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쟁교회, 재창조되어야
창세기를 통한 분쟁교회의 메세지
창세기의 전체 내용은 세부분으로 되어있다. 하나님이 우주만물을 창조한 ‘창조(creation)’와 인간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홍수로 인한 세상의 ‘해체(uncreation)’, 노아 가족을 통한 ‘재창조(recreation)’로 되어 있다.
하나님이 우주만물을 아름답게 창조하시고 마지막 날에 인류를 만드셨다. 빛부터 하늘의 해와 달, 식물, 바다의 고기, 공중의 새, 들의 초목, 마지막에는 인간까지 아름답게 창조한 것을 질서라고 명명한다. 하나님의 창조는 ‘질서(cosmos)’를 따라서 움직이는 것이다.
여성의 얼굴에 질서를 창조하는 화장품을 ‘Cosmos’에서 파생된 ‘Cosmetic’라고 부른다. 그래서 화장을 하는 것은 '공허하고 혼돈된 얼굴에 질서를 창조하는 행위‘인 것이다. 가장 아름다운 얼굴로 창조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여성들이 화장을 할 때 하나님의 창조정신을 갖고 새얼굴을 창조해야 하는 것이다. 40~50대가 되어 여인이 화장을 안 한다면 혼돈되고 공허한 얼굴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화장을 하는 것은 혼돈된 얼굴에 질서를 주는 창조적인 행위인 것이다.
그러나 창조는 죄악의 침투로 인해 항시 해체의 길을 걷게 되는 것이다. 해체는 하나님의 심판이요, 저주인 것이다. 그래서 창세기를 비롯하여 구약의 모든 역사는 해체의 길로 가는 것이다. 언어가 해체되고 민족이, 생명이, 지구가, 성전이, 교회가 해체되는 것이다. 해체의 궁극적인 원인은 인간의 죄악인 것이다. 욕심과 기득권, 권력, 이기심 등이다.
해체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을 통해서 형성된 이스라엘 백성은 죄로 말미암아 해체의 길로 가다가 결국 로마를 통해서 완전히 해체되고 말았다. 애급에서 노예의 삶을 살고, 가나안에서도 블레셋과 아람, 바벨론 군대에 끊임없이 시달리다가, 급기야는 AD 70년에 로마에 완전히 해체되고 만다.
우리 개인들 모두 이 땅에 창조된 지 얼마 안 되어 소년, 소년시대의 꿈을 갖고 영원히 살 것 같더니만 어느덧 머리에는 흰머리가 나오고, 고운 피부는 색을 발하게 되고, 동안이었던 얼굴은 화장을 하지 않고서는 남들 앞에 서기도 부끄러운 상태가 되고 말았다. 점점 얼굴과 몸이 공허하고 혼돈된 무질서의 상태로 가게 되는 것이다. 죽음의 길로 내려가는 것이다. 노아의 홍수는 계속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해체가 각 개인에게 닥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신 것이다. 창조, 해체 이후에 소멸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재창조(recreation)가 이어진다. 우리가 잘 아는 ‘리크리에이션’이다. 그래서 우리는 재창조 때문에 소망을 갖고 살아가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 몸도 신령한 몸으로 재창조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따라서 재창조는 신앙인들의 영원한 희망인 것이다. 재창조야말로 진정한 구원인 것이다. 창세기의 인류구원을 위한 재창조는 노아의 홍수를 통해서 드러난다. 그 홍수는 죄악과 부패, 구습을 쓸어버리는 것이다. 그 이후에 하나님은 노아가족의 그루터기를 통해서 재창조를 거행하시는 것이다.
창세기 9장 1절에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 고 말씀하신다. 이 말은 하나님이 아담을 창조하시고 바로 했던 말씀이다. “그들(아담과 하와)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라, 땅에 충만 하라, 땅을 정복하라” (창 1:28)고 말이다.
하나님은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실 때 항시 “생육하고 번성하라, 땅에 충만 하라”고 말씀하신다. 아브라함에게도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창12:2)…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창 15:5)”고 말씀하시어 새로운 이스라엘 백성이 창조될 것을 선포하셨다. 그 축복은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충만 하라는 것이다. 분쟁교회는 대부분이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한’ 대교회였다.
그러나 축복을 감당하지 못한 인간과 교회는 죄로 인해서 해체의 역사로 가는 것이다. 교인들은 바벨탑 사건처럼 같은 교인들끼리도 서로 소통되지 않아 언어가 해체되었고, 갑작스런 홍수로 정신과 생각, 영적인 부분은 모든 것들이 쓸려 내려가 교회자체가 소생하기 어려울 정도가 되었고, 교인들은 애급에서 노예 생활하듯, 때에 따라서 목회자의 맹종적 노예이거나 사단의 노예가 되어 택한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의 신분이 해체되었고, 일부 목회자나 당회원들은 가나안을 점령했으나 아세라신과 풍요의 바알 신을 의존한 이스라엘인들처럼 때로 물질의 신을 의존하다가 교회자체가 시험 들어 영적으로 탕진되는데 까지 이른 것이다. 나아가 가족까지 해체되어 이혼을 하는 가정도 늘어나고 있다.
