주 헌법을 이어받은 다종교 국가들과 이 땅의 교회들에서도 이 원칙은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더구나 우리 헌법은 이것을 규정하고 있다.


   민주 헌법이란 인권과 양심의 자유에 기초해 있고 이것이 침해되는 상황은 민주 헌법이 없던 시절 곧 중세로 되돌아감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원칙적으로 헌법 침해적인 상황은 중세의 무장봉기를 시인하고 불러오는 상황이다. 오늘날 이런 이야기를 다시 하게 되었다는 것은 기대치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놀랍고도 슬프고 수치스럽고 경악할 만한 일이다.


   하지만 교회는 이런 헌법이나 교회를 위한 제도적인 보호의 규정 없이도, 가령 1세기 팍스로마나의 세계에서 유대교가 누렸던 특권의 전통이 없었을 때에도 이 의무로 부르심을 받고 있었다. "두려워하지 말라(마 10:31)."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마 10:28)."


   둘째, 국가나 정부는 교회의 치리권을 침해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도시국가나 국교의 상황 즉 '시민'과 '교회의 회원'이 겹치는 상황에서도 개혁의 교회들이 굳이 교회를 위하여 보존하려 했던 권리이다. 제네바가 그 가장 특출한 예이다. 이렇게 교회의 독립성과 정부의 독립성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대로 유지된다. 16세기처럼 시민과 교인이 겹치는 상황이든 1세기 초대교회처럼 교회가 대부분이 이교도인 다수에 둘러싸인 소수로 머물 때든 마찬가지이다. 반면 이 권리를 서로 침해하려 했던 교황과 황제의 권력 다툼 같은 예도 수많은 중세의 역사를 장식하고 있다.


   따라서 오늘날 국가의 지도자나 정치인이 기독교인이냐 아니냐 하는 것은 아무런 상관이 없는 문제이다. 이런 것을 중시하는 태도는 이미 정부 또는 정치의 독립성에 대한 기독교의 침해이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하나님께서 그 손에 맡겨 두신 권한을 제대로 행사하느냐 하지 않느냐이다. 다시 말해 한국교회가 지금까지 정치와 관련하여 얼마나 많은 침해를 저질러 왔고 지금까지 얼마나 정치적이었던가를 확인할 수 있다.


   반면에, 이렇게 보수적으로만 정치화된 한국교회는 자기 본연의 권리와 의무는 철저히 배신해 왔다. 교회가 신자들을 끊임없이 무정부 상태로 몰아넣었고,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왕 되심을 교회에서 제일 먼저 부인해 왔다. 한국교회는 교회를 그리스도의 다스리심이 없는 교회로 만들었고, 따라서 그리스도의 선지자 되신 엄위하신 심판과 은혜의 말씀을 왜곡해 왔다. 해서 그리스도의 제사장 되신 십자가의 섬기심을 세상에서 조롱받는 한갓 만담 거리와 수치심도 모르는 신자들의 악행에 대한 자동 사면장으로 만들어 왔다. 바울이 소스라쳐 반문하는 말이 한국교회에서는 현실이 되어 버린다. 그러면 그리스도는 죄의 봉사자란 말인가?(갈 2:17) 하나님이 죄를 짓게 하는 분이란 말인가?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고?(롬 3:8, 6:15)


   이렇게 그리스도의 그리스도 되심, 메시아 되심은 부인됐다. 이것을 막기 위하여 원래 정교분리가 있었던 것이고, 교회는 무엇보다 정치적인 교회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말씀과 그 말씀의 다스리심에 순종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원래 '정교분리'라는 말은 국가를 향하여 무기까지 들던, 그리고 영국을 실제로 이겨 버리기도 했던 그 전통에서 면면히 이어져 나온 것이다. 사실은 '정교분리'에 의하면 폭군은 일개의 나쁜 짓하는 시민으로 환원되는 것이라 폭군을 처단하는 것은 이제 정치적인 문제도 아니게 된다. 이게 존 낙스 등의 견해였고 사무엘 러더포드 같은 청교도들이 스코틀랜드에서 실천했던 유서 깊은 장로교 전통이다.


