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의 은혜/신앙,시사,목양 칼럼

집의 표상과 상징

에바다. 2011. 12. 28. 17:42

 

 

                집의 표상과 상징
                      우리 문화, 그리고 성서의 '집' 이야기


                      홍성남 (한신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외래교수)
       
   '집'(house, 家宅)은 사람이나 동물이 거주하기 위해 지은 건물로, 보통 벽과 지붕을 가지고 있으며, 추위와 비바람을 막아주는 시설이다. 우리말에서 집은 건물, 살림집, 가족과 가문으로서의 집안 등의 의미로 제각기 쓰이고 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지구촌에 사는 여러 민족이나 국가들은 제각기 고유한 모양과 기능, 의미를 갖는 집을 짓고 저마다 독특한 생활을 영위하였다. 혹한이 계속되는 지역에서는 얼음으로 만든 이글루와 혹서가 계속되는 지역에서는 토벽이나 수상가옥 등을 짓게 된 연유는 자연환경에 잘 적응하기 위한 방편일 것이다.


   과거 우리네 집의 지형은 배산임수(背山臨水)를 택하였다. 그 이유는 생활에 필요한 물, 식량, 연료를 자연에서 쉽게 얻으려는 것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 집의 구조는 당연히 기후와 무관하지 않다. 일조량, 강우량, 강설량, 바람, 습도, 지형 등 모든 것이 예나 지금이나 집의 모양과 구조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은 분명하다.
  

   집과 관련된 속담으로는 ‘집도 절도 없다’(아무 데도 의지할 곳 없음을 의미), ‘집 태우고 못 줍기’(큰 것을 잃고 작은 것을 얻으려고 애쓴다는 말), ‘집 귀신이 된다’(여자가 출가하여 그 집에서 늙어 죽는다는 의미), ‘집과 계집은 가꾸기 탓’(허술한 집과 부족한 여자라도 잘 가꾸고 가르치면 좋아진다는 말), ‘집에서 새는 바가지는 들에 가도 샌다’(본성이 나쁜 것은 어디를 가나 그 본색을 감출 수 없다는 뜻), ‘집안이 망하면 집 터 잡은 사람만 탓한다’(무슨 일이든 잘못 되면 남의 탓만 한다는 뜻), ‘집을 사면 이웃을 본다’(집을 살 때는 무엇보다도 그 이웃의 인심과 환경을 보고 사라는 말) 등이 있다. 위의 속담 중에는 산업화 이후에 환경과 풍속이 변하면서 지금은 생소하고 낯선 것도 있으나 우리네 조상들이 온갖 역경을 거친 지혜의 산물임에는 틀림없다.  

    
   예전 우리네 조상들의 집에 대한 생각을 알아볼 수 있는 민간신앙으로 가신(家神)의 의례를 들 수 있다. 가신의 존재는 집안에서 이루어지는 굿이나 안택고사(安宅古祠), 집 짓는 과정에서 행해지는 건축의례에서 흔히 보여진다. 집에는 사람 뿐만 아니라 사람을 지키는 신들도 살고 있다고 믿어졌다.


   지역에 따라서는 그 명칭의 차이가 있지만 대청의 성주신(城主神=星主神)을 우두머리로 하여, 안방의 삼신(=産神), 부엌의 조왕신, 외양간(馬廐구)에는 마대지신, 도장(庫房=庫間=倉庫=곳간)에는 도장지신, 방앗간의 방아지신, 변소(측간)의 측신, 대문에는 구틀지신(수문신), 마당에는 노적지신, 장독대에는 장독지신, 우물에는 용왕신 등이 존재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이들은 일정한 건물이나 공간에 거처하며, 일정한 역할을 가지고 있다. 이들의 역할은 가족과 가문으로서의 집을 보호하고 그들의 길흉화복을 관장한다고 믿었기에 주기적으로 의례의 대상이 되어 왔다. 신들이 거처한다고 믿어지는 건물이 신전(神殿)이듯이 주택 또한 가신들의 거처로서의 신전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다음으로 과거 유대인의 집에 대하여 살펴보자.

