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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의 기도생활(1)120문도의 기도<하>

에바다. 2011. 12. 17. 15:11


    초대교회의 기도생활(1)<하> 2.예루살렘 교회의 네가지 특성(행2:42-47)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러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이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 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행 2:42-47) 위의 본문은 초대 예루살렘 공동체의 삶의 모습을 요약해서 보여준다. 물론 비슷한 기록이 사도행전 4장 32-37절에 거듭 언급되어 있다. 여기에 묘사된 예루살렘 공동체의 삶은 너무나 아릅답고 휼륭하다. 사라으 교제,구제,뜨거운 기도가 넘치는 거러한 교회의 모습니다. 그리고 교회 안팎으로부터 칭찬이 끊이지 않는 교회였다. 오늘날 교회들의 모습과는 많은 거리가 있다. 이 기록은 오순절 사건과 이날에 있었던 베드로의 설교 다음에 나와 전체 문단의 결론역할을 한다.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으로 120명의 제자들이 각기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였고, 예루살렘에 머물고 있었던 각 나라에서 온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은(행2:5) 각기 자기 방언으로 제자들이 하는 방언을 알아들었다. 그러나 그들 중 일부는 이 사건으로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그들이 술 취한 까닭이라고 오해했다(행2:13). 이에 대한 답변으로 베드로는 일어나 요엘 2장 28-32절(히브리성경은 3:1-5)을 인용하면서 오순절에 일어난 사건이 요엘의 예언성취임을 설명하고, 바로 이 예언의 성취 배후에는 시편 16편 8-11절의 예언 성취가 있음을 천명했다. 시편16편 8-11절은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시킨 그리스도의 높아지심을 예언하는 시편이다(행2:14-36). 예수님은 주와 그리스도로 높아지셨기 때문에 바로 그 자격으로 예루살렘 사람들이 목적하고 있는 성령의 강림 근거로 청중을 권면하고 권고했다. 그러자 그 증거의 결과 로 일차적으로 삼천 명이 회개를 하고 세례를 받았다. 이렇게 형성된 예루살렘 공동체의 삶을 그리고 있는 것이 우리가 택한 본문의 배경이다. 누가는 왜 예루살렘 교회의 아름다운 모습을 묘사하면서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을 종결하는가?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형성된 하나님의 모든 교회는 반드시 예루살렘 교회가 보여주었던 특성을 가져야 한다는 가르침을 주기 위해서 이렇게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누가의 기록 관점에서 볼 때 그가 결론적으로 언급한 예루살렘 공동체의 삶의 모습은 돌발적인 것이 아니라 항구적인 의의를 가진다. 다시 말해서 저자는 예루 살렘교회의 삶의 모습이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과 베드로의 영감 있는 설교의 결과임을 이해한다는 것이다. 성령 강림 사건의 일차적 목적은 하나님의 새 백성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이고, 그 궁극적 목적은 결론 부분에서 묘사된 대로 하나님의 새 백성이 새로운 삶을 살아가도록 하는 데 있다.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에 의해 재창조된 모든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와 같이 살아야 할 것을 강조 한다. 