   이 역사는 대영제국의 식민지 수탈에 반대하던 식민지 미국에서도 반복되었는데, 놀랍게도 저들이 그렇게나 섬기고 있는 미국은 이 전통에 따라 무기를 들고 독립 전쟁을 했던 나라였다. 게다가 미국의 독립 전쟁은 이후에 이어졌던 수많은 혁명 운동, 대표적인 예로 프랑스혁명을 자극했던 그 전쟁이었다. 이 견해는 또한 20세기의 실천하는 복음주의자 프란시스 쉐퍼의 견해였고, 바로 이 전통을 두고 예일대의 기독교 철학자 니콜라스 월터스토프는 이렇게 한탄하기도 했었다. "장로교인들이 자기들의 전통도 못 알아본다"고.


   당시 수적인 열세와 훈련되지 못한 민병들을 가지고 대영제국의 정규군에 맞서면서 식민지의 온갖 억압에서 벗어나기를 원했던 미국 선조 신앙인들의 모범과는 극히 거리가 먼 식민지적 굴복과 굴종의 교회들이 오늘날 스스로 식민적 섬김과 복종을 맹세하고 있으니 자유롭게 하는 진리도 자유로워진 하늘 시민도 양심에서 하나님께만 서약하는 자유의 교회도 없다.


   어느 것이 더 미국 선조 신앙인들의 모범을 따르는 것인가. 미국 월가의 오큐파이 저항인가, 아니면 신자유주의를 통한 빈곤의 세계화인가. 미국과 온 유럽의 '눈 먼 자본'에 대한 저항은 민주주의가 아니란 말인가. 이 땅의 색깔 논쟁을 비웃는 일들이 지금 온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다.


   그렇다. '정교분리'의 참뜻을 회복하자. 칼뱅도 삼부회의 결의나 호민관 같은 하급 관리의 지도에 따라 신자들이 폭군에 대항하여 무기를 들어야 한다고 했고, 쉐퍼도 이것을 받아들여 현대적으로 해석한 바 있다. 오늘날과 같이 기본적으로 모든 시민에게 참정권이 있는 민주 사회에서도 정치인들이나 정당(야당) 혹은 고급 공무원의 지도는 큰 도움이 될 수 있겠지만, 이것이 절대적인 조건은 아니다. 시대가 달라졌다. 만인은 평등하고 정치인은 우리와 같은 참정권을 가진 시민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어째서 이 땅의 행정관들과 전투 경찰들은 이미 대법원에서 판결 난 촛불 시민의 권리를 다시 우롱하려고 방패와 차 벽을 세우는가. 그들은 사법의 위에 있는가. 진정으로 미국 선조 신앙인들을 본받고 왜곡된 형태의 자본주의 수탈에서 소자와 고아와 과부, 내 형제, 가족을 지키고 자본에의 우상숭배를 이제라도 거부하려고 한다면, 신자들도 평화의 손을 들어야 한다. 여자와 약한 자들이 맞을 때 저들의 곤봉과 방패를 말리고 대신 맞고 보호해야 한다.


   특히 보수적인 교회들은 지금까지 민주화 운동에서 한발 물러서 있으면서 그 과실은 함께 누리고 있다는 데서 부끄러움을 느껴야 한다. 우리는 계명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저 거짓된 언론들이 거짓말하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고 있다. 광주의 진실을 이후 조금이라도 알게 되었다면 그들에게 무한한 책임 의식을 느껴야 하지만 여전히 멸시하고 박대하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탐욕을 정죄하기보다는 축복했다. 하나님의 정의가 아니라 더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 투표했다. 어디에 우리의 신앙이 있는가. 어디에 진리의 자유가 있는가. 우리는 하나님의 정의를 신자들보다 일반 시민과 시민 단체들이 더 잘 알고 있는 기이한 세상에 살고 있다.


