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의 은혜/신앙,시사,목양 칼럼

6.25 전쟁 후 기독교가 먼저 평화를 생각했어야

에바다. 2012. 1. 31. 20:14

 

       6.25 전쟁 후 기독교가 먼저 평화를 생각했어야 
          이만열 장로 해방 후 한국 교회사 
 
   이만열 장로(숙명여대 명예교수)의 해방 후 한국 교회사 세 번째 강의 주제는 '6.25 전쟁과 교회'였다. 전쟁에 대한 기억이 흐릿하고 아득한 만큼, 전쟁기 교회의 역사도 어렴풋하게 멀리 있었지만, 이번 강의를 계기로 손에 잡힐 듯이 선명해졌다. 이 장로가 "6.25 전쟁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이후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이야기하지 않아도 잘 알 것이다"고 말하면서도 전쟁사를 굵직하면서도 세밀하게 설명해 주었기 때문이다.


   이 장로는 "공산주의권과 민주주의권 사이의 전쟁이 처음으로 일어난 곳이 한국"이었으며, 전쟁으로 인해서 "한국은 더욱 반공 국가가 되었고, 한국교회도 반공의 보루로서의 교회상을 확립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또한 "지금도 큰 교회들, 금란교회 같은 교회들이 '종북 세력 척결, 공산주의 박멸'하자고 떠드는 것은 전쟁 이후에 그대로 이어져 내려오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며 전쟁과 오늘날 교회의 관련을 분석했다.


   1950년에 북한과 남한 간의 싸움으로 시작된 전쟁은 유엔군과 소련·중국군이 참전함으로써 국제적인 전쟁으로 확대되었고 후에 오랫동안 교착 상태를 이루게 되었다. 이 장로는 "이때 유념할 것은 북한군이 어떻게 그런 강한 군대를 가지고 있었는가"라며 새로운 질문을 던졌다. 그러면서 "그 원인을 단순히 북한군의 호된 훈련으로만 볼 수 없으며, 제2차 세계대전 때 소련군이 북한에 남기고 간 무기의 영향도 컸다"고 말했다.


   실제로 북한 인민군의 지상군 가운데 중국으로부터 배속받은 조선 군대가 있었다. 중국이 국공 내전을 치를 때 만주 지역을 중심으로 (중국의 입장에서) 해방 전쟁을 돕는 세력이 많았으며, 그중 조선 군부대가 3개 사단 정도 되었다. 그 부대를 나중에 중국이 북한한테 넘겨주었던 것이다. 이 장로는 그 조선군 부대를 자세히 설명하면서 "전투력이 엄청 강했다. 실전을 많이 경험한 사람들이니까. 그들이 주력 부대가 되어서 내려왔다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 장로가 겪은 전쟁 이야기


   그 부대가 낙동강 전선까지 내려온 적이 있었는데, 당시 이 장로의 집이 있던 경남 함안에도 왔었다고 한다. "내 집 있는 곳이 경계선이었다. 높은 산에는 유엔군이 있고, 평지에는 인민군이 있었다. 인민군 치하에서 2개월 반 있게 되었는데, 그때의 기억이 생생하다"며 과거를 회상했다.


   이어서 이 장로는 전쟁 중 가장 많은 주민들이 학살당했던 황해도 신천박물관에 다녀온 경험도 들려주었다. "북한 학생들은 신천박물관에 갔다 오면 미 제국주의 타도에 대한 마음이 불같이 생긴다"고 할 정도로 신천박물관은 사상 학습용으로 만들어졌다. 그곳의 사료를 보면 미국의 해리슨 부대가 3만 5000명을 학살했다는 내용이 있다. 하지만 이 장로는 "그 숫자와 남한군이 다 죽였다는 말은 맞지 않다"고 꼬집었다. 소설가 황석영이 <손님>이라는 소설을 쓰기 위해 뉴욕에서 신천 학살 사건 목격자의 증언을 녹취해서 사실과 비교했던 일을 근거로 댔다. "해리슨 부대가 오기 전부터 황해도 구월산을 중심으로 많은 전투가 있었다"고 말했다. 구월산은 공산주의 시절에는 민족주의자들이, 수복 이후에는 공산주의자들이 전세의 변화에 따라 서로 죽이는 살육이 자행된 곳이다. 즉 기독교인을 포함한 반공주의자와 공산주의자들이 죽인 숫자가 3만 5000이라는 것.


   따라서 북한이 주장하는 '미군의 3만 5000명 학살'은 과장되었다고 지적했다. "좌우가 몇 년 동안 싸워서 그렇게 죽었다는 것은 이해한다"며 역사적 사실에 대한 엄밀한 분석을 강조했다. 그 뿐만 아니라 "40일 동안 3만 5000을 죽이려면, 하루에 900명을 죽여야 하는데, 전투 부대도 아니고 행정 요원들이 매일 900명 죽었다는 건 말도 안 된다"며 구체적 예를 덧붙였다.


