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사랑으로/예수님의기도로돌아가자

초대교회의 기도생활(2)<하>

에바다. 2013. 3. 20. 17:58


    초대교회의 기도생활(2)<하> 3.사도들의 목회 철학(행6:1-4) 그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그 매일 구제에 빠지므로 (제외됨으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한대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공궤를 일삼는 것이 바땅치 아니하니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저희 에게 맡기고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 하니 (행6:1-4) 예루살렘 교회는 짧은 기간에 엄청난 부흥을 경험했다. 이 예루살렘 교회는 크게 두 부류로 나누어졌는데 헬라어를 사용하는 헬라파 신자 들과 아람어를 사용하는 히브리파 신자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은 서로 사용하는 언어가 달랐고 헬라 문화에 대한 이해도 서로 달랐다. 이렇게 두 부류로 구성된 예루살렘 교회는 3천 명, 5천 명의 대대적인 회개를 통하여 만여 명 이상을 육박하게 되었다. 이때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각기 재물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사도들의 발 앞에 자기 들 재산의 일부를 헌납하는 일이 일어났다(2:45-46). 이렇게 교회에 바쳐진 재산들을 교인들 중 궁핍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일을 사도 들이 담당해 왔다(행4:32). 교인들의 숫자가 급증하다 보니 헬라파에 속한 궁핍한 과부들이 교회 구제 대상에서 제외되는 일이 발생하였다. 12사도들은 모두 아람어를 말하는 갈릴리 출신의 히브리파 신자들이었던 것 같으며 더욱이 구제 업무를 주로 히브리파 사람들이 감당하면서 헿하파에 속한 과부 신자들이 부당한 처우를 받게 된 것 같다. 이로 인해서 헬라파 성도 들이 히브리파 성도들에게 원망과 불평을 하게 되었다. 바로 이때 12사도가 나와서 이를 중재한다. 문제에 직면한 사도들은 해결책을 제시한다. 사도행전 6장 2절에서 사도들은 모든 제자들을 불러 놓고 '말씀을 제쳐놓고 구제하는 일에 힘쓰는 것이 그들에게 마땅하지 않다' 고 천명한다. 사도들은 말씀 사역(전도와 가르침)과 구제 사역을 바땅히 교회가 감당해야 할 사역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구제 사역은 교인들 중에 일꾼을 뽑아서 전담 해야 할 것을 주장한다. 사도행전 6장 3절에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교인 구제 사역) 저희에게 맡기리라" 고 하였다. 바로 이러한 말씀과 함께 사도들은 모든제자들에게 앞으로 전념하게 될 두 가지 임무를 분명하게 밝힌다. 사도들은 그들의 목회 철학으로 "우리가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 (행6:4)고 선언했다.사도들의 목회 철학의 내용을 생각해 보자. 먼저 번역상의 문제를 지적하고자 한다. 위에 '말씀을 전하는 것' 이란 번역은 헬라어로 '말씀 사역' 에서 유래 되었다 (테 디아코니아 투 로구 : te diako-nia ton logou). 이것은 말씀의 전파는 물론 이 단어를 그저 '말씀을 전하는 것' 으로 번역한 것은 그 의미를 좁게 하기 때문에 바람직하지 않다. 사도들은 온 예루살렘에 말씀을 선포하는 일과 이미 믿은 제자들을 말씀으로 가르치는 임무를 수행해 왔다. 앞에서 보았듯이 예루살렘 온 교인들이 사도들의 가르침을 전심전력 배울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말씀의 가르침에 헌신적으로 힘을 썼기 때문이다 (행2:42; 4:2; 5:28). 하나 더 주목할 것은 사도행전 6장 4절에 사용된 '전무한다' 동사이다. 이것은 우리가 이미 지적한 것과 같이 사도행전 1장14절과 2장 42절에 사용된 '프로스칼레오' (proskartelew)이다. 이 말의 뜻은 사도들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전적으로 헌신하겠다는 것이다. 