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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좌에 앉으신 그리스도의 중보기도

에바다. 2016. 8. 19. 10:11



보좌에 앉으신 그리스도의 중보기도  


대부분의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을 생각할 때 한 쪽으로 치우치는 경향이 있다. 그리스도께서 과거에 하신 구원의 사건만 생각하고 그가 승천하셔서 계속적으로 하시고 있는 샤역에 대해서는 거의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성경은 그리스도의 과거 사역과 현제 사역을 가르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두 가지 사실을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받아 들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은 두 가지 측면을 가지고 있다. 그 중 우리가 주로 강조하는 것이 그의 지상적인 구원 사역이다. 그러나 이 사역과 함께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천상적인 구원 사역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지상 사역을 가리켜 종 된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 그리스도의 천상 사역을 가리켜 종 된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 그리스도의 천상 사역은 높아지신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라고 각각 말할 수 있다. 이 둘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어서 하나가 없이는 다른 하나가 불가능하다.


우리는 종으로 낮아지신 그리스도의 지상적 구원 사역을 그리스도께서 구원의 선물을 준비하는 전 과정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렇게 준비된 선물을 택자에게 나누어주는 사역이 바로 높아지신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으로부터 십자가 대속 사건까지 기간을 가리키는 반면 후자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시작으로 승천, 높아지심(혹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심), 천상 성전에 대제사장으로 취임하심 등이다.


그리스도의 지상적 구원 사역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으로 막을 내렸다. 이 사건은 다시금 재연되거나 반복되지 않는다. 이천여 년 전에 일어난 역사적인 사건이다.


그러나 천주교는 불행하게도 이 역사적인 십자가 사건이 아직도 미사를 통하여 재연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신부가 미사를 행할 때마다 그리스도께서 실제적으로 십자가에 몸을 찢고 피 흘리신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그리스도의 완성된 구속 사건을 모독하는 잘못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세상 끝날에 나타나 단번에 자기 몸을 십자가의 희생물로 드림으로 구원의 선물을 확보하셨다. 따라서 성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마시는 것은 그리스도가 계속해서 다시금 죽기 때문에 아니고 단번에 성취된 구원을 기념하고 그것을 나의 구원으로 받아들이고 믿는 기념적인 사건이다.


반면 높아지신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그리스도께서 부활 승천하시어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신 이후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신 그리스도는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고 지금 복음을 통해 다스리시며, 하나님나라의 모든 원수들을 그 발 아래 복종시키는 통치를 펼치고 계신다. 따라서 높아지신 그리스도는 왕이신 그리스도이다. 그래서 초대교회는 이 가르침을 '주님' 이란 말을 사용하여 표현한다.


그리스도는 보좌에 앉으신 왕이실 뿐 아니라 멜기세덱의 반차를 잇는 대제사장이시다. 레위 계통의 제사장들은 사람인 고로 영원히 살 수 없어서 그들이 죽으면 그들을 이어서 다른 레위 지파 중 아론의 후손들이 제사장직을 계승해야 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영원히 살아 계시고 죽지 아니하는 신이시기 때문에 그의 대제사장직은 영원 불변하다. 그의 대제사장직이 영원 불변하기 때문에 택자들의 구원이 가능한 뿐만 아니라 영원히 확고한 것이다(히 7:24,25)


우리는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영원한 대제사장으로 하시는 사역을 가리켜 그리스도의 '중보기도 혹은 사역' 이라고 한다. 이 중보기도를 통하여 그가 지상 구원 사역으로 말미암아 확보한 구원의 선물을 당신의 택한 백성들에게 나누어주신다. 이 구원의 선물을 효과적으로 나누어주시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대제사장으로 취임하셨다.


존 머레이(John Murray)에 의하면 보좌에 앉으신 그리스도가 행하신 최초의 중보기도는 성령의 선물을 교회에게 보내는 것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가 지상에서 완성한 구원 사건을 근거로 하여 하나님 아버지께서 합법적으로 성령을 택자들에게 주실 것을 요청하셨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택자들의 구원에 관한 약정(約定)에서, 예수님께서 지상에서 구원 사역을 성공적으로 성취하면 성령을 하나님의 택자들에게 주시기로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이 요청을 하나님께서 그대로 받으시고 성령을 보내시어 믿는 택자들을 모으셔서 교회를 탄생시킨 것이다. 이 사건이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이다.