이 점에서 예루살렘 공동체의 삶의 모습 은 그들의 역사적인 삶의 모습일 뿐만 아니라 후대 교회가 따라야 할 삶의 표준 내지 규범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예루살렘 교회의 생활 특성을 네 가지로 살펴 보고자 한다. 이 네 가지 모습은 오늘날 교회들이 본받고 실천해야 할 이상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42절은 네가지 중요한 요소를 소개한다. 이 네가지는 사도의 가르침 (테 디다케 톤 아포스톨론:te didaxe twn apostolwn) 교제(테 코이노니아 : te klasei tou artou), 그리고 기도(테 프로슈카이스:te proseuxais)이다. 우리말 성경(개역판)에는 예루살렘 교회가 마치 기도하는 일에만 전혀 힘쓴 것처럼 되어 있다. 그러나 이 번역은 42절을 너무 풀어서 한 것이기 때문에 장확하지 않다. 동사 "전혀 힘쓰다" 는 말은 나머지 세 개 항목도 목적어로 지배한다. 정확한 번역은 "그들은 사도의 가르침, 교제, 떡 떼는 일 그리고 기도에 전심하고 있었다" 이다. 이 해석에 비추어 볼 때 예루살렘 교회 교인들(41절에 언급된 3천 명의 신도)은 각종 기도는 물론 사도들의 가르침, 교제, 떡을 뗌에도 헌신적 으로 참여 했음을 할 수 있다. 특별히 "전혀 힘썼다"는 말은 우리가 이미 앞에서 본바와 같이 사도향던 1장 14절에 사용된 동사와 동일한 '프로스칼데레오'(peoskarelew)이다. 위에서 지적한 대로 어떤 일에 대한 충성심, 집착성,인내성,계속성,지속성,간절성을 의미한다. 예루살렘 교회가 사도들의 가르침, 교제,떡을 떼는 일, 기도에 충성하고 집착하며, 인내 있게 하고계속적으로 간절하게 참여했음을 말해준다. 예루살렘 교회의 네가지 특성을 간단하게 살펴보자. ①가르치고 배우는 교회 사도들은 3천명을 개종시키는 일로 만족하지 않았다. 그들은 계속적으로 성도들을 가르치는 일에 주력했다. 온교회가 사도들의 가르침을 헌신적 으로 따르고, 사도들이 초신자들을 열심히 가르치고 교인들은 하나도 예외 없이 헌신적으로 말씀을 배우는 모습이 그려진다. 이 모습이야 말로 마태복음 28장 18-20절에서 에수님이 제자들에게 당부하신 대로 사도들 에게 본부한 모든 것을 가르치고 있는 순종의 모습니다. 오순절의 성령 강림으로 복음의 이제는 민족적이고 지역적인 한계를 넘어 다민족적, 다지역적으로 퍼져나가는 모습을 사도행전에서 본다. 이것은 다름 아니라 승천하시는 예수님이 마태복음 28장의 "너희는 온 족속에게 가라" 는 말씀이 서위하도록 하나님께서 주도하신 업청난 사건임을 본다. 이러한 성취의 흐름 속에서 사도들은 예수님의 본부하신 대로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을 가르친다. 교회 사역의 모든 기초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 말씀은 바로 배워서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이 없이 교회는 바른 토대 위에 설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배우고 가르치는 일을 무시한 교회 사역은 어떤 변명으로도 용납될 수 없다. 바른 배움이 없는 교회의 모든 활동은 모래 위에 세운 집과 같다는 사실을 깊이 새겨야 한다. 누가는 예수님을 맛있는 음식으로 대접하고자 하는 마르다보다는 예수님의 발앞에 앉아 말씀을 배우는 마리아를 더 칭찬하신 점을 기록하고 있다(눅10:38-42). 예수님은 발 앞에 앉아 가르침을 받는 마리아를 더 인전했다. 더 나아가 예수님을 낳은 마리아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자들이 더 복된다고 말씀하셨다(눅11:27,28). 베뢰아 교회 사람들은 말씀을 간절하게 받고 이를 확인하기 위해 성경을 검토했다 (행 17:11). 오늘날 우리는 각종 잘못된 사상과 철학이 홍수처럼 밀려드는 시대에 살고 있다. 사도 바울의 예언대로 사람들이 진리의 가르침에서 떠나 신화와 허탄한 이야기에 치우치는 시대이다(딤후 4:3,4). 