기도와 말씀사역에 계속적으로, 지속적으로, 끈질기게, 혼신의 힘을 다하여 충성하겠다는 말씀이다. 여기서 예루살렘 교회의 태동시에 헌신적으로 기도에 전념했던 사도들이 교회가 크게 부흥한 후에도 기도에 대한 그들의 태도를 바꾸지 않았음을 확인한다. 사도들은 짧은기간 내에 엄청난 목회적인 성공을 이룬 후에도 기도의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이 또한 예수님의 광야 기도(눅 5:15, 16)를 본받은 것임을 알 수 있다. 예수님께서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말씀도 듣고 병고침을 받으려고 몰려왔을 때, 사역보다 기도를 더 중요하게 여겼듯이 사도들도 그 무엇보다도 기도의 우선적인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사도들의 목회적 결단은 이들이 예수님께서 친히 보이신 삶의 모습으로 돌아왔음을 보여 준다. 그 많은 임무 중에 어떻게 기도와 말씀 사역에만 전폭적으로 힘을 쏟기로 결정했는가? 우리가 본 바와 같이 예수님께서 두 가지 전념하신 일이 바로 기도와 말씀 사역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몰려올 때에도 기도하는 일에 시간을 먼저 할애했고 기도하고 나서야 말씀을 가르치셨다. 그의 어떠한 말씀 전파의 사역도 기도 없이 된 적이 한번도 없다. 먼저 기도로 철저히 자신을 하나님께 드린 후 사역을 준비하고 말씀을 들고 사람들을 찾아가 가르치고 천국 복음을 전하신 것이다. 말씀의 사역자들은 다른 임무는 좀 못해도 흠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두가지를 게을리할 때 문제는 심각하다. 늘 기도에 전념하고 말씀 앞에서 시간을 보내며 말씀에 사로잡혀 사는 일이 있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사도들의 목회 철학이 예수님의 그것을 본받았다는 증거는 사도들이 말씀의 사역보다 기도의 사역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것이다. 누가가 사도행전 6장 4절에서 기도를 말씀의 사역앞에 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는 분명하게 예수님께서 말씀 사역보다 하나님과 은밀한 교제를 위한 기도를 더 중요한 순위로 여기셨음을 누가복음에서 이미 기록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물론 기도에 전폭적으로 헌신하는 것과 말씀 사역에 두는 헌신의 정도는 동일하다. 그래서 누가는 같은 동사를 사용한다. 그러나 굳이 우선 순위를 가르라면 사도들은 말씀 사역보다 기도에 우선 순위를 둔다. 따라서 이 기도에 대한 이러한 태도가 예수님의 예루살렘사역에서도 잘 나타나 있기 때문에(눅 21:37-38) 사도들이 "우리가 말씀의 사역에 전무하리라" 고 하지 않고 "우리가 기도와 말씀 사역에 전무하리라" 고 한 것은 의미심장한 표현으로 생각할 수 있다. 기도생활은 예수님에게서와 같이 사도들의 삶에서도 성공적인 사역을 위한 수단 그 이상의 성격을 지닌자. 예루살렘 교회가 단시일 내에 1만 명 이상의 대형 교회가 되었을 때도, 사도에 대한 사도들의 태도는 제자들이 120여 명일 때와 1만 명 이상이 됐을 때 전혀 차이가 없다. 이 점 또한 그들의 기도 철학이 얼마나 철저하게 예수님의 기도관에 영향을 받았는지 보여준다. 그들은 기도에 대하여 이러한 자세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목회가 아무리 성공적이라 할지라도 기도의 간절함, 철저함을 버릴 수 없었다. 사도들은 지금까지 집해해 온 구제 사업에 문제가 생김으로 인해서 그들의 실수를 자각하게 되었다. 말씀 사역을 감당하면서 동시에 구제 사역을 맡아 왔기 때문에 문제가 야기되었다. 이 문제로 그들은 본연의지세로 돌아와 구제 사역에서 손을 떼고 기도와 말씀사역에 전무하기로 결정했다. 사도들의 이러한 결정에 온 교회는 기뻐하고 만족해했다. 이제 유능한 일곱 집사를 세워구제의 업무를 감당하게 했다. 그 결과 더 이상 같은 문제가 반복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사도들을 통한 말씀 사역이 더욱더 큰 결실을 맺게 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행 6:7)는 기록을 통해 확실히 알 수 있다. 