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사랑으로/예수님의기도로돌아가자

초대교회의 기도생활(2)<상>

에바다. 2012. 3. 1. 16:44


    초대교회의 기도생활(2)<상> 이 장에서는 기도와 관련하여 예루살렘 교회에 일어났던 일들을 생각하고자 한다.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다 일어났던 기적의 사건, 기도 응답으로 받은 성령 총만의 경험, 예수님을 본받은 사도들의 목회 철학,그리고 예수님을 본받은 예루살렘 교회의 기도생활을 각각 살펴보고자 한다. 1.기도와 기적(행3:1-10) 제구 시 기도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나면서 앉은뱅이 된자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베드로가 요한으로 더불어 주목하여 가로되 우리를 보라 하니 그가 저희에게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 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니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및 하나님을 찬미함을 보고 그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의 당한 일을 인하여 심히 기이히 여기며 놀라니라(행3:1-10) 사도 베드로와 요한은 유대인들의 기도 관습에 따라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갔다. 본문에 언급한 시간은 제9시, 오늘날 오후 3시로 구약에서 저녁 번제를 드리는 시간이다. 유대인들은 하루에 두번(아침과 저녁) 씩 드리는 번제를 지켜보면서 하나님꼐 기도하곤 했다. 예루살렘 교회 는 시간이 있을 때마다 기도를 할 뿐만 아니라, 유대적인 관습에 따라 전통적인 기도시간도 사용했다. 아마 아직도 메시아를 믿지 아니하는 유대인들을 구원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베드로와 요한이 유대인들의 오후 기도시간에 성전으로 올라 간 것이다. 성전에서 기도할 수 있는 장소는 사람에 따라 각각 달랐다.성전은 바깥뜰과 안뜰로 나누어졌는데 이방인들의 경우 성전 바깥뜰까지만 갈 수가 있었다.유대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바깥뜰과 안뜰 사이에 경계선이 있었고 그 경계선 돌에는 헬라말과 라틴말로 "이 경계선을 넘는 이방인은 죽임을 당할지니라"는 이방인들을 향한 경고문이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성전의 안뜰은 셋으로 나누어진다. 먼저 이스라엘 여자들이 들어 갈 수 있는 여자들의 뜰이 있고, 그 다음은 이스라엘 남자만 들어갈 수 있는 남자들의 뜰, 마지막으로 제사장들과 레워인들만 들어갈 수 있는 제사장들의 뜰이 있다. 제사장들의 뜰이 성전 가장 안쪽에 있는 뜰이다. 이렇게 이방인이냐 유대인이냐, 남자냐 여자냐, 제사장이냐 평민이냐에 따라 성전 뜰에 접근할 수 있는 정도가 각각 결정됐다. 성전 미문에 앉아서 그걸하던 걸인은 이방인들의 뜰에서 이스라엘 여인들의 뜰로 들어가는 문이든가 아니면 여인의 뜰에서 이스라엘 남들의 뜰로 들어가는 문에 있었던 것 같다. 베드로와 요한이 나사렛 예수님의 이름으로 선천적인 지체 장애인 걸인을 기적적으로 치료한 사건은 독특하기 때문에 기록된 것으로 보인다. 이 기적 이전에도 사도들을 통하여 많은 기적과 표적이 일어났으며(행2:43) 이 후에도 많은 기사와 표적이 사도들의 손을 통하여 나타났는데(행5:12) 그중 스데반 집사도 큰 표적과 기사를 행했다(행6:8) . 이러한 기록들을 통해 볼때 예루살렘 교회에서는 사도들을 통하여 많은 이적과 기사가 일어난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본문에 기록된 구걸하는 앉은뱅이 치료 사건만이 예루살렘 교회에서 행해진 모든 기적들 중 성경의 기록으로 남았다. 물론 다른 지역 교회들에서 일어난 기적 사건들은 사도행전 다른 부분에 기록되어 있다. 왜 이 사건만 독특하게 기록했을까? 아마도 이 기적이 복음 전도에 기여한 중대한 역할 때문일 것이다.이 기적을 통한 복음 증거로 인해 남자만도 약 5천 명이 믿게 되는 역사가 일어났다.(행4:4). 우리는 기도하러 성전으로 올라가는 베드로와 요한의 마음에서 기도하는 성도들의 바른 자세를 배운다. 이 두 사도가 보여준 세가지 자세를 보자. 첫째. 이들은 예수님의 이름의 가치를 아는 제자였다(행3:1,7). "금과 은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는 베드로의 말은 예수님 에게 최고의 가치를 두는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예수님의 가장 위대한 가치를 모르고 성전 미문에 앉아서 구걸하는, 날 때부터 앉은뱅이 된 자에게 자기가 최고로 생각하는 예수님을 선물로 제시 했다. 이것보다 더 큰 선물이 어디에 있는가? 불행에 빠져 있는 자들에게 우리가 줄 수 있는 것 중 예수님을 소개하는 것보다 더 귀중한 것이 어디 있는가? 걸인은 하루목숨을 연장할 돈을 구하였으나 베드로와 요한은 앉은뱅이의 인생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그리스도예수를 제시했다. 그야말로 찬송가 가사처럼 아름다운 신앙의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 바 꿀 수 없네/ 영 죽을 내 대신 돌아가신 그 놀라운 사랑 잊지 못해/ 세상 즐거움 다 버리고 세상 자랑 다 버렸네 /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예수 밖에는 없네"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시간에 성전으로 올라간 것은 예수님의 최고 가치 때문이다. 