   전후 기독교가 먼저 '평화'를 생각했어야 했다


   전쟁 이후 남한 교회의 반응을 다루면서 "이런 걸 보면 이상한 생각이 든다"며 운을 떼었다. "물론 당시에 전반적으로 공산주의에 반대하여 끝까지 싸워서 멸절시켜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다지만, 먼저 긴 전쟁을 그치고 평화를 생각해 볼 수 있었는데…"라며 그렇지 못했음을 안타까워했다.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라며 "우파 기독교 가운데 어떻게든지 종북 세력을 까고 북한을 처 없애야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분들이 있다"고 일갈했다. 이에 "과연 원수를 까부수고 멸망시키는 것이 기독교적 이념인가? 6?25 사변을 공부하면서 상당히 많이 생각하게 된다. 기독교회가 왜 그랬을까? 전쟁 속에서도 평화를 간구하는 자세를 왜 갖지 못했을까?"는 절절한 고민과 질문을 거침없이 토해냈다.

    
   당대의 기독교 지성인인 백낙준도 공산주의에 대한 허물을 대속하고 진정한 민주주의의 옹호자가 되려면 전쟁에서 끝까지 싸워서 승리를 얻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남한 교회는 휴전 반대 운동을 최고의 구국적 행위로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쟁 승리를 통해 통일하겠다는 남한 교회의 태도는 휴전이 즈음하여 극명하게 드러났다. 1951년 여름 휴전 문제가 논의되기 시작할 때, 소련의 휴전 제의를 미국이 받아들여 7월부터 판문점에서 휴전 회담이 열리기 시작했고, 남한 정부는 줄곧 휴전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남한 교회는 정부의 입장에 동조하며 부산에서 정전(停戰 반대 신도 대회를 열기도 했다.


   이에 대한 이 장로의 평가는 더욱 냉철했다. "집단적으로 휴전 반대 운동을 했던 단체는 기독교가 대표적이었다. 기독교의 입장을 선명하게 보여 줌과 동시에 평화, 사랑이 구체적 현장에서 과거 어떻게 나타났는가 우리에게 굉장한 반성을 준다"고 성찰했다.


   교회의 휴전 반대는 1953년 봄 휴전 협상 문제가 재차 대두될 때도 표출되었다. 만일 38선에서 휴전된다면 국토는 영구히 양분될 것이며 아시아와 전 세계의 공산화를 방지할 수 없다는 것이 휴전 반대의 주요한 이유였다. 휴전이 임박했던 1953년 6월 13~15일 사이에는 전국 각처에서 대규모의 휴전 반대 집회가 열렸는데, 그 집회를 주도적으로 한 사람이 유호준 목사다.


   유00 목사에 대해서는 조심스러운 평가를 내렸다. 유 목사는 신사참배를 했고 전쟁 때 피난을 못 하면서 북한을 환영하는 데에 앞장서기도 한 인물이다. 그런데 북한이 물러나니까 교회협의 임원이 되는 등의 행보를 보였다. 이에 이 장로는 "왔다 갔다 하는 사람이다"며 재치 있게 평가했고, 이어서 "그 사람이 쓴 찬송가 가사가 <새 찬송가>에 포함되어 있다"며 새 찬송가의 문제점에 일침을 가했다. 한국교회에서 아름답지 못한 전통을 남긴 분들이 쓴 찬송가들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현재 살아 있는 인물들의 찬송가를 얼마나 포함시킬지에 대해서 각 교단별로 안배를 하기도 했다. "살아 있는 사람들의 것은 극히 조심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며 강한 아쉬움을 토로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나중에 어떻게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북한의 가정 교회 출발과 경험


   이어 강의안에 기록된 순서대로 '북한 교회의 반응'을 다루었다. 남한 교회와 마찬가지로 북한 교회도 여러 방식으로 전쟁 수행을 도우며 전승을 기원했다. 북한 교회의 일부 지도자들은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자 평양에 모여 서울 탈환 환영 예배를 드리기도 했다.