오늘날 목회자들과 성도들은 목회자들의 사역 철학이 어떻게 정립해아 하는지 깊이 생각해야 한다. 4. 예수님을 본받은 교회(행 12:5-12) 누가는 예루살렘 교회가 위기를 맞아 기도하는 모습과 그 응답을 기록한다. 이 기록에서 누가는 단지 예루살렘 교회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응답하신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는 예수님이 누가복음에서 가르친 그대로 예루살렘 교회가 기도한 사실을 보여준다. 그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자.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 께 빌더라 헤롯이 잡아내려고 하는 그 전날 밤에 베드로가 두 군사 틈에서 두 쇠사슬에 매여 누워 자는데 파숫꾼들이 문 밖에서 옥을 지키더니 홀연히 주의 사자가 곁에 서매 옥중에 광채가 조요 하며 또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 깨워 가로되 급히 일어나라 하니 쇠사슬이 그 손에서 벗어지더라 천사가 가로되 띠를 띠고 신을 들메라 하거늘 베드로가 그대로 하니 천사가 또 가로되 곁옷을 입고 따라오라 한대 베드로가 나와서 따라갈새 천사의 하는 것이 참인줄 알지 못하고 환상을 보는가 하니라 이에 첫째와 둘째 파수 를 지나 성으로 통한 쇠문에 이르니 문이 절로 열리는지라 나와 한 거리를 지나매 천사가 곧 떠나더라 이에 베드로가 정신 나서 나를 헤롯의 손과 유대 백성의 모든 기대에서 벗어나게 하신 줄 알겠노라 하여 깨닫고 마가라 하은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가니 여러 사람이 모여 기도하더라(행12:5-12)
    본문의 바른 파악을 위해서 두 가지 사실을 지적하고자 한다. 한 가지는 5절의 '빌더라' 와 12절의 '기도하더라' 인데 이 둘은 모두 원문의 의미를 바로 전달해 주지 못하는 번역이라는 사실이다. 이 두 단어는 원문상 같은 단어이다. 앞에 사용된 것은 명사이고, 나중에 사용된 것은 동사이다.따라서 5절은 저자의 의도대로 "교회는 그를 위하여 하나님께 간절하게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로 번역해야 한다. 이러한 번역은 12절과 연결을 자연스럽게 할 뿐만 아니라, 5절에서 누가가 의도한 목적을 분명하게 해 준다. 더 자세한 것은 나중에 고찰해 보도록 하자. 또 다른 문제는 12절에 사용된 '여러 사람'이란 번역의 문제이다. 이번역은 5절의 '교회' 와 12절의 '여러 사람' 을 대조하는 결과을 가져 온다. 마치 처음에는 베드로의 구출을 위해서 온 교회가 모여서 기도를 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기도 응답의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자 합심기도회에 빠지는 성도들이 많아져서 '여러 사람' 만이 기도했다는 식의 해석을 가능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우리말에 여러 사람은 적은 사람보다는 많으나 많은 사람 혹은 많은 무리보다는 적은 수를 가르킨다. 그러나 실제로 '여러 사람' 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히카노스'(hikanos)의 복수형으로 '많은 무리' 혹은 '허다한 무리' 를 가르킨다. 상당히 많은 수의 사람을 가리킬 때 쓰는 단어이다. 사도행전에서 이 단어는 거의 다 이런 뜻으로 사용되었다(행 11:24, 26:12;12; 14:1, 21; 19:18,26). 그러나 개역판 한글 성경은 12장 12절을 오역하고 있다. 이 오역은 표준세번역에서 시정이 되었다. 이 단어의 바른 번역은 '아주 많은 혹 상당히 많은 사람들' 이다. 이렇게 볼때 5절의 '교회' 와 12절의 '많은 사람들' 은 동일한 표현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렇게 보면 함십기도회에 처음에 참여했던 교인들이 기도 응답이 보이지 않음에고 불구하고 여전히 끈질기게 기도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이 누가가 의도했던 바이다. 이렇게 원문의 의미를 제대로 밣힐 때 기도에 대한 누가의 관점을 좀더 정확하게 이해 할 수 있다. 그러면 위에서 지적한 새로운 이해에 따라 발견할 수 있는 누가의 독특한 관점은 무엇인가? 이 점 역시 두 가지이다. 