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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가르치신 기도(3)-기도와 재림<상>

에바다. 2010. 9. 11. 12:39


    예수님이 가르치신 기도(3)-기도와 재림<상> 예수님의 재림과 기도생활에 대하여 가르치는 누가복음21장 34-36절은 이 복음서에만 등장하는 기록이다. 여기서는 재림의 구체적인 준비로 기도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34절은 일반적인 진술로 내용을 소개하고 35절은 재림 시에 임할 재앙을 말씀하며 36절은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는 삶을 제시한다. 우선 본문의 내용을 보자.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눅 21:34-36) 삼가 조심하지 않으면 마음을 지킬 방법이 없다. 36절의 말씀대로 기도 없이 삼가 조심하는 길은 없다. 기도는 삼가 조심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삼가 조심하지 않을때 마음은 세가지 면에서 둔해진다(34절) 34절에서 "마음이 둔하여진다"는 것은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을 말한다. 마음을 짓누르는 것이 그 사람의 마음을 지배한다. 마음의 저울을 보자.한쭉에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은 좋은 것들,즉 예수님을 갊은 인격을 올려놓고 다른 한쪽에 성령의 역사와 배치되는 것, 즉 이 세상 육신의 욕망(방탕함,술 취함,세상 염려)을 올려놓는다면 기도가 없을 때에 마음이 육신의 욕망 쪽으로 기울 것이다. 이것들이 마음을 찍어누르기 때문이다. 기도하지 않을 때 방탕함, 술 취함,세상 염려가 마음을 점점 더 지배하고 다스리기 때문에 마음의 영적인 감각과 기능이 둔해지고 무감각해지며 급기야 졸며 잠을 자게 된다. 깨어 활동해야 할 새사람은 잠자고 죄악 된 옛사람이 판을 친다. 새사람으로 살아야 할 사람이 옛사람으로 살고 신자로 살아야 사람이 불신자로 산다. 이는 신자에게 아주 위험한 적신호이다. 기도하지 않을 때 마음은 세 가지로 사로 잡혀 무감각하다. 이 세가지는 방탕함, 술 취함, 생활의 염려(이생의 염려)이다. 이 셋은 서로 별개의 것이 아니라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이 셋이 서로 연결되어 한 가지 사상을 표현한다고 볼 수 있다. 이 셋은 각각 결과, 원인, 내용이라는 다른 측면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먼저 방탕함은 도덕적인 억제가 완전히 결여된, 마치 술에 취한 듯한 행동을 말한다.쉽게 표현하면 사람들이 술에 만취 됐을 때 하는 나쁜 행동들을 가르킨다. 술 취함이 술에 취하는 행동 자체를 가르킨다면 방탕함은 술 취한 결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모든 행동으로 볼 수 있다.방탕함은 술 취함에서 나오는 결과적인 행동이다. 따라서 방탕함과 술 취함은 결과와 원인의 관계이다. 세번째는 생활의 염려, 즉 이생에 대한 염려이다. 순전히 세상적인 염려, 곧 무엇을 입을까 마실까 먹을까에 대한 염려이다. 이 염려는 술 취함의 내용을 말해준다. 무엇으로 취했느냐면 이세상의 온갖 염려로 술 취했음을 보여준다. 세상적인 염려에 사로잡혀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모르는 불신자들이다. 먹을것, 입을것,마실것을 추구하며 이를 위해 인생을 투자하고 염려하는 것이 그들의 인생 목적이다. 사람들은 세상적인 염려 때문에 복음을 들어도 깨닫지 못한다. (마13:22;막4:9)/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눅8:14/이생의 염려와 부와 쾌락). 이것은 순전히 불신자들의 생활 방식이요 생의 목적이다. 예수님께서 구원받은 신자들의 삶은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추구하는 삶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했다(마6:33,34).