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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와 선교<중> "3. 고넬료의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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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사랴에 고넬료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달리야대라 하는 군대의 백부장이라 그가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하루는 제구 시쯤 되어 환상 중에 맑히 보매 하나님의 사자가 들어와 가로되 고넬료야 하니 고넬료가 주목하여 보고 두려워 가로되 주여 무슨 일이니이까 천사가 가로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하여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 네가 지금 사람들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이튼날 저희가 행하여 성에 가까이 갔을 그 때에 베드로가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가니 시간은 위에 소개한 고넬료는 로마 군대의 백부장으로 이방인이다
그는 오늘날 중대장 급에 해당하는 직업 군인이었다. 그는 아주 경건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온 가족 역시 하나님을 경외하여 구제와 기도를 드리는 사람들이었다(행10:2). 누가의 관점에서 고넬료와 그의 가족과 같은 범주에 드는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God-fearers)에 해당한다.(행2:5;10:2;13:26,50;17:4,17).
이들 중에는 유대교에 개종한 사람도 있고 아직 개종하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고넬료와 그 가족은 유대교로 완전히 개종하지 않았지만 유대인들과 같이 경건하게 살았기 때문에 유대인들에게존경받는 인물이었다(행10:22). 그는 구제에 힘쎴고 정기적으로 하나님께 기도했으며(행10:1) 누가복음 7장에 등장하는 , 유대인들에게 칭송받던 백부장과 같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아직도 신자라고 불린 만큼 구원을 체험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의 정기 기도 중 천사가 나타나 베드로를 청하여 말씀을 들을 것을 명했다(행10:4,5). 베드로를 통하여 들을 말씀은 다름아닌 복음이었다(행10:36). 베드로는 그곳에 가서 갈릴리로부터 시작되어 예루살렘에서 절정에 이른 예수님의 구원 사역을 증거했다.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 예루살렘에서 고난, 그의 부활을 증거한것이다(행10:37-43). 이 복음의 말씀은 고넬료와 그의 온 가정이 듣고 믿어 구원을 받게 될 말씀이었다(행 11:13,14).
이 사실은 고넬료와 그의 가정이 아직 구원을 받지 않은 상태에 있었음을 말해준다. 믿는 자에게 구원을 가져오는 복음의 말씀이 아니면, 아무리 경건한 고넬료와 그의 가족도 구원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복음전도자 사도 베드로를 보낸 것이다. 그와 그 가정과 친구들이 베드로로부터 구원의 복음을 들을 때, 성령의 선물이 유대인 제자들에게 부어졌던 것같이(행2장) 그들에게 부어졌던 것이다(행10:45). 이것을 목격한 베드로의 동행자들(유대인 신자들)이 놀라 그들의 오순절 경험과 고넬료 가정의 오순절 경험이 동일함을 고백하게 되었다(행 10:47). 120문도와 같이 이들이 방언으로 말했고 또한 하나님을 찬양하였다(행 10:46).
우리는 누가가 고넬료 가정의 구원 사건을 기도의 관점에서 기록하고 있는것에 주목하고자 한다. 고넬료가 기도하고 있을 때에 천사가 나타나 말씀했고 또한 베드로가 기도하고 있을 때에 하나님의 이상이 그에게 보였던 것은 우연히 일치가 아니다.
먼저 고넬료의 기도를 보자. 그가 기도하고 있던 시간은 제9시였다. 이 시간은 오후 3시로 예루살렘 성전에서 저녁 희생 제사가 드지려는 시간이며 유대인들이 기도하는 시간이었다. 물론 유대인들은 아침 희생 제가 시간에도 기도했다. 그런데 대체적으로 이 오후 시간에 기도하는 유대인들이 더 많았다. 이미 누가는 베드로와 요한이 간은 시간에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가다가 큰 기적의 역사가 일어났고 이로 인하여 많은 사람이 구원을 받게 된 것을 기록하였다(행3:1;4:4).