첫째, 누가는 5절에서 예루살렘 교회가 에수님이 감람산에서 하셨던 간절한 기도를 본받고 있음을 보여 준다. 비록 누가가 이것을 명시하지는 않지만 베드로가 이미 체포되어 처형될지 모르는 긴박한 상황에서 교회가 베드로를 위해서 한 기도를 예수님이 감람산에서 하신 전쟁 기도와 연결할 수 있다. 베드로가 겟세마네 동산에서 에수님이 기도하고 있을 때 잠을 자고 있었던 것과 같이 본문에서도 잠자고 있었다는 점이 무엇보다도 연결의 가능성을 보여준다(눅 22:45=행12:6). 이 연결을 더욱 긴밀하게 하는 것은 예루살렘 교회의 기도와 예수님의 감람산 기도에서 동일하게 사용된 '기도' 와 '간절히' 라는 단어이다(눅22:44 = 행 12:5) 누가복음에는 에수님이 "더욱 간절히 기도했다" 고 나오고 사도행전에는 교회가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다" 로 나온다. 이와 같이 동일한 두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교회가 예수님처럼 절박하고 간절하게 기도했음을 보여 준다. 예수님의 기도생활을 철저하게 본받은 사도들로 가득 찬 에루살렘 교회 역시 사도들처럼 예수님의 기도를 본받고 있음을 제시한다. 들째, 누가는 5절에서 언급한 기도를 또 다시 12절에 언급하면서 합심 기도에 참여한 숫자를 명시함으로 또 중요한 사실을 제시한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18장에 기록된 '낙망하지 않고 항상 기도해야' 한다는 예수님의 기도를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누가복음 18장의 상황이 예루살렘 교회의 기도에 유사하게 재연되고 있다. 과부가 불의한 재판관음 찾아갔지만 과부의 요구는 처음부터 응답 되지 않고 지연되었다. 과부는 이런 지연으로 말미암아 재판관을 찾아가지 않을까 하고 생각할 정도로 절망할 수 있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과부는 그 요구가 이루어질 때까지 재판관을 찾아갔다. 과부가 실망하지 않고 끝까지 재판관을 찾아가듯 예루살렘 교회는 끝까지 실망하지 않고 기도했다. 한편 교회가 사도 야고보를 위해 드린 기조는 응답되지 않았다. 그의 순교의 아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예루살렘 교회는 담임목사 격인 사도 베드로까지 잃게 되는 큰 위기에 빠지게 된다. 야고보의 처형이 유대인들을 기쁘게 한 것을 안 헤롯 아그립바는 베드로마저 죽이고자 체포하여 유월절이 끝나기를 기다렸더(행12:4).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유월절 기간을 피하여 예수님을 은밀히 죽이려고 했던 것과 유사한 상황이다(마26:2). 베드로는 7일간 계속되는 무교절에 체포되어 감옥에 던져졌다. 그가 같힌 감옥은, 역사적인 자료에 의하면, 아마도 예루살렘 성전에서 일어나는 모든 활동을 감사하기 위해 세워진 안토니아 요새일것이다. 그가 감옥에서 탈출할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군인 16명이 그가 갇힌 방을 철통같이 감시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양손에 쇠사슬에 매여 감옥 안에 있는 두 군사에 의해 감시를받고 있었다(행12:6-7). 베드로는 도합 18명의 군사에 의해 양손이 사슬에 매인 채 추운 감방에 던져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탈출은 도무지 불가능하다. 설령 감옥 문을 벗어나는 것은 가능하다고 할지라도 군인들의 이중 감시를 피해 성으로 통하는 굳게 닫힌 철문을 넘는다는 것은 불가능이었다(행12:10). 예루살렘 교회가 구출 작전을 편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따라서 인간의 방법으로 베드로의 탈출이나 구출은 절대 불가능한 것이었다. 도무지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데도 에루살렘 교회는 그의 구출을 위해 간절하게 기도하고 있었다. 이 기도는 누가복음 11장에 언급된 강청하는 기도와 전혀 다르지 않다. 떡 세 덩이를 구하는 친구앞에 굳게 닫힌 대문보다 백 배 천배 강하게 닫힌 문이 예루살렘 교회앞에 있었다. 교회는 이 완전 불가능의 문을 열기 위해 간절하게 기도했다. 