    
   가난한 유대인들은 대개 동굴이나 진흙으로 만든 집에 딸린 방 하나에서 거주하였다. 동굴 집은 고대부터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형태였다. 보통 동굴의 입구는 튼튼하게 만들어서 짐승들의 침입을 막았고, 동굴 내부에는 벽을 파서 침상을 만들었다. 진흙으로 만든 집은 흙벽돌을 이용해서 지었다. 가족들은 보통 방 하나에서 다함께 지냈다. 이런 진흙 집은 비가 오면 빗물이 샛고 벽을 쉽게 뚫을 수가 있어서 늘 도둑이 침입할 위험성이 있었다. 사람들은 벽을 좀더 튼튼하게 하기 위해서 갈대와 골풀을 섞어서 만들거나 기둥에 진흙으로 반죽을 해서 만들었다.


   그러나 이렇게 만든 벽도 몹시 불완전하고 뱀이나 해로운 야생동물들이 서식하는 장소가 되기도 했다. 특히 농부들의 집 문은 대단히 낮게 만들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집안으로 들어가려면 몸을 숙여야 했다. 낮은 문이 야생동물이나 적의 침입을 막아주기도 했다. 그리고 부유한 사람들은 네 칸짜리 방을 가진 주택에서 살았다.


   부자들은 자기 집에 지붕이 있는 긴 복도를 만들었고, 집 중간에는 뜰을 만들었다. 부자들의 집에서 이 뜰은 아주 중요한 장소였다. 뜰을 통해서 둘레에 있는 방들에 햇빛과 공기가 통하게 되어 있었다. 주변의 방들은 뜰로 통하는 문만을 열어 놓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집에 오거나 집에서 나갈 때에는 뜰을 통과해야만 했다. 그리고 잔치가 있으면 주로 집의 중간에 있는 뜰에서 이루어졌다. 집주인은 카펫이나 의자들을 준비해 손님을 맞았다. 일반적으로 유대인들은 보통 새 집을 지으면 입주하기 전에 새 집을 봉헌하는 의식을 거행했다. 그들의 이 의식은 하느님의 축복이 그 집과 그 집안에 내리기를 기도했다. 이처럼 유대인에게 집은 인간 뿐만이 아니라 하느님이 함께 하시는 장소로 인식되었다. 
 

   세상에 현존하는 모든 만물의 보금자리는 하나님의 주재에 기인한 것을 역설한 대목은 구약성서 시편 84장 3절~4절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주의 집에 거하는 자가 복이 있나이다 저희가 항상 주를 찬송하리로다(셀라)”의 구절과 신약성서 히브리서 3장 4절 “집마다 지은 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의 구절에서 읽어낼 수 있다.


   신약성서 마태복음 7장 24절~25절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신약성서 마태복은 7장 26절~27절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의 구절에서, 반석 위에 지은 집과 같이 세상사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회 구성원과의 올바른 소통에서 공간의 대상을 찾아야지 특권층만을 위한 공간의 대상은 갈등과 분열을 초래하여 부조화의 공간은 결국 사상누각이 될 것임을 천명한 것으로 이해된다. 이와 같은 양상은 구약성서 시편 127장 1절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경성함이 허사로다”라는 솔로몬의 성전에 관한 문맥과 일맥상통한다.


   신약성서 고린도후서 5장 1절~3절 “만일 땅에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의 구절은 헌신에 대한 권유의 비유이다.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성소나 가정을 격리하지 말고 정신적인 영혼의 공간 대상(교회와 가정)을 몸과 마음을 다하여 주님의 말씀대로 행하라는 언술이 담겨 있다.
      