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고 그 나라의 도래를 위해서 힘쓰고 애쓰며 자신의 인격과 행동 속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이 신자들의 생활 방식이요 목적이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살아가는 신자들에게 친히 의식주 문제를 해결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그러나 불행하게도 오늘날 자칭 신자들이 불신자처럼 순전히 세상 것을 추구하며 좇아 사는 태도는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신자가 기도로 깨어 있지 않을 때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성취하는 것을 인생의 목적 삼아 살지 않고 세상적인 생활 방식으로 사는 결과가 일어난다.예수님을 믿기 전에 자신을 사로잡았던 이생의 염려에 완전히 취하고 취한 기분에 방탕한 행동을 서슴지 않는다. 오늘날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세상에 목적을 두고 먹고 입고 마시는 일에만 급급한 나머지 영적인 삶일 등한시하고 무감각해진 신자가 교회에 얼마나 많은가? 성경 들고 교회 나오는 것만다르지 세상에 나가서 추구하고 목적으로 삼는 것은 불신자와 똑같은 신자들이 교회 안에 적지 않다. 이로한 불행은 바른 기도를 하지 않는 데서, 기도에 힘쓰지 않는 데서 일어나는 비극이다.언필칭 신자라는 사람들이 세상 사람들이 가진 것을 갖지 못해서 얼마나 안달하고 몸부림을 치는가?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이 세상 것들로 충만해지려고 몸부림치며 금식하며 기도하기도 한다. 기도를 통해서 세상에 붙은 줄을 끊으려고 하지 않고 세상의 온갖 헛된 것들에 더 얽어매이려고 하는 어리석은 신자들이 교회안에 있는 것 같다. 세상에 취하여 방탕한 삶의 결과는 무엇인가? 예고 없이 임하는 주의 재림의 날에 재앙을 당하게 된다. 34절 하반절에 "그날(곧 주의 재림의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고 되어 있다. 누가는 부가적으로 이 재림의 날은 지구상에 거하는 온 사람들에게 임 할 것이라고 설명한다(35절). 이날은 인자이신 주님이 권능과 큰 영광을 가지고 구름타고 임하는 재림의 날이다(27절). 권능과 큰 영광을 가지고 오는 주님의 재림의 날이 덫과 같이 임하게 될 것이다. 주님의 재림이 날이 덫과 같이 임한다는 말은 두 가지 뜻을 가진다. 첫째, 재림의 예측 불허성을 말한다. 주님이 언제 재림하실지 전혀 알 수 없다. 짐승을 잡는 올무나 덫이 예고 없이 갑자기 오는 것과 같이 예수님의 재림이 그렇게 다가온다. 짐승이 자기를 잡으려는 덫이 놓였는지도 모르고 지나가다가 창졸간에 덫에 걸리는 것과 똑같다. 이와 같이 주님의 날은 예고 없이 오기 때문에 그날과 그시를 알 수 없다. 예수님은 그의 재림에 대하여 그날과 그 시를 모른다는 말을 자주 하셨다(마24:42-44;25:13). 잘못된 재림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 말을 곡해하여 주님이 재림하는 날과 시는 알 수 없어도 연도와 달은 알 수 있다고 한다. 둘째, 주님의 재림이 가져올 심팑벅 성격울 엿볼 수 있다. 사람이 산에 덫이나 올무를 놓는 것은 짐승에게 우익을 주기 위함이 아니라 짐승을 잡아먹고자 함이다. 해를 주기 위함이다. 이와 같이 주님의 재림은 준비되지 않은 자들에게 덫이 거기에 걸리는 짐승을 해하듯이 심판의 해를 가져다 줄 것을 가르친다. 기도로 깨어 있지 않으면 이 세상 염려에 만취되어 완전히 이 세상에 빠져 세상의 사치, 허영, 쾌락을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방탕한 불신자의 삶을 살기 때문에 주님의 재림의 날에 심판의 해를 받을 수밖에 없다. 주님의 날이 덫과 같이 임한다는 말씀과 주님의 날이 밤에 도적과 같이 임한다는 표현은 비슷하다(살전5:2-4). 도적이 어느 날 어느 시에 온다고 예고 없이 오듯이 주님의 재림이 그와 같음을 말한다. 도적이 오는 것은 또한 도적질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재산상 피해를 가져다주듯이 주님의 재림이 준비되지 않은 불신자들에게 심판의 해를 가져다줄 것을 말한다. 