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광야 기도(눅 5:15~16)
여기서 생각하는 예수님의 광야 기도는 그의 40일
광야 시험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누가는 예수님의 40일 광야 시험을 기도의 관점에서
기록하고 있지 않고 사탄과의 전쟁이라는 관점에서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언급하지 않으려고 한다.
예수님은 40일간 금식하는 가운데 기도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누가를 비롯해 복음서 기자들은 기도란 말을
전혀 사용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복음서 기자들의 의도대로
기도의 문맥에서 상고하는 것이 합당하지 않다고 본다.
그래서 필자는 기도와 관련하여 예수님의 광야 시험을
언급하지 않고 예수님의 다른 광야 기도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이 본문은 누가복음에만 기록되었다.
먼저 복음을 보자.
"예수의 소문이 더욱 퍼지매 허다한 무리가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나음을 얻고자 하여 모여 오되 예수는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기도하곤 하셨다)(눅 5:15,16)"
위의 인용구는 한글개역성경에서 따온 것이다.
이 번역에는 약간의 문제가 있다. 구체적으로 15절에
사용된 동사 "모여온다" 와 16절에 "기도하다" 란 말은
원문에서 모두 미완료 시제로 사용되었다
미완료 시제는 과거의 습관적이고 반복적인 행동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된다. 개역판 번역은 동사에 반영된 습관성을 그대로
반영하지 목하고 있다. 마치 예수님께서 광야에 가서 기도한
것이 일시적인 기도였던 것처럼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의 기도는 일시적이 아니고 반복적이며
습관적인 기도이다. 이 점을 강조하기 위하서 누가가
미완료 시제를 사용했다. 일부 영역 성경은 이 점을 어느
정도 반영하여 "예수님께서 종종 한적한 곳에 가셔서
기도하시곤 했다" 로 번역하고 있다(NIV,NASB,NRSV).
누가에게는 이 점이 몹시 중요했다. 누가는 예수님께서
한적한 곳에 가셔서 기도하신 것이 예수님의 생애 가운데
어쩌다 예외적으로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과거의 습관적
행동임을 보여 준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습관적으로 기도하신 것을 알게 된다.
여기에 반영된 예수님의 기도는 반복적이고 , 규칙성 있는
기도였음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의 이러한 기도를 좀더
분석해 볼때 몇가지 중요한 사실을 발견한다.
첫째., 이미 지적한 대로, 예수님의 광야 기도는 지속적이며
반복적이었다. 여기서 우리의 기도가 반복성, 규칙성의
기도가 되어야 함을 깨닫게 된다.
둘째, 예수님의 광야 기도 시점은 우리를 놀라게 한다.
인기가 고조될 때 그분은 기도하러 광야로 나가셨다,
사람들이 구름 떼 처럼 그에게 몰려오는 것을 보고 이에
도취되어 유혹을 받지 아니하고 기도에 전념하셨음을
가르쳐준다(눅5:15,16).
대체적으로 우리는 일이 안 될 때 기도하고 일이 잘 될 때는
기도를 게을이 한다 . 과연 일이 잘 풀릴 때 기도하는가?
기도를 한다 할지라도 간절함이 없이 맨송맨송하게
형식적으로 기도한다.
구약의 역사를 볼 때 실패와 역경으로 이냏서 망한
경우보다 성공과 번영으로 인하여 망하게 된 경우가
더 많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풍성함을 인하여
교만해질까봐 염려하셨다(신 8:14)
이스라엘 과 유다 가운데서 너무 잘 돼서 망한 왕이
적지 않다(대하16:12 -아사왕; 24:22 - 요아스 왕 ; 25:19,
20 - 아마샤 왕;26:19 - 웃시야 왕)
많은 성도들의 고백은 평안할 때보다도 어려울 때
기도가 더 간절했다는 것이다, 필자의 경험도 예외는 아니다
필자가 미국에서 유학 생활할 때, 아내와 합류하기 전
학교 동산에서 아내가 부쳐 온 편지를 보면서 눈물 흘리며
기도했던 일들을 기억한다. 그러나 아내가 오고, 경제적으로
어느 정도 견딜 만하면서부터 눈물이 마르기 시작한 것을
기억하고 있다. 이것이 정상적인 기도의 자세일 수 없다.