사람들은 귀신의 가르침, 뉴에이지사상, 요가, 명상, 신비사상, 윤회사상, 점술에 전래 없이 휘둘리고 있으며 공공연히 방송 매체들이 뉴에이지 사상을 선전하고 전파하는 모습을 본다. 하나님의 말씀 곧 진리가 땅에 떨어지고 허망하고 허탄한 이야기들이 진리 대접을 받고 있는 시대에 교회는 말씀의 가르침으로 돌아와야 한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설교는 있느나 가르침이 없는 교회로 전락하고 말았다. 제한된 성도를 위한 제자 훈련은 있어도 온성도를 위한 집중적이고 체계적인 가르침이 없는 안타까운 현실을 본다. 감정을 흥분시키는 부흥회에서 말씀 위주와 사경회로 돌아와야 한다. 한국 교회의 뿌리는 하나님 말씀 사랑이다. 100여년 전에 한국 교회에 복음이 들어 올 당시는 문맹률이 아주 높았다. 이 높은 문맹률을 낮추는 데 기여한 사람들이 다름아닌 초대 한국 교회 성도들이다. 왜 그런가? 아무리 무식한 사람이라도 예수를 믿기만 하면 사람들이 글을 읽을 줄 알게 됐다는 사실은 초대 한국 교회가 얼마나 성경을 사랑했는지 말해준다. 성경읽기에 열심인 기독교인들로 말미암아 문맹률이 급격하게 줄어들게 되었다. 당시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은 한국 교회를 성경 기독교(Bible Chriatianity) 라고 불렀고, 교인들을 가리켜 '성경을 사랑하는 자'(Bible-lover), 혹은 '성경 을 사랑하는 기독인들' (Bible-loving Christians)이라 불렀다고 한다. 선교사들의 보고에 따르면 1901년 평양에서 열린 여성도 사경외에는 300리나 떨어진 데서 온 사람들이 있었다고 한다. 1902년에 평양에서 남자 사경회에는 목포, 무안 지역에서 참석한 성도들도 있다고 한다. 한 여성도는 아이를 업고 머리에 쌀을 인 채 300마일을 왔는데 "때묻고 닳은 성경"이 손에 있었다고 한다. (이만열,「한국 성서 운동 100년의 회고와 전망」,멀티미디어 시대의 교회, 145쪽). 성경을 사랑하는 이 모습이 다시금 한국 교회에 회복돼야 한다. ②성령의 교제가 중심인 교회 사도행전 2장 42절에 '그 교제' (테 코이노니아 : te koinwnia)란 말이 사용되었다. 이 말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학자들에 따라서 의견이 다르다 (사도적 교제, 영적 교제, 재물을 아움, 성령의 공유등). 본문 자체에서 이 교제가 무엇을 가리키는지 분명하게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2장 전체에서 그 의미를 찾아야 한다. 우리는 2장 전체의 문맥을 볼 때 '그 코이노니아'란 말이 지칭할 수 있는 것은 예루살렘 공동체가 성령강림 사건을 통해 모든 성도가 성령을 소유하게 된 구원적인 사실밖에 없음을 알 수 있게 된다. 열두 사도들은 120문도와 함께 예수님이 승천하시면서 본부하신대로 성령 부어주심을 기다리면서 같은 성령을 소유하게 되었다(행 2:1-4). 이렇게 같은 성령을 모든 신자가 보편적으로공유하게 된 것은 구약 선지자 요엘의 예언 성취이다(요엘 2:28-32). 직무수행을 위해 제한된 사람들에게만 성령이 주어졌던 구원 역사의 옛 시대는 지나가고 예수님의 구속 성취로 말미암아 이제는 하나님의 모든 백성이 성령을 함께 선물로 받는 구원의 새시대가 도래하게 되었다(행 2:17,18). 열두 사도와 120제자들만 성령을 공동으로 소유하게 된것이 아니라. 사도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고 세례를 받은 삼천 명도 한결같이 성령을 소유하게 되었다(행 2:41). 이 중요한 사건 외에 그 무엇도 사도들과 삼천 명의 신도들이 공동으로 소유한 것은 없다. 그러므로 주석가들이 '그 코이노니아' 란 예루살렘 공동체에 속한 믿는 자에게 보편적으로 임한 성령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도 일리가 있다. '그 코이노니아'를 성령의 공유(the common share of the Holy Spirit)로 이해할 때 뒤따르는 구절들을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성도들이 마음을 같이하고 재물을 함께 나누는 일보다 성령을 공유 하는 일이 더 놀라운 일이라는 것이다. 