그들은 개인적인 욕망이나 세상적인 욕심 때문에 아니고, 가장 귀하신 예수님 때문에 기도시간에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 갔다. 이 자세가 기도하러 나오는 우리의 자세가 되어야 한다. "내가 사모하고 바라며 최고로 여기는 것은 우리 주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하는 아름다운 신앙의 자세로 기도해야 할 것이다. 둘째, 베드로와 요한은 겸손하게 예수님만 높이는 자세를 가졌다. (행3:12-16). 놀라운 기적으로 인하여 모든 사람들의 주목이 베드로와 요한에게 집중되었다. 그들은 이 두 사람이 굉장한 능력 을 받아서 이런 일을 하는줄로만 생각했다. 이때 베드로는 겸손하게 그들의 능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낫게 한 것이 아니고 유대인들이 잡아 십자가에 죽였으나 하나님께서 부활시킨 생명의 주, 영화롭게 된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낫게 하였다고 증거했다(행 15-16). 어러한 증거를 하면서 예수님을 잡아 죽인 죄를 회개하고 죄 용서를 받을 것을 유대인들에게 권고했다. 기적은 자기들이 행한 것이 아니고 높임 받으신 그리스도께서 하신 것이기 때문에 바로 이 기적 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그들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복음을 전했다. 자기들은 이렇게 영광을 받으신 그리스도의 증인에 지나지 않는다고 자기 자신을 겸손하게 낮추었다(행3:15). 자신들은 낮추고 그리스도를 높이는 겸손한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이 겸손한 모습은 누가복음 18장 9-14절에 언급한 교만한 바리새인 과 세리의 비유에서 겸손한 세리의 모습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 두 본문의 공통점은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갔다" 는 것이다 (눅 18:10 행 3:1). 이 모습이 기도하러 주님께 나오는 모든 신자들이 모 습이 되어야 한다. 이렇게 겸손한 마음으로 기도할 때 주님은 이러한 사람을 들어 사용하신다. 겸손한 두 제자의 복음 증거를 통하여 남자 만 약 5천 명이 주님께 돌아오는 대 역사가 일어났다(행 4:4). 셋째, 두 사도는 예수님을 높이고 증거할 때 당하는 핍박과 반대를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행4:1,2). 베드로돠 요한은 구걸하는 지체 장애인에게 행한 기적과 관련하여 그리스도를 높이고 그의 부활을 증거했기 때문에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행4:3). 만일 이들이 기적을 행하신 그리스도를 높이지 않았다면 이런 수난은 없었을 것이다. 이 기적을 우연의 소관으로 돌렸으면 철장 신세는 지지 않 았을 것이다. 제사장들과 부활이 없다고 하는 사두개인들은 사도들이 이 기적의 사건과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연결하지 못하게 하려고 온갖 위협을 가했다. 이때 베드로와 요한이 기적의 사건과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연결하지 않았으면 박해와 위협은 금방 없어졌을 것이고, 아마도 큰 기적을 행한 영웅으로 대접받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가치 때문에 주저 없이 핍박과 고난을 택했다. 우리는 이 점에서 예수님의 이 두 제자가 예수님을 닮은 모습을 본다. 기도하지 않았던 그들이 기도하기 시작하면서 예수님을 본받기 시작 했을 뿐 아니라, 고난앞에서 예수님의 자세를 그대로 가지게 되었다. 예수님을 닮은 그들의 모습은 두 구절의 대조에서 잘 볼 수 있다.
      하루는 예수께서 성전에서 백성을 가르치시며 복음을 전하실 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장로들과 함께 가까이 와서 말하여 가로되 당신이 무슨 권세로 이런 일(성전을 정결케 하고 말씀을 가르치시는 일)을 하는지 기 권세를 준 이가 누구인지 우리에게 말하라(눅20:1,2)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아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 의 문중이 다 참예하여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묻되 너희가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가로되 백성의 관원과 장로들아 만일 병인에게 향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삶이 어떻게 구원을 얻었느냐고 오늘날 우리에게 질문하면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배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행 4:6-10)
    2. 기도와 성령 충만(행4:23-31) 아래 기록은 예루살렘 교회가 합심으로 한 기도의 내용을 상세 하게 기록하고 있다는 점에서 초대교회의 기도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먼저 그 내용을 보자, 특별히 아래 본문 중 인용 부호 안의 내용은 합심기도의 내용이다.