기도에 전심절력하는 것이 교회의 4대 특성 중에 하나였던 예루살렘 교회는 엄천난 위기 앞에서도 변함없이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었다. 이 기도는 가장 힘든 기도였다. 사도행전 3장부터 13장까지 언급된 모든 기도는 대부분 즉시 응답되었다. 비록 성령 강림이 있기까지 사도들과 120명의 제자들은 10일간 합심기도를 했지만, 그때는 본문 12장과 같이 절박한 위기 상황은 아니었다. 여기서는 시간이 지나면 베드로가 순교의 제물이 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사도 야고보를 위해 드린 기도를 하나님께서 응답하지 않고 순교를 당하게 하셨으니 아마도 같은 일이 베드로에게 일어날지 모른다는 생각이 교인들의 마음속에 있었을 것이다. 옥에 갇힌 베드로가 야고보처럼 순교의 제물이 될지 모른다는 생각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 베드로에게 남긴 말씀 때문에 더욱 타당성를 갖는다(요21:18-19).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젊었기 때문에 순교할 때는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예루살렘 교회는 베드로의 운명에 대하여 전혀 예측할 수 없었다. 하나님께서 일전에 천사를 보내 옥에 갇힌 사도들을 기적적으로 건져내신 역사를 행하셨기 때문에 이번에도 천사를 보내어 구원하실것으로 생각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행5:18-20). 아마도 이런 이우 때문에 베드로가 구출되어 그들의 집에 왔을 때, 베드로가 왔다는 여종의 말을 믿지 않았던 것 같다. 어쩌면 베드로가 야고보처럼 순교의 제물이 되기를 기도했을 지도 모른다. 예측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교회는 절박한 상황에서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간절하게 기도했다. 그러나 시간이 점점 지나가면서 기도하는 교회의 심리적인 부담감이 더욱 증폭되었다. 교회는 유월절이 다 지나가기 전에 그가 구출되기를 위해서 기도했을 것입니다. 기도 응답의 가는성은 마지막 시간이 다가와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교회가 전심으로 간절하게 기도하기 시작할때 전과 같이 기도한 첫째날 응답을 주셨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그렇게 한자겸 교회가 강청하는 기도를 드려야 할 필요성이 어디 있는가? 하나님은 기도하는 교회가 거의 완전히 자포자기의 상태에 이를 때까지 아무런 응답의 징조를 주지 않으셨다. 교회는 베드로가 천사의 손에 극적으로 구출되어 합심기도하는 장소까지 무사히 돌아오기까지 변함없이 기도하고 있었다(행12:12). 이 기도가 바로 주님의 가르침처럼 강청하는 기도요 밤낮으로 부르짖는 기도이다. 우리는 본문에서 우리의 기도생활에 관하여 무엇을 배울 수 있는지 몇 가지만 지적해보자. 첫째, 교회의 모든 기도가 원하는 대로 응답되는 것은 아니다. 누가는 요한의 형제 야고보가 헤롯 아그립바에게 체포되어 처형된 것을 기록하고 있으나, 그가 잡혔을 때 교화가 그의 구출을 위해서 기도했다는 언급은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사도 야고보가 체포되어 위기에 처해 있을 때 기도 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리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서 기도응답은 기도중에 또는 기도 후에라도 늘 주어진다. 그러나 예루샬렘 교회가 위기 처한 야고보를 위해 기도했음에도 불구하고 응답되지 않았기 때문에 기록할 수 없었던 것으로 본다. 야고보믐 체포되어 칼에 목베임을 받았다.그가 사도들 중에서 처음으로 고난의 잔과 세례를 받은 것은 그가 주님께 바라던 영광의 전주곡일지도 모른다(마 10:37-38). 아무튼 하나님의 정하신 뜻을 야고보가 사도들 중에 처음으로 순교의 재물이 되는 것이었다. 교회의 기도가 이것을 막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기도는 하나님의 정하신 뜻을 지연이나 포기시키는 것이 아니고, 실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기도한다고 해서 교회가 원하는 대로 다 응답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전혀 바람직하지 않다. 