이러한 해체작업은 죄악에 물든 우리 인생에게도 다가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지구도 온난화로 인해 빙하가 계속 녹으면서 점점 해체의 길로 가고 있는 것이다. 이는 질서에서 점점 무질서로 가는 열역학 제 2법칙이기도 하다. 죄로 인해 민족과 인류, 자연, 교회까지 해체되어 나가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점점 무질서를 향해서 질주하고 있다. 부자상속, 변칙세습, 억대 연봉, 성추행, 교주씩 목회, 수직적 리더십, 교회매매, 교회분쟁, 매관매직, 성차별 등 해체의 길로 가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가 아닌 ‘기득(旣得)교’로
한 때 이 땅에 1세대 목회자들을 통해서 교회가 창조되었지만 제도권에 진입하자 1세대 목회자의 구습과 차세대 목회자의 부도덕성과 정치적 영성, 맹목적 당회와 정치적 당회, 이를 지지하는 맹목적인 교인들의 실수와 죄악으로 인해 점점 해체의 길로 접어들고 있는 것이다.
교회가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고, 성장된 그 이면에 점령지 가나안의 죄악들이 잠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대가로 교회는 에덴동산 밖으로 쫓겨나 급격히 해체의 길로 접어드는 것이다.
분란을 일으키고 성도들끼리 싸우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폭행을 가하고, 목회자는 면직되어도 떠나지도 않고 자신의 지지파들을 데리고 머물러 있다. 양심도 윤리도 없다. 부싯돌보다 더 두꺼운 면피뿐이다. 세상이 뭐라고 하든 아랑곳하지 않는다. 양심은 이미 화인을 맞아 버린 것이다. 잔류파도 관행과 관습에 젖어 그리스도보다 목회자 일변도로 신앙 생활했고, 권리보다는 의무가 중요시 되어 왕같은 제사장의 신분을 상실하였고, 여성은 늘 차별대상이었고, 능동적으로 무엇을 하는 것보다 수동적으로 맹종하는 것이 신앙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청빙도 평신도들은 배제되어 밀실에서 몇 사람들끼리만 작당을 했던 것이다.
그런 덕에 한국교회는 해체의 길로 가고 있는 것이다. 온 인류와 이스라엘 민족이 해체되듯이 말이다. 무질서와 비상식의 상태로 가는 것이다. 상식을 초월하여 초상식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몰상식으로 가는 것이다. 개혁이 아니라 개악으로, 기독교가 아니라 기득교로 간다. 하와를 통한 죄악이 아담의 가족을 망쳤듯이, 몇 사람을 통한 죄악이 온 교회를 해체시켜버리는 것이다.
분규교회는 처음에는 몇 사람을 통해서 악이 들어온 것이다. 그러다가 점점 그 악이 퍼져나간다. 거기에 아담과 하와가 있었고, 가인과 아간이 있었다. 언어가 통하지 않는 바벨탑의 사람들과 신앙 없는 정탐꾼도 있었다. 사울의 독선, 압살롬의 반역, 아론의 무능함,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예수 바라바'(어떤 헬라어 사본에는 예수 바라바라고 나옴)를 따르는 사람들, 분립의 솔로몬, 뇌물을 탐내는 엘리와 사무엘의 아들들, 돈을 좋아하는 가룟유다, 기만의 삽비라와 아나니아도 있었다. 그것의 결국은 해체로 이어진 것이다. 부패된 교회의 해체는 성경적인 것이다.
금과 은을 많이 쌓고 평신도가 배제된 성직자의 권위만 판치는 중세교회가 해체되었듯이 말이다. 그래서 칼뱅이 최초로 당회를 만들 때 성직자와 평신도를 포함시킨 것이다. 성직자의 부패에 당회원들이 과감하게 권징을 했던 것이다. 당회원들은 목회자가 잘못하고 있는 부분에 대해서 성경적으로 할 말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은 노회에서 나타나듯 목회자를 견책하는 장로가 면직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중세의 마녀사냥식 재판이 아직도 통합교단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
해체 다음은 소멸이 아니라 재창조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항시 잘못된 부분들은 해체로 몰고 가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해체를 소멸로 끝내지 않으시고 재창조로 이어가시는 것이다. 노아를 통해서는 새인류를 재창조 하고, 예수를 통해서는 새이스라엘을 재창조하시며, 바울을 통해서는 새율법을 재창조하시고, 루터와 칼뱅을 통해서는 개혁교회를 재창조하셨다. 하나님은 성령과 개혁세력들을 통해서 새로운 교회를 재창조 하시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겉사람은 후패하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듯, 겉교회는 후패하고 속교회는 날로 새로워지는 것이다. 신동엽 시인의 말대로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사라지는 것이다. 혼돈되고 공허한 과거를 버리고 새로운 현재와 미래를 창조하는 것이다.