      사도들이 놓으매 그 동료에게 가서 제사장들과 장로들의 말을 다 고하니 저희가 듣고 일심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가로되 "대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은이시요 또 주의 종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성령으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였는고 세상 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 하신 이로소이다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동하여 하나님의 기름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스려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성에 모였나이다 주여 이제도 저희의 위협함 을 하감하옵시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 하게 하여 주옵시며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옵시고 표적과 기사 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가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행4:23-31).
    합심기도의 배경은 베드로와 요한의 석방이다. 그들이 예루살렘 종교지도자들로부터 석방되어 그들에게 돌아와 있었던 일을 보고 할 때 성도들은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성도들은 사도들의 설명을 듣자마자 곧 합심기도를 시작했다. 그들의 기도내용을 분석해 볼 때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발견한다. 첫째, 그들은 하나님을 주권자로 보았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실 뿐만 아니라(24절), 역사의 사건들을 미리 정하여 움직이는 역사의 주장자임을 알았다(28절). 둘째, 그들의 기도는 성경 말씀을 인용한 기도이다. 그들은 성경이 하나님의 성령께서 사람들을 통해 하신 말씀이라고 이해하고 있었다. 그들의 기도는 시편 2편의 이해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들은 시편 2편에 근거하여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사건뿐만 아니라 그들의 고난 과 박해를 이해했다(25,26절). 시편 2편에 비추어 하나님의 종 그리스도 를 잡아죽인 세력이 지금 그들을 위협하고 있음을 이해하게 되었다. 주어진 현실을 성경에 비추어 이해하고 성경에 비추어 기도하는 성경 중심의 기도를 드린 그들의 자세를 엿보게한다. 셋째, 그들의 기도는 복음 전파의 사명 감당을 위한 기도이다.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복음 전파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세가지를 기도했다.유대 종교지도자들의 위협을 하나님께서 내려다 보시라는 것과 이러한 위협에도 불구하고 담대히 주님의 말씀을 증거할 수 있게 해달라는 것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종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적과 기사 가 일어나게 해달라는 것이다. 예루살렘 교화가 기도를 하나님꼐서 위임하신 사명을 감당하라고 주신 방편으로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정하신 쯧을 이루는 것이 기도임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합심기도에 즉시 응답해 주셨다. 누가에게 기도 응답은 이미 보았듯이 대부분의 경우에 즉시 주어진다. 기도를 마쳤을 때. 모인 장소가 진동하고 그들은 성령 충만을 받게 되었다(31절). 그들은 성령의 충만으로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게 되었다. 이것은 성령 충만의 결과가 담대하게 복음의 말씀 증거로 나타남을 보여준다. 베드로와 요한이 예루살렘의 종교지도자들 앞에서 담대하게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높일 수 있었던 것은 성령 충만의 결과였듯이 (8,13절),이제는 온 교인들이 사도들과 같이 담대하게 말씀을 증거하게 되었다(31절). 사도행전에서 복음의 담대한 선포는 일반적으로 성령 충만의 결과이다(행 4:13; 6:5,10,15;9:17-21;28:31). 담대하게 말씀을 전파할 수 있게 해달라는 기도는 응답이 됐는데, 이적과 기적을 위한 기조는 어떻게 됐는가? 이 기도 역시 응답이 되 었다. 응답의 기록은 사도행전 5장 12-16젏에 등장한다. 사도들은 전과 같이 많은 이적과 기적을 행했다. 물론 높아지신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통하여 하신 것이다. 병자들이 들것에 실려 사도들에게 보내졌고 그들 에게 나온 많은 병자들이 모드 치료받는 역사가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귀신들린 자들도 나음을 받는 역사가 일어났다(행5:16). 기도 응답은 사도들이 예수님이 행하셨던 각종 기적들을 행하는 것으로만 나타나지 않고 심지어 평신도들의 손을 통해서도 기적의 역사가 나타났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스데반 집사(행6:8)와 빌립 집사이다(행8:4-7). 병고침의 기적 역사를 통하여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돌아오는 결과가 나타났다. 여기에서 우리가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사실은 본문에 기록된 예루 살렘 교회의 합심기도 이전에는 평신도들을 통한 기적이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행4:24). 합심기도 전에는 사도들을 통해서(행4:24) 이적과 기적이 많이 나타났으나 평신도들을 통해서 기적이 나타난 것은 사도행전 4장 24절의 합심기도 이후 처음이다. 이것은 결코 우연일 수 없다. **3.사도들의 목회 철학(행6:1-4)는 다음 <하> 에서** -예수님의 기도로 돌아가자에서-
    ♡주의 사랑으로 오늘도 행복하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