성도들이 천차만별로 다른 배경에도 불구하고 한 마음으로 일치 단결한 사실(행2:44-46)은 성령을 함께 소유 하는 구원의 대 경험이 그들 각자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성령을 공동 소유함으로써 성도들이 내적인 일치 단결을 이루고 외적으로도 재물을 나눌 수 있었다. 예루살렘 교회가 교인들을 위한 구제에 힘쓸 수 있었던 것은 예루살렘 온 교인들이 성령을 받았고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성령의 감동을 받아 재물에 대하여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되었다. 재물의 소유권은 자신에게 있으나 재물 사용권은 공동체에 있다는 깨달음이다. 재물은 나의 소유니까 나만 사용해야 한다는 이기적인 생각에서 벗어나 교회의 공익을 위해서 교회가 필요로 하면 언제든지 자박적으로 재물을 위탁하는 역사를 만들었다. 내 것이니까 내 맘대로 한다는 풍조는 오늘날 신다들이 성령의 인도를 받지 못한 데서 비롯되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③ 식탁 교제가 풍성한 교회 학자들 사이에는 떡을 떼는 것이 성만찬을 가리키는지 아니면 성도들 사이의 식탁교제(애찬)를 가리키는지는 의견이 분분하다. 떡을 뗀다는 말 자체로 볼때 세례 받은 성도들이 성찬에 참여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성도들의 모임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3천명의 성도가 한 장소에 모일 수 있는 건물이 없음을 감안할 때, 아마도 성도들은 사도들을 중심으로 교구를 나누었을 것이다. 한 가정에 120-150명'이상을 수용할 수 없었다. 성도들이 가정에서 모일 때 성찬과 애찬이 동시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46절에 누가는 떡을 뗀다는 말의 의미를 설명한다. 여기서 언급하는 두 가지 식사는 "떡을 떼는 것"과 "음식을 먹는 것" 이다. 따라서 42절에서 언급한 "떡을 떼는것"을 두 가지로 세분해서 설명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들이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었다" 는 47절 하반절 말씀은 성도들 사이에 있었던 가정 공동 식사였음이 분명하다. 그러면 47절 상반 절에 나온 "떡을 떼었다" 는 말은 성찬을 의미하는 것으로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결국 우리는 47절에서 두가지 사실을 발견한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성찬이 정규 식사와 함께 실행이 되었다는 사실이고, 또 하나는 성찬이 돌아가 면서 가정에서 모일 때에 거행되었다는 사실이다. 물론 사도들의 감독 하에 진행됐을것이다. 가정 단위를 놓고 볼 때 우리는 각 가정 모임이 소그룹 성격이었음을 간과할 수 없다.아무리 성도들이 모인 집이 크다고 할지라도 200여 명 이상은 수용하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큰 무리가 성전뜰에서 모였지만 성전이 아니라 각 가정에서 성찬이 거행되었 다고 말하는 누가의 의도를 주목한다. 오늘날 교회들이 지키는 관습에 의하면 소그룹으로는 성찬을 거행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사실을 볼 때 이는 굉장히 놀랍다. ④ 기도에 전적으로 헌신한 교회 예루살렘 교회의 태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있다면 120문도들의 헌신적인 합심기도이다. 이들은 기도에 전혀 힘쎴다(행1:14). 여기에 '전혀 힘쎴다' 는 말은 사도행전 2장 42절에 나온 것과 동일한 단어이다. 우리는 120문도를 예루살렘 교회의 핵심요원으로 볼 수 있다. 