우리가 나중에 생각하겠지만 고넬료의 기도의 시간과 베드로와 요한의 기도 시간을 연결시키는 것은 고넬료 사건이 미치는 파장이 굉장히 큼을 암시한다. 뿐만 아니라 항상 기도하는 사람 고넬료가 제9시에 기도하고 있을 때에 경건한 유대인들에게 환상 가운데 천사가 나타난 것은 이방인 고넬료가 경건한 유대인 못지않게 하나님 앞에 경건한 사람으로 인정받고 있음을 보여준다.
누가는 그의 복음서 1장을 기도로 시작했다. 제사장 사가랴가 성소에 들어가 중보의 기도를 상징하는 분향을 하고 있을 때 백성들은 희생 의식에 참여하고 성전 뜰에서 기도하고 있었다. 본문에는 분명하게 나타나 있지 않지만 분향하는 이 시간(눅 1:9, 10)에 많은 백성들이 모여서 기도하는 것을 볼 때 이 시간 역시 저녁 희생제사 시간이 오후 3시임을 짐작할 수 있다.
누가복음의 권위자 마샬(Marshall)은 이 점을 잘 지적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누가가 고넬료의 기도를 베드로와 요한의 기도와 연결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더 나가서 1장에 언급한 제사장 사가랴와 백성들의 기도와 연결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천사가 나타나 기도가 응답됐다는 말씀이 사가랴와 고넬료에게 각각 주어진 것을 보아 그 연결을 무시할 수 없다. 사가랴에게 기도 응답으로 메시아의 구원 시대를 준비하고 예비하는 세례 요한의 탄생이 주어지게 되었다. 이와 같이 이제 사도행전에서 고넬료의 기도를 응답하심으로 이방선교의 새 장이 눈앞에 펼쳐지게 되었다.
고넬료는 가이사랴에서 천사의 지시를 따라 그의 주 하인과 경건한 병사를 베드로가 있는 욥바로 보낸다(행10:7,8). 이들은 이튼날 욥바 성에 가까이 왔다. 때는 정오 12시였다(제6시). 베드로는 몹시 배가 고팠지만 아직 식사가 준비되지 않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기다리는 시간 동안 그는 옥상에 올라가 기도를 하였다(행10:9). 부스러기 시간을 이용하여 기도하는 베드로의 모습은 그가 얼마나 기도하는 일에 철저했는지 보여준다.
그는 기도하는 가운데 하늘이 열리는 환상을 목격한다. 이것은 예수님이 세례시 기도를 하고 있을때 하늘이 열렸던 사건과 유사하다. 하늘에서 큰 보자기가 내려왔는데 그 안에는 온갖 더러운 짐승,레위기 11장의 가르침에 따라 부정하여 먹을 수 없는 짐승이 들어있었다. 그 때 이 더러운 짐승들을 잡아 먹으라는 음성이 위에서 들려왔다. 이 일이 세 번이나 일어났고 이것들을 잡아 먹으라는 음성이 있을 때마다 베드로는 이 더러운 것들을 결코 잡아먹을 수 없노라고거절했다. 베드로가 이 더러운 짐승들을 먹을 수 없다고 거절할 때 마다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더럽다 하지 말라" 는 하나님의 음성이 있었다.
베드로가 이 환상의 뜻이 무엇인지를 고민하고 있을 때에 때마침 고넬료의 집에서 보냄받은 자들이 베드로가 머물고 있는 가죽 장사 시몬의 집 문에 당도하여 베드로를 찾았다(행10:18). 이때 성령님께서는 그들을 내려가서 맞이하고 그들과 함께 고넬료의 집에 가라고 말씀하셨다.