   한편 유엔군이 후퇴할 때 미처 월남하지 못하고 북한에 남아 있던 기독교인들은 1951년 초 북한 정부가 반공 단체 가담자나 연합군에 협조한 사람을 색출할 때 큰 시련을 겪어야 했다. 이런 처지에서 북한에 남은 교인들은 전쟁 후 초대교회와 같이 교인의 집을 예배 처소로 정하여 비공개적으로 신앙생활을 했다. 1952년 7월 북한에서 월남한 교역자 한 사람은 부산에서 열린 북한 실정 보고회에서 북한에서 예배당이 아닌 다른 공간에서 행하는 종교 행위가 이미 전쟁 중에 시작되었다고 증언한 바 있다. 교회 형태의 신앙생활은 이미 사라졌고, 서로 통할 수 있는 몇 사람이 사사로이 모여 눈물의 기도를 하는 정도라고 했다. 이것이 북한 내 가정 교회의 출발이다.


   이 장로는 또다시 북한 방문 경험 이야기를 들면서 가정 교회의 구체적인 실상을 밝혔다. "북한에 공식적으로 나타나는 봉수교회와 칠골교회, 두 교회 밖에는 모두 가정 교회이다, 전국적으로 1만여 개가 있다고 말은 하지만 확인하기 힘들다. 평양 낙원 지역의 가정 교회 성도 7명 정도와 같이 예배드렸는데, 아코디언으로 찬송을 했다"고 말했다.


   구호단체 활동의 부정적인 면도 있어


   '북한 교회의 반응' 다음으로 '구호단체의 활동'에 대해 이야기했다. 전쟁으로 인한 수많은 피해 가운데서도 가장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것은 인명 손실과 그로 인한 사회문제였다. 참전 군인뿐만 아니라 수많은 민간인이 목숨을 잃거나 다쳤다. 1951년 8월 당시 정부가 집계한 피난민은 약 380만 명이었으며, 전시에 가옥과 재산을 잃은 전재민은 대략 402만 명이었다. 이때 이 장로의 집도 다 불에 탔다. 이 장로는 "엄정하게 보면 국가 배상을 해야 하는 것인데, 그때 배상 신청하는 사람들이 없었다. 국민의 권리를 생각하지 못했다. 운명으로 다 받아들인 것"이라고 회고했다.


   1951년 당시 남한 인구 약 2100만 명의 절반이 구호를 필요로 하는 상황에 처해 있었다. 한국 정부나 민간단체는 그런 상황에 적절히 대응할 수 있는 여력이 없는 상황에서 외국 정부와 외국 민간단체의 대규모 원조가 시작되었다. 이때 선교사들이 구호를 목적으로 많이 들어왔는데, 외국 선교사들 중에는 신학 교육을 제대로 받지 않은 사람들도 많았다. 이에 "한국교회가 이렇게 혼탁하게 된 데에는 이런 문제들과 관련이 깊다"고 말했다.


   이어 구호단체의 전반적인 활동에 대해서는 "부정적으로 보면 파헤칠 것이 많다. 세계 여러 곳에서 물자가 오면 교회가 선한 방법으로 잘 배분해 줄 것이라 생각했으나 그렇지 못한 면도 있다. 그걸로 장사하는 사람, 치부하는 사람이 있었다"고 운을 떼었으나, "부정적인 것을 이야기하기가 부끄러울 정도의 일이 있었다"며 절제했다. "원조 물자를 많이 타내기 위해서 현실보다 더 심한 폐해 현장을 찾아가 사진 찍고 요청했던 사람들도 많았다"고만 말했다.


   당시 구호 활동은 외국 구호단체가 주도했지만, 여기에 한국교회가 참여함으로써 한국 교인들은 구호 활동과 사회봉사의 현장에서 일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이러한 경험은 이후 한국교회와 기독교 NGO들이 북한 지역을 포함한 세계 전역에서 구호와 봉사 활동을 하는 데 큰 자원이 되었다. 이렇게 원조를 받으면서도 우리 스스로의 역량을 키우고 구호 활동에 앞장서며 찬란한 영향을 끼치기도 했으나, 어두운 면도 없지 않았다. "구호단체 70%가 개신교라는데도 기독교가 욕을 많이 먹는다. '몇몇 큰 교회에서 결국 자식에게 세습했다'거나 '장로 대통령의 실정' 등의 이야기가 나오면 이때까지 기독교가 선한 일을 한 것이 다 무너지는 것"이라며 깊게 통탄했다.


   또한 외국 구호단체의 부정적 영향도 언급했다. 구호품 분배 과정에서 교회가 다툼의 장이 되기도 했던 것. 미국 교회 및 정부가 제공한 많은 구호품과 원조는 많은 한국인이 미국을 일종의 구세주 국가로 여기게 만들었다. 이러한 인식은 "외국 원조의 가장 큰 수혜자였던 교회에 특히 많은 영향을 미쳐 그 후 한국교회가 친미적인 태도를 가지는 데 기여했다"고 지적했다.


   기독교인 대통령 이승만?