더 이상 대교회의 거만이나 자만, 타성과 관행, 목회자와 당회의 권위, 밀실야합, 불투명한 재정, 맹종과 과도한 의무, 수직체계, 호화 목회, 목회자의 제왕적 대우, 부도덕, 패륜, 아첨, 기만, 폭력과 폭행, 불투명한 청빙, 부조리에 대한 도덕불감증의 어두운 과거 속에서 재창조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이제 대법원 판례를 통해 재창조의 물꼬를 트셨다. 살아계신 하나님은 불의와 어둠에 정복당하지 않으시고, 잘못된 과거는 물로 쓸어버리시고 새로움을 재창조해나가는 것이다. 양측 모두 더러운 부분들이 노아의 홍수로 씻겨나가야 한다. 이것이 성경의 진리이다. 어설픈 개혁은 개악인 것이다. 이제 교단 잔류파 교회든 이탈측 교회든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겉은 후패했으나 속은 날로 새롭도다”가 되어야 한다.
대법원의 판례는 재창조된 판례
대법원의 재창조된 판례를 통해서 분쟁 교회는 구습을 떨쳐버리고 새로운 교회로 거듭나야 한다. 다시 태어나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재창조(recreation)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서 소쩍새는 봄부터 하염없이 울어댔다. 새로운 교회가 재창조되기 위해서 성도들은 신음과 아픔, 고통을 메아리치는 한 마리의 소쩍새였다.
이제 목회자와 당회는 욕심과 권위를 내려놓고 교인들의 권리를 중요시하며 아직까지도 홍수에 쓸려 내려가지 않은 부분들이 있는지 점검해야 한다. 홍수가 없이는 재창조가 없기 때문이다. 시련과 고통과 신음, 어두운 현실은 때에 따라서 우리의 신앙을 재창조하기 위해서 요구되는 필요악이다. 어두운 현실을 통해 새로운 창조가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닐까? 어두운 밤에 찾아온 니고데모가 심령이 재창조되어 목숨을 걸고 예수의 시체에 향을 바르듯이 말이다.
이제 교단잔류파든지 이탈 측이든지 이전의 권위적 리더십, 목회자에 대한 맹목적 순종, 불투명한 재정운영,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자세, 상대방을 이단과 마귀로 보는 태도, 너무 교회 재산에 치우치려는 기득권적 자세, 공금유용및 횡령, 불법회의, 패거리 모으기, 경호원 동원, 자기 지분 쌓기, 상대방에 대한 폭력과 폭행, 기복적이며 환상과 꿈에 근거한 역사성 없는 신비주의적 신앙, 부도덕과 탈법, 불투명한 청빙, 불투명한 재정을 가리려는 스크린 제직회 등에서 벗어나야 한다. 하나님의 심판의 홍수로 다 쓸려 내려가야 한다.
어둔 과거들은 서서히 지나가고 새로운 광명이 동터오는 것을 보게 된다. 새날이 다시 창조되는 것이다. 어제는 이미 지나가 버렸다. 과거의 어두운 교회는 해체(uncreation)되고 새로이 재창조되는 교회를 꿈꾸면서 오늘 우리의 신앙이 먼저 재창조(recreation)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준비한 자만이 가나안을 차지하듯이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언크리에이션' 보다 ' 레크리에이션'을 좋아하는 것이 아닐까?
분쟁교회, 이제 시작이다
이탈 측이나 잔류파도 목회자의 일방적 지지로 인한 성도들 간의 싸움을 멈추어야 한다. 재창조된 새로운 그리스도의 교회가 탄생되어야 한다. 개혁은 영어로 reform이다. 이것은 Re+form이다. 폼을 다시 잡는 것이다. 폼을 다시 잡아 원래의 형태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즉 교회회복은 원래의 폼인 성경으로 돌아가라는 것이다. 미국에서는 졸업식을 Commencement(시작)이라고 한다. 한국은 졸업이 마지막을 뜻하는데 미국은 시작을 뜻한다. 한국의 분쟁교회는 해체나 소멸이 아니라 이제가 시작이다. 새로운 교회로 재창조되어야 한다. 그럴 때 분쟁교회의 해체는 의미 있는 것이다.
노아 홍수를 통한 세상의 해체에 구원의 메시지가 담겨있었듯이, 분규교회의 해체를 통해 하나님의 새로운 구원의 메시지가 담겨있을 것이다. 옛것을 버리고 교회의 주인이신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다시 태어나라는 구원의 메시지가 담겨있을 것이다. 창세기를 통해서 우리는 창조가 있으면 인간의 죄로 인해 해체가 있고, 해체가 있으면,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 새롭게 시작되는 구원의 재창조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2012.1.7. 로앤처치 / 황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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