그래서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5장 4절에서 도적같이 임하는 주의 날이 빛과 낮의 아들들에게는 도적같이 임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말했다. 이것은 1992년 10얼 28일에 예수님의 재림을 주장한 사람들의 말처럼 주님의 재림하는 날을 알 수 있다는 뜻이 아니고, 빛에속한 신자들은 주님의 재림 날에 갑작스런 멸망의 심판을 받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것이 바울이 말하려던 바였다. 주님의 재림은 덫과 같이 혹은 밤에 도적같이 임하는데 기도로 준비되지 않은 사람은 심판의 해를 받을 위험이 있음을 경고한다. 주님의 영광스런 재림을, 심판의 해를 받지 않고 영광스런 구원의 완성으로 받을 수 있는 자는 항상 깨어 있는 기도의 삶을 사는 자이다. 왜 항상 기도하는 삶이 주님의 재림 준비에 중요한가? 우리가 깨어 늘 기도할 때 우리의 마음에 세가지 즉 방탕함,술 취함, 생활의 염려 때문에 무거워지는 위험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뿐 아니라 이 세 가지에 정반대 되는 세가지 영적 축복을 누린다. 기도를 계속할 때 우리의 마음이 성령님의 절대적인 지배 아래 놓이기 때문에 방탕함, 슬 취함, 생활의 염려에서 점점 더 벗어나게 된다. 여기서 세가지 영적인 축복은 본문에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신약의 가르침에 비추어 알 수 있다. 방탕함, 술 취함, 생활의 염려 이 셋은 결과, 원인,내용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지적했다. 우리가 깨어 기도할 때 이 세 가지에 반대되는 신령한이 우리의 마음과 생활을 지배한다. 이 세 가지 영적인 축복은 방탕함 대신에 성령의 지배를 받는 삶 혹은 성령의 욕망을 따라 사는 삶, 술취함 대신에 성령의 충만(엡 5:18). 이 세상 염려 대신 하나님의 주권적인 말씀(골3:16)이다. 이 셋 역시 결과, 원인,내용으로 연결되어 있다. 성령의 충만은 성령의 인도를 받아 성령의 욕망을 따라 사는 삶을 결과로 낳는다. 따라서 이 둘 사이에 인과 관계가 성립한다. 또한 성령 충만의 본질적인 내용은 그리스도의 말씀 충만이다. 성령 충만을 말씀 충만을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까닭이다. 항상 꺠어 있는 기도생활이란 이 세 가지 축복이 우리 마음을 가득 채우게 하는 것이다. 우리가 항상 깨어 기도할 때 새람, 성령의 사람, 그리스도의 말씀에 충만하고 성령에 충만할 뿐만 아니라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성령의 욕망을 성취하는 사람으로 살게 된다. 이 세 가지 영적 축복을 누리며 살아가는 진실한 신자는 주님의 재림 날에 심판의 해를 받지 않을 것이다. 깨어 있는 기도의 삶이야 말로 주님의 재림을 구원의 최종적인 축복으로 받게 하는 데 절대 적으로 필요한 삶이다. 항상 기도하는 삶이 없이는 주님의 재림을 영광스런 구원 완성의 축복으로 맞이할 수 없다. 주님의 재림 목적은 최종적인 구원의 복을 주기 위함이다. 누가복음 21장 28절에 "이런 일이 되기를 시작하거든 일어나 머리를 들라 너희 구속이 가까왔느니라"고 되어 있다. 이 구속은 주님의 재림시 주께서 주실 구원의 완성을 말한다. 이것은 신자에게 이미 주어진 구원의 최종적인 완성이다. 주님의 재림이 이 구원을 가져올 날이다. 우리는 히브리서 9장 28절을 통해서, 주님의 초림이 십자가 대속을 위한 것이라면 재림은 십자가 대속의 공로를 받아 구원을 이미 받았고 성화릐 삶을 통해서 계속적으로 구원을 이루어 가고 있는 진정한 신자들의 구원을 완성하기 위한 것임을 안다. 이 재림의 날이 우리의 영광스런 구원이 완성되는 날이 되기 위해 깨어 기도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7-19절에 언급된 시험, 환난,박해)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눅 21:36) 다음장에서- ^*^ -예수님의 기도로 돌아가자에서- ♡주의 사랑으로 오늘도 행복하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