그가 세 번씩이나 반복해서 보았던 환상의 의미는 무엇인가? 환상에 나타났던 더러운 짐승들은 하나님의 백성 유대인들과 철저하게 구분되는 이방인들을 가르키는 것이었다. 이 더러운 이들이 하나님에 의하여 정결하게 되었다. 이제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별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제는 복음이 이방인에게 전파돼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부활의구원 사건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별을 완전히 철폐하는 사건이다(엡2:10-19) .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은 사람들이 인종과 혈통을 초월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시대를 도래시킨 것이다. 이 구원의 진리를 구체적으로 가시화한 사건의 오순절 성령 강림과 방언 사건이다. 오순절에 성령 강림은 방언의 역사를 동반하였다. 한 번도 베우지 않았던 방언을 120문도가 말하게 됨으로써 각 나라에서 오순절 축제에 참여하기 위해 왔던 유대교로 개종한 경건한 사람들이 이 방언으로 말미암아 복음의 말씀을 듣고 구원받는 역사가 있었다.
이 엄청난 사실이 오순절 성령 강림에서 가시화하였으나 유대인들이 중심이 된 초대교회는 이것을 잘 깨닫지 못하고 지금까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을 꺼려했다. 지금까지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반유대인이라고 할 수 있는 사마리아 사람들에게까지 복음을 전하기까지는 했지만 감히 이방인들에게는 복음을 전할 용기를 내지 못했다.
하나님께서 스데반의 박해 사건을 통해서 예루살렘 교회를 사방으로 흩었지만 이들 역시 가는 곳마다 오직 유대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했고, 사도들은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교회를 지겼다(행8:1,2). 이들은 흩어져 먼저 유대와 사마리아 각 지역으로 퍼졌다. 그러다가 결국 더 널리 흩어져 베니게, 구브로, 안디옥까지 퍼졌으나 구원의 복음을 여전히 유대인들에게만 증거했다(행11:19). 세계를 복음화해야 할 사도들과 예루살렘 교회는 아마도 복음화해야 할 세계를 유대인의 세계로 착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이렇게 깨닫지 못하는사도들을 깨닫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기도하는 고넬료에게 천사를 보내 베드로에게 사람을 보내어 복음을 들으라고 말씀을 하셨다. 베드로가 점심이 준비되는 시간에 기도하고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정결하게 된 짐승에 대한 환상을 보여주심으로 이제 이방인도 구원을 받는 시대가 도래했음을다시 보여주셨다. 이 진리가 오순절 성령 강림에 나타났으나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것을 다시 구체적으로 피할 수 없게 보이셨고, 기도하는 사람들을 이용하여 큰 역사가 일어나게 하셨다.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서 설교를 하고 있을때 예루살렘 교회에게 임했던 성령님이 동일하게 임하는 역사가 있었다. 이때 그곳에 있던 베드로의 동행인들은 유대인이었는데 , 이 사건을 목격하고 이방들이 유대인들과 동일한 방법으로 성령을 받았다고 증거하게 되었다(행10:46,47). 그래서 베드로는 고넬료의 가정에 모였던 이방인들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이 사건은 이방인들이 구원의 말씀을 받는 사건으로 예루살렘 교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행 11:1-3).
베드로가 사건이 일어난 경위를 하나하나 상세하게 설명할 때 예루살렘 교회는 이것을 하나님께서 친히 하신 구원의 사건으로 인정하게 되었고 이로써 그들은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을 얻는 회개를 주셨다고 고백하게 되었다(행11:18).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기도하는 자들을 강권하여 이방 선교의 문을 여신 사건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 역시 스데반의 박해로 예루살렘 교회에서 흩어졌던 자들이었다. 이들은 이방인이며 유대교에 개종했던 자들로서 일찍 예루살렘에서 복음을 받아 들였던 자들이다(행11:20).
흩어진 사람들의 절대 다수가 여전히 유대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하고 있을 때에 이들은 하나님께서 베드로를 통하여 이방 선교의 문을 여신 것을 몰랐음에도 불구하고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했다. 이때 하나님의 역사는 대단해서 이방인들로 이루어진 최초의 교회인 안디옥 교회가 탄생했다.(행 11:19-26). 이 교회에서 바나바와 사울이 초대교역자로 사역을 했으며 이 교회에 의해 사울과 바나바가 이방 선교사로 파송을 받았고 결국 이방 선교의 모체가 되었다.