   구약 신명기 20장 5절 “유사들은 백성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새 집을 건축하고 낙성식을 행치 못한 자가 있느냐 그는 집으로 돌아갈지니 전사하면 타인이 낙성식을 행할까 하노라”의 구절에서 전사자의 공을 기리고 그 의례를 집례하는 것은 산자의 몫이라는 의미로 보인다.


   신약성서 마태복음 21장 14절 “소경과 저는 자들이 성전에서 예수께 나아오매 고쳐 주시니”의 구절은 성전에서 치유의 역사를 행하신 예수님의 이적을 논한 대목이다. 성전은 심령이 병든 자나 육신이 병들고 나약한 민중들의 아픔을 치유하는 곳이기도 하지만 주님께서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몸소 실천하신 뜻을 결속시키는 성소의 장으로 표상되어 있다.   

   신약성서 마가복음 11장 17절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하시매”의 구절은 하나님이 주재한 성소(교회와 가정)가 안과 밖의 일상에서 행해지는 희로애락의 일이나 육신과 정신을 강건하기를 여호와께 바라는 만민의 장소가 인간의 물욕으로 인해 성소의 창이 닫히고 밀폐된 벽이 생긴 탓에 조망과 통로가 차단된 어둠의 소굴로 전락한 공간이 새롭게 거듭나기를 바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우리네 전통사회에서는 선비가 집을 매매하면서 재물을 남긴다는 것은 불의한 일로 여겨졌고, 만일 이같은 사실이 알려지면 그들 사회에서 소외당하는 악덕이 된 것은 강인한 선비정신에 의한 자제에 기인된 것이다. 이농현상이 빈번해진 1970년대부터 집을 재산증식의 투자대상으로 여긴 프리미엄 횡재의 악풍은 여전하다.        
 

   신약성서 누가복음 11장 9절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의 구절 또한 기도에 대한 가름침을 역설한 것이다. 문은 나와 남, 안과 밖을 나누는 경계 구실을 하지만 성역과 속세, 이승과 저승을 가르는 상징이 되기도 한다. 
 

   한편 '문'은 시작을 뜻하여, 경상도와 강원도의 오구굿에서는 첫머리에 문을 열어 신을 맞이하는 문굿을 행한다. ‘열린 문’은 반김을 뜻하고, ‘닫힌 문’은 추방 ? 불운 ? 단절을 나타내며, 옥문(玉門) 혹은 하문(下門)은 여성의 성기를 상징한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집 속의 존재이다. 원초의 집이라 할 수 있는 모성의 자궁으로부터 10개월 가량 편안히 머물다가 그곳에서 나오는 순간부터 또 하나의 집이라는 자궁을 확보하여 살 뿐만 아니라, 종국에는 다시 무덤이라 일컫는 천년의 집을 만나게 된다. 이런 집은 사람을 유동의 삶으로부터 정주시키고 자연의 폐해(태풍, 폭설, 폭우 등)와 맹수로부터의 두려움과 안전을 보호해주는 기능 외에도 남녀의 결연을 통한 출산의 신성한 장소, 요리와 식사 및 수면과 휴식의 기능, 가족 구성원의 안식과 위안을 주는 친밀한 장소애의 대상이 되는 것은 틀림없다.


   하지만 과거 비호와 휴식의 장소인 집의 기능이 산업화 이후에는 단순히 사랑받고 보호받는 공동체 개념이 아니라, 가족 구성원의 갈등을 쏟아내고 발현시키는 현장으로 급격히 변질되어 버린 느낌이 든다. 신약성서 마태복음 11장 28절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의 구절은 비록 우리의 고달픈 몸을 편히 쉬게 하는 집이라기보다는 인간의 연약한 마음을 감싸주고 닫힌 정신의 세계를 열어주는 주재자의 품일 것이다. 이로 보건대 집이란 주재자(가신)에 의한 출생, 결혼, 사망에 이르는 성소의 장이자 어머니의 품으로 표상된다. (2010.3.1. 에큐메니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