   선택의 갈림길에 서 있다. 자본의 탐욕을 계속 섬기고 이웃을 고통스럽게 하는 저 탐욕에 한자리 없을까 하여 묵묵히 동의할 것인가. 아니면 위대한 거부를 통하여 자본에 의한 살인, 자본에 의한 성의 판매, 자본에 의한 합법적인 도둑질과 사기, 자본에 의한 거짓말, 자본의 탐욕을 부인하고 우리의 신앙을 고백할 것인가. 자본주의를 섬길 것인가, 자본주의를 그리스도께 복종케 할 것인가(고후 10:3~5). 자본 때문에 사람을 비인간화하고 가난하게 하고 비천하게 만들고 죽음으로 내몰 것인가, 자본으로 하여금 사람을 섬기게 할 것인가. 같은 자리에 함께할지라도 세상의 거부는 위대하지 못하다. 자기 자신들을 거부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낮아지심과 자기 비우심과 자기 내어주심을 통하여 참 부활의 생명을 배운 자들이다. 자기 부인. 이것이 우리를 항상 그토록 자신에 대하여 소리 지르게 하고 가슴을 치게 하고 분통을 터뜨리게 하고 간절하게 만들고 분하고 두렵게, 열심 있게, 벌하게 한 그것이다(고후 7:11).


   시편 10편이다.


"야웨여, 어찌하여 멀리 서시며 어찌하여 환난 때에 숨으시나이까. 악한 자는 교만하여 가련한 자를 심히 군박하고 그 맘의 소욕을 자랑하며 탐욕 하는 자를 축복하며 그리하여 도리어 야웨를 비방하나이다. 오, 저 사악한 자가 거만히 말하기를 '야웨는 감찰치 않는다' 하나이다. 그 모든 생각에서 '하나님은 없다' 합니다. 그러나 보소서, 저들의 길은 견고하고 흔들리지 않습니다. 주님의 율법과 주님의 심판은 저들에게는 너무 높이 있어서 저들의 눈은 그것을 보지 못합니다. 그리하여 저들은 자기 모든 대적을 멸시하여 말하나이다. '나는 요동치 않는다', '우리에게는 대대로 환난이 없다." 그 입에는 저주, 궤휼, 포악 가득하고 그 혀 밑에는 잔해와 죄악이라. 저들이 혼자 된 표적 살피나이다.


살피다가 잡으매 자기 그물로 끌고 가서 그 강포 아래 넘어뜨리고는 하나님을 조롱하며 자기 맘에 이르기를 '하하, 하나님이 이 자를 잊으셨고 그 얼굴을 가리셨고 보지 아니하신다' 하나이다.


오, 야웨여, 일어나소서, 하나님, 손을 드소서. 가난한 자 잊지 마소서. 어찌하여 악인이 하나님을 멸시하여 그 맘에 이르기를 '주는 감찰치 않는다' 하나이까. 오, 주는 보셨나이다. 잔해와 원한, 주의 손으로 갚으려 하시오니 외로운 자, 주를 의지하나이다.


주는 벌써부터 고아를 도우시는 분이 아니시나이까. 아비 없는 자의 도움이지 아니하시나이까. 악인의 팔 꺾으소서. 악한 자의 악 없기까지 찾으소서. 야웨는 영원무궁 왕이시니 열방이 주의 땅에서 곧 멸망할 것입니다. 오, 야웨여.


주는 겸손한 자, 연약하고 지친 자의 소원 들으셨나이다. 그러하오니 우리를 장려하시리다. 귀 기울여 들으시고 고아와 압박당하는 자 위해 심판하시리이다. 세상에 속한 자가 다시는 위협지 못하게 하시리이다." (2011.11.7. 뉴스앤조이 / 김범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