둘째, 진정한 기도는 응답될 때까지 계속되야 한다. 누가는 베드로가 투옥된 시점에서부터 베드로가 구출되기까지 교회가 끝까지 기도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것은 한두 사람이 아니라 전 교회라고 할 만큼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모여 계속 기도했다. 어떤 사람들은 기도 응답이 징조가 보이면 열심히 기도하고 그러다가 상황이 급변하여 불리하게 돌아가면 기도를 중단하고 만다. 역경을 맞아 기도를 중단한다면 좋은 여건에서 드린 기도의 동기가 제대로 된 것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기도가 환경의 변화에좌우되는 것은 바랍직하지 않은 뿐 아니라, 하나님앞에 잘못된 것이다. 더 이상 기도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할지라도(이것은 착각임) 기도해야 하며 하나님께서 응답하시지 않은 것 같아도 기도를 지속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종종 인내와 견인의 기도를 하게 하려고 응답을 지연하신다.하나님께서 우리가 안타까워하는 모습을 보기 좋아하셔서가 아니라, 그분과 우리 사이가 더 깊은 교제로 발전되도록하기 위해서이다. 셋째, 기도 응답은 우리가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그분은 응답을 하실 수도 있도하지 않을 수도 있을 뿐만 아니라, 응답을 지연시킬 수도 있다. 따라서 우기 원하는 시간에 또한 원하는 방법으로 기도 응답을 바라보고 기대한다면 실망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실망은 필연적일 뿐 아니라 꼭 필요하다. 왜냐하면 이러한 좌절을 겪으면서 기도를 통하여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지혜, 능력, 그리고주권을 바로 깨닫고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넷째, 기도를 끈질기게 계속하면서도 믿음이 없는 기도를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베드로가 극적으로 구출 받아 합심기도가 열리고 있었던 마가의 집으로 왔을 때에 기도하던 자들이 보여주었던 태도에 잘 나타난다. 여종 로데가 베드로의 음성을 순간적으로 알아차리고 너무 기뻐한 나머지 대문을 열어주는 것도 잊은 채 사도 베드로가 왔다고 외쳤다.이때 기도하고 있었던 많은 성도들은 "네가 미쳤다, 베드로가 온것이 아니고, 그의 천사가 온 것이다." 하고 들러댔다(행 12:15,16). 물론이 태도는 베드로가 그렇게 빨리 살아 동아오기를 기대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이것은 아마도 그들의 행동에 대한 좋은 해석일 수 있다. 만일 이것을 부정적인 각도에서 보면, 그들이 베드로의 구출을 위해서 기도했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기적적인 방법으로 구출시켜 주지 않을 수도 있다고 믿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좀더 심하게 말하면 하나님께서 응답하지 않으실 것을 확실히 믿고 계속 기도했다고 몰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에루살렘 교회의 기도는 확실히 믿음이 부족한 의심하는 기도이다. 그렇다면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만 기도 응답의 확신도 없이 기도했을까? 오늘날도 필자를 포함하여 적지 않는 신자들이 기도를 하지만 응답의 확신 없이 습관을 따라 기도할 때가 많다. 이러한 현상은 아주 어려운 문제를 놓고 혹은 계속 기도했는데 오랜 시간이 지났음네도 불구하고 응답의 가능성이 전혀 보이지 않을 때 일어난다. 이러한 상황에도 개의치 않고 기도를 중단하지 않는 것은 잘하는 일이다. 여기서 한 걸은 더 나가서 우리는 응답의 확신을 가지고 믿음의 기도를 끝까지 할 필요가 있다. **-"기도와 선교"는 다음장에서 -** -예수님의 기도로 돌아가자에서-
    ♡주의 사랑으로 오늘도 행복하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