이들의 헌신적인, 지속적인, 끈질긴 기도를 예루살렘 온 교회가 본받게 되었다. 예수님의 약속에 따라 함께 모여서 기도를 하던 사도들과 120명의 문도들이 성령의 강림을 체험하였다(행 1:14,24; 2:1). 이렇게 기도하던 예루살렘 공동체는 숫자가 3.000명으로 불었어도 역시 각종 기도를 하는 일에 전적으로 헌신했음을 누가는 말한다. 사도행전 3장 1절에는 요한과 베드로가 지정한 기도 시간에 올라가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사도행전 4장 24-32절에 우대 지도자들의 위협을 느낀 예루살렘 교회가 간절하게 기도하는 기도 내용과 그 응답이 기록되어 있다. 오순절 성령 강림이 있은 후 예루살렘 교회는 베드로가 순교의 위협에 있을 때 열심히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행 12:12). 그들이 모여 기도한 장소는 어떤 곳우로 지정된 것 같이 않고 어느 곳에서나 모임이 있을 때 기도한 것으로 보인다. 성전 뜰에서, 각 가정에서 모임이 있을 때 간절한 공동체 적인 기도를 드린 것 같다. 사실 사도행전은 기적으로 가득찬 책이다. 특별히 일어난 각종 기적들은 예수님이 행하시던 그러한 기적들로 이러한 기적들 보다 더 큰 기적은 날마다 구원받는 사람들이 더해지는 기적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기적과 동서에 등장하고 있는 것이 바로 기도이다. 사도행전 28장에서 기도란 말이 33번이나 언급되었다. 기도가 언급되지 않는 장은 5, 15,17-19,23-26장(바울의 변호)이다. 중요한 것은 사도행전에 나오는 거의 모든 기적들이 기도와 연결되었다는 사실이다. 초대교회들에게 주어진 기적은 우연이 아니라, 기도응답 이었음을 잘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초대교회의 네 가지 모습을 한국 교회의 모습으로 삼아야 하겠다. 첫째, 교회릐 기초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교회의 모든 활동은 말씀에 근거해야 하고 말씀에 통제를 받아야 한다. 바른 교회의 그본적인 모습은 가르치는 교회요 배우는 교회이다. 가르치고 배우는 모습이 한국 교회에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 들째, 교회의 모든 구성원은 성령을 소유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은 믿을 수 없다. 교회 온 교우가 지닌 공통점은 성령 공유가 되어야 한다. 온 교인이 한 사람도 빠짐 없이 성령을 모신 사람이 되고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사람이 될 때 교인들 사이에 진정한 사랑이 싹틀 것이다. 서로 돌보고, 방문하고, 구제하는 일들이 일어날 것이다. 셋째, 성도들 사이에 떡을 떼는 아주 친밀한 교제가 있어야 한다. 서로 모이기를 힘쓰고 교회 회집에 모일 뿐만 아니라, 구역별로 모여서 뜨거운 가족적인 식탁 교제를 하는 교회가 되어야 하겠다. 넷째, 기도에 헌신하는 교회가 되어야 하겠다. 교회의 교역자들과 제직들이 열심히 기도할 때 온 교우들은 제직들을 본받을 것이다. 이 네 가지 일에 한국 교회가 전적으로 헌신하고, 끈질기게 계속적으로 헌신할때 하나님께서 교회를 기쁨이 넘치는 교회로 만들어 주실 것이다. 서로 돌보는 사랑이 넘치는 교회가 되게 하실 것이다. 교회를 수적으로 증가하게 하실 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는 교회가 되게 할 것이다. 이러한 영적인 축복을 위해서 모두가 힘써야 한다. 참 교회의 모습을 어떤 방법론을 사용하느냐에 있지 않고, 얼마나 성실하게 예루살렘 교회의 네가지 모습을 실천하느냐에 있다. 예루살렘 교회의 본보기를 실천하는 데 촉매와 걑은 역할을 하는 것은 헌신적인 기도 외에 다른 것은 없다. **초대교회의 기도생활(2)는 다음장에서** -예수님의 기도로 돌아가자에서- ♡주의 사랑으로 오늘도 행복하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