근본적인 문제는 어려울 때 기도를 하느냐 안 하느냐가 아니다
모든 일들이 원만하게 돌아갈 때에도 간절하게 끊임없이
기도할 수 있는가이다. 바로 이러한 기도 정신을 망각하고
있기 때문에 기도의 깊은 세계로 들어가지 못한다
자기 자신의 외적인 환경을 아무리 살펴봐도 울거나 통곡할 만한
이유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영적인 문제를 위해서 애통하며
부르짖는 기도를 할 수 있는 신자는 영적으로 풍성한
복을 누리는 자일 것이다.
지금도 필자에게 잊혀지지 않는 성도가 한 분 있다.
이분은 세상적으로 볼 때 부족한 것이 하나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기도할 때마다 눈물 없이는 기도를 하지 못한다
너무나 간절한 눈물로 기도하기 때문에, 잘 이해하지 못하는
어느 성도가 그분 때문에 교회에 나오기 싫다고 말할 정도였다
어리한 성도들의 기도가 한국 교회를 영적으로
풍성하게 한다고 생각한다.
셋째. 에수님의 광야 기도는 예수님께서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셨는지 분명하게 보여준다.
예수님은 가르침과 치료 사역보다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더 중요하게 여기셨다. 눅5:15절의 말씀대로 허다한 무리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치료 받으러 나오는 일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나아올 바로 그대에
말씀과 치유의 사역을 포기하고 하나님과 교제의 세계로
도피하셨음이 우리를 놀라게 한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몰려오는 것을 볼때 그때가
낮 시간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무리들의 태도에도 잘못된 것이 하나도 없다.
그들에게는 누가가 지적한 것처럼 말씀 듣는 것이 치유보다
우선했다. 이것은 예수님께 나아오는 무리들이 건전한 태도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적지 않은 교인들이 말씀보다는 치료를
선호하는 것을 볼때 그들이 더 건전한 싱앙적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바른 자세를 가진 자들이 말씀을 듣고 치료고 받으려고
모여들 때 예수님은 그들을 반겨 말씀과 치유 사역을 하지
아니하시고 기도를 택하셨다. 예수님은 주로 밤 시간에
기도하시는 분이 아닌가? 이럴때는 밤에 기도하실 일이지
이 많은 무리들에게 행할 사역을 뒤로 미루고 하나님과
교제 시간을 가졌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예수님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가르치는 사역과 치료 사역
배후에 하나님 아버지와 이루어지는 끊임없는 교제이다.
기도를 통한 교제는 예수님에게 기도가 절대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것은, 기도를 성공적인 사역의 수단으로 삼는 시대에
큰 충격이 아닐 수 없다. 기도가 성공적인 사역의 수단이 될때,
목표했던 성공을 거두면 기도는 설자리를 잃는다.
기도는 말씀 사역을 성공적으로 감당하게 하지만
그것만을 위한 수단으로 전략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과 교제를 목적으로 하는 모든 사역의 근본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에게 기도는 성공적 목회, 혹은 전도를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의 삶 자체였다. 이 사실이 예수님의 기도생활에 나타난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몰려왔지만 그렇게 바쁘신 가운데
예수님은 샤역보다 기도를 택하심으로 기도가 무엇인지
보여 주신다예수님은 인기가 절정에 도달하여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으심으로써 유혹에 빠지는 길을 피했다
그는 성공장인 사역의 배후에 도사리고 있는 위험을
직시하셨다. 인가가 높아져서 사람들의 우상이 되고 결국에는
사람들의 종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기도를 말씀 사역보다 앞세우셨다.
예수님은 오히려 하나님에게 인전받는 하나님의 종으로만
서고자 삶의 초점을 오직 하나님께 맞추었다.