   해방과 국가 재건 시기부터 남한과 북한 두 지역의 교회 지도자들은 현실 정치에 깊이 개입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정치 활동은 정당을 조직하는 일에서부터 정치적 영향력 행사를 위한 기독교 단체의 결성, 정계 투신 등 다양한 방법으로 진행되었다. 또 교회 지도자들 중에는 정치 활동에 직접 나서지는 않고 설교나 글을 통해 정부 수립의 기본 이념과 방향을 모색하고 제시하는 사람도 있었다. 친기독교적인 이승만 정부가 들어선 이후에는 교회와 정부의 유착이 종교와 정치의 관계에서 중요한 문제로 등장했다.


   1952년 8월에 실시된 '정·부통령 선거와 기독교' 단락에서 기독교의 이승만 지지 제목이 나오자 "이게 중요하다. 이걸 통해서 정교 유착이 이루어진 것"이라며 강조했다. 기독교선거대책위원회는 선거 운동을 위해 전국 3500여 교회에 위원회를 조직하여, 선거 운동을 지원하기로 한 후 '기독교인의 대통령' 이승만에게 표를 던질 것을 호소했다. 이승만을 지지한 것은 그가 국기 경례를 주목례로 변경하였고, 감옥 전도 제도와 군종 제도를 설치했으며, 국가 의식을 기독교식으로 하는 등 '정치 기독화'에 공헌했고 앞으로도 민족의 기독교화에 앞장설 인물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신도들에게 이승만의 호교 정책을 감안하여 투표할 것을 요청했다. 이처럼 교회의 이승만 지지 내면에는 교회가 국가의 도움을 받고자 하는 기대가 들어 있었다.


   결국 이승만은 암묵적 동의를 통해 가장 강력한 부통령 후보였던 이범석의 선거 운동을 방해하고 장로교 목사 함태영이 당선되도록 만들었다. 이렇게 교회의 협조를 받아 기독교인 정·부통령이 당선된 후 취임식에서 이승만은 "역사적인 식전에 국가 민족의 장래를 위해 먼저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요청"하고 국회의원 중 장로교 목사 배은희를 지명했다. 또한 1948년 5월 31일 제헌국회 시에 이윤형에게 국회 개원 기도를 시켰다. 이에 대해 이 장로는 "이처럼 이승만은 제도와 형식적인 면을 보면 충실한 크리스천 같은데, 정적을 제거하고 부정 투표를 했던 데에서는 기독교 냄새가 전혀 안 난다"며 비판하기도 했다.


   교회의 휴전 회담 반대 기도회가 이데올로기 차원에서 이승만 정부와 교회가 긴밀히 협력 관계를 맺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면, 1952년 교회의 선거 운동은 현실 정치에서 이승만 정부와 교회를 유착시켜 주는 중요한 요소였다. 1960년 3월 제4대 정·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교회와 이승만 정부 사이의 유착 관계는 다시 살아났다. 자유당 선거중앙대책위원회는 정·부통령 선거가 교회의 발전과 신앙생활의 안정에 중대한 영향을 줄 터이므로 기독교인인 이승만과 이기붕에게 투표할 것을 교인들에게 호소한 것이다.


   정교 유착은 모두에게 해 끼쳐


   이 장로는 기독교 지도자들이 자유당선거지원(1960년 2월 18일)을 한 사진 자료를 설명하면서 "사진이라도 찍지 말든지. 안 했으면 이런 증거가 안 남았을 텐데…"며 신랄하게 비꼬았다. 자유당 정권은 제4대 정·부통령 선거에서 부정선거를 자행해서, 학생 시위와 국민 저항에 봉착했었다. 이처럼 1950년대 교회의 선거 운동을 통해 형성된 교회와 이승만 정부의 유착 관계는 결국 이승만 정권과 교회 모두에게 치명적인 해를 끼쳤다.


   이후 부정선거를 계기로 4.19 혁명이 일어났다. 어떤 글에 보면 4.19가 교회 젊은이들이 의분을 내면서 일어난 것으로 묘사한다. 이 장로는 그런 서술이 분명히 '잘못된 사실'이라고 바로잡았다. "4.19를 맞이하면 기독교인으로서 부끄럽게 생각해야 한다. 절대 한국 기독교 청년들이 움직여서 일으킨 것이 결코 아니다"고 강조하면서, 나아가 "기독교적 정권이라 할 수 있는 이승만 정권이 몰락했다는 점도 중요하다. 이승만의 사명은 일제 잔재 청산, 민주주의 기반 수립, 남북 화해였지만, 이 세 개를 하나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특히 부정선거로 쫓겨난 것은 민주주의 기반을 수립하는 책임도 제대로 못 한 것이다"고 거듭 역설하며 강의를 마쳤다. (2012.1.29.뉴스앤조이 / 김태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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