우리는 여기서 누가가 왜 이방 선교의 시작을 기도와 연결하고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주로 유대인들을 위한 사역을 시작부터 끝까지 기도로 진행된 것을 보여준 누가가 이방 선교의 사역 역시 기도로 시작된 것을 보여주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방 선교를 위해 일생을 바치게 될 사울을 개종시켜 기도로 이미 준비시겼고, 이제는 사도들을 대표할 수 있는 기도하는 베드로를 들어 이방 선교의 문을 여신 것은 역시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법이 기도임을 보여준다. 베드로의 기도는 이방 선교를 위한 구상이라기보다는 기도하는 베드로에게 하나님께서 기도 가운데 부과하신 주권적인 명령이다. 하나님께서는 고넬료와 베드로의 기도를 통해서 이방 선교의 첫 테이프를 끊으셨다.
왜 기도 가운데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가 일어나는가? 기도는 하나님께서 모든 일에 주권을 가지셨음을 인정하는 것이고 그분이 주권적으로 계획하신 일을 하시도록 요청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기도하는 자는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가 된다. 기도는 이렇게 인간의 뜻에 따라 움직이지 않고 철저하게 하나님의 뜻에 따라 돌아가기 때문에 항상 예상 밖의 일들이 일어난다.
기도가 단지 인간의 계획과 생각에 따라 톱니바퀴처럼 돌아가는 것이라면 기도에는 항상 예측된 결과만 기대될 것이다. 그러나 기도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을 이루는 도구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기도하는 자의 마음을 당신의 뜻대로 움직일 때는 기도하는 자는 두 말없이 하나님의 뜻에 두 손을 들고 순복하여 순종하게 된다. 우리는 이 모습을 고넬료와 베드로에게서 본다. 이러한 자세로 기도할 때 우리는 우리는 자신의 고집, 아집, 억지와 욕심의 깊은 늪에서 벗어나 순수하고 진실하게 되어 하나님의 뜻과 계획의 세계로 몰임할 수 있다. 이러한 삶은 점진적으로 기도자의 전 인격과 삶을 통해 하나님의 정하신 뜻을 성취의 결과를 가져다준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구체적으로 모른다.그러나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주권적인 시간표에 따라 하나님의 뜻이 우리에게 알려지고 확신될 뿐만 아니라 우리는 그 실천자가 된다. 따라서 우리의 기도생활이 아무리 반복적이고, 일상적이며,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심지어는 판에 박힌 것같이 천편일률적인 것으로 느껴질지라도 결코 그만 두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는 작고 평범한 기도를 통해서 당신의 놀랍고 비범한 일을 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고넬료가 오후 3시에 기도를 하고 있었던 것도, 베드로가 점심 준비가 아직 되지 않아 막간을 이용하여 기도하는 것도 그들에게는 지극히 평범한 경건의 시간이었다. 기도생활에 힘쓰는 자들이 하나님의 뜻을 잘 분별하고, 그때그때 필요한 지혜를 얻는 것도 하나님께서 그의 뜻을 가지고 기도하는 자에게 접근하시어 사귀기 때문이다.
기도의 사귐을 통하여 기도하는 신자에게는 피조물로서 가장 영광스러운 모습, 곧 예수님을 닮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계속 회복되는 일이 보이지 않게 진행된다. 이 점에서 볼 때. 기도는 그것이 우리가 원하는 소원의 성취를 가져오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그 자체가 하나님의 응답일 수 있다.
**-**-다음은 "4.안디옥 교회의 기도 (행13:1-3)" 입니다 .(하)에서 뵙겠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로 돌아가자에서-
♡주의 사랑으로 오늘도 행복하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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