하나님께서는 성공적인 사역도 원하시지만 친밀한 교제를
더 원하신다. 에수님이 보여준 기도하는 자세는 사역지상주의,
성공지상주의에 빠져 있는 우리들에게 경종을 울려준다.
넷째, 예수님의 광야 기도에서 사도들이 왜 말씀 사역보다
기도를 더 중요하게 생각했는지 답을 발견한다.
예루살렘 교회에 가난한 성도들의 구제 문제로 불평이
야기됐을때, 사도들은 말씀 사역이 구제 사역보다 얼마나 더
중요한지를 성도들에게 역설했다(행 6:2)
말씀 사역을 이렇게 중요하게 생각한 사도들은 놀랍게도
말씀 사역보다 기도를 앞세웠다
4절에서"우리가 기도하는 것과 말씀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
고 온 사도들이 선언했다. 이것은 사도들에게 말씀의 사역보다
기도의 교제가 더 중요함을 보여준다. 그렇게도 기도하지 않았던
제자들이 기도에 대하여 이러한 인식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깨달음은 바로 예수님의
기도생활에 대한 바른 인식에서 온 것이다.
말씀을 가르치는 일보다 하나님과 긴밀한 기도의 교제가
우선함을 깨달아야 한다. 예수님의 능력 있는 가르침은
그의 기도생활의 열매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기도와
삶과 말씀 사역의 삶을 오랫동안 지켜 본 후에 말씀 사역보다
기도가 앞서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예수님의 기도 자세가 사도들의 기도자세가 되었다.
이러한 기도가 우리들의 기도가 돼야 한다.
오늘날 "기도하니까 일이 되더라"
혹은 "기도하니까 부흥이 되더라" 는 말이 유행하는것을 본다.
기도할때 일이 되고 교회가 부흥하는 것은 당연한 귀절이다
그렇다고 해서 기도를 성공의 수단, 교회 부흥의 수단으로
전략시켜서는 안된다. 하나님이 신앙생활의 수단이 아니고
그 본질이요, 전부 이듯이,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와 사귐을
목적으로 하는 기도를 , 어떤 일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략시키는 것은 하나님을 우리의 목적을 위해
이용하려는 상업주의적 발상이다.
기도를 수단화한 결과로 '기도는 만능'이니
'하늘 보좌를 뒤흔드는 기도'니 하는 잘못된 표현이 나왔을 것이다
만일 기도를 해도 일이 잘 안 풀리고 부흥도 안 되면
기도를 중단할 것인가?
기도는 우리의 목적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것보다 하나님과 사귀고 교제하는 일이 가장
중요함을 고백하는 행위이다.
"나는 하나님이 제일 좋아요 하나님이 없이는 내 인생은 가지가 없어
나는 성공보다, 출세보다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가 더 좋아요" 하고
말할 수 있는 기도가 멋있고 운치 있는 기도가 아닌가?
이것이 예수님이 보여주신 기도의 바른 자세요 태도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기도 앞에서 , 너무 바빠서 너무 할 일이 많아서
기도할 수 없다는 넋두리를 버려야 할 것이다.
이러한 변명은 기도에 대한 잘못된 태도를 반영할 뿐이다
기도가 성 자리 없는 삶은 하나님의 중요하지 않는 삶이요.
하나님의 뜻을 성취에 무관한 삶이 요, 그분의 말씀이
삶의 인도자가 아니라고 여기는 삶이다
복음서 저자 중에서 예수님의 가장 인간적인 모습을 그린 저자는
누가이다. 그러한 누가가 예수님의 기도를 강조했다는 것은,
진정한 인간의 삶은 예수님이 발견하고실천한 기도를 배워
행하는 것없이는 불가능함을 보여준다
전정한 기도의 삶은 참된 인간이 되는 삶이다.
-예수님의 기도로 돌아가자에서-
♡주의 사랑으로 오늘도 행복하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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