그래서 오신 성령은 믿는 택자 속에서 그리스도가 확보하고 산 구원의 선물을 그리스도에게 받아서 우리에게 나누어주는 일을 하고 계시다. 여기서 성령의 사역은 그리스도의 사역에 제한을 받는다. 성령께서는 임의로 아무에게나 구원의 선물을 나누어주지 아니하시고 오직 그리스도께서 구원의 선물을 받도록 지정한 자에게만 선물을 나누어주신다. 바로 이렇게 구원의 선물을 받는 자들의 구원을 최종적으로 완성하는 책임을 맡기어 주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대신하여 지상에서 성도들 속에서 성령이 사역하게 하시고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중보 사역을 계속하고 계시다.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서 쉬고 계신 다는 뜻으로 오해하기도 한다.


"보좌에 앉아 계시다" 는 말은 통치의 행위를 합법적으로 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스도는 바로 거기서 우리의 구원을 위한 대제사장으로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대변하고 계신다(요일 2:1). 바로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구원에 관한 전부를 위해 중보기도를 하신다. 대제사장 자격으로 그리스도의 세속적인 중보기도가 없이는 어느 누구도 그리스도가 확보한 구원의 선물을 받을 수가 없다. 성령의 선물, 중생, 죄 용서, 칭의, 양자됨 그 어느것도 받을 수가 없다. 택자의 인격 속에 구원의 시작은 물론 구원의 진행을 거쳐 구원의 완성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의 계속적인 중보기도 없이 우리는 구원에 관한 한 그 아무것도 행할 수 없다.


그리스도의 계속적인 중보기도 때문에 우리에게 성령이 주어졌고 성령의 사역을 통하여 영적으로 죽었던 우리가 중생을 통해 살아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또한 믿음으로 외롭다 함을 받아 죄 용서를 받았고 하나님과 화목 되었을 뿐더러 하나님의 가정에 양자로 입양되었다. 지금 계속적으로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아 성화를 이루어 가는 삶을 살 수 있는 것도 그분의 중보기도 덕택이다. 우리가 계속적으로 죄 용서를 받으며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을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계속적인 중보기도 때문이다.


바로 그리스도의 중보기도 때문에 거룩하게 살고자 하는 우리의 노력과 기도, 봉사가 하나님의 앞에 열납되어 열매를 맺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중보기도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우리 눈에는 내 힘으로 다 한 것같이 보여도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게 되면 우리의 모든 노력의 배후에는 그리스도의 중보기도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감사하며 찬양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중보기도에 대하여 네 가지 요점을 생각해 보고자 한다.


첫째, 그리스도의 중보기도의 근거는 무엇인가?
그가 지상에서 비하된 종으로 계실 때 완성하신 십자가의 대속적 희생과 순종을 통한 구원의 완성이다. 즉 그가 친히 완성한 십자가 공로에 근거하여 하나님 앞에 중보기도 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구약 성막에서 제사장이 번제단에서 희생 재물을 불사르고 희생 제물의 피를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며 번제단에서 가져온 숯불로 금향단에 향를 피우는 것과 같다. 금향단에 피어오르는 향은 중보기도를 상징한다. 이 향단의 향은 아무 불로 피울 수 없다. 이 향을 피우는 불은 반드시 희생 제물을 태운 번제단에서 취한 숯불이어야한다.


아론의 두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다른 불로 향단의 불을 피우다가 하나님께 즉시 죽음을 당했다(레10:1,2) 이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 성취 사건과 그의 중보 사역의 관계를 예표한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를 택자를 구원하기에 완전한 것으로 받으셨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이미 인정하고 받으신 십자가 공로에 근거하여 중보기도를 하나님 보좌 우편에 승귀하신 이후 지금까지 계속하고 계신 것이다.


로마서 8장 34절은 그리스도의 과거 사역과 현재 사역을 동시에 언급한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이 그의 과거이고, 하나님의 우편에 계심과 계속적인 중보기도 사역은 바로 그리스도의 과거 사역, 곧 십자가 부활 사건에 근거한다. 그래서 학자들은 그리스도의 중보기도가 십자가 구속 사건에 근거한다고 인정한다.


둘째, 그리스도의 계속적인 중보기도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누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셨는가에 달려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에게 택자들을 구원하라고 맡기었다. 바로 이들만의 구원을 위해서 그리스도는 대속적 희생과 순종의 삶을 사셨고, 바로 이 삶을 십자가로 완성하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은 택자들이 구원을 받을 가능성을 열어놓기 위함이 아니고 택자들의 구원을 실제적으로 확보하기 위함이었다. 바로 이들을 위해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대제사장으로 취임하신 이후 지금까지 중보기도를 하고 계신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택자들을 위해서 중보기도하고 계신다. 그의 중보기도의 결과로 내가 예수님을 믿게 되었고 현재 믿지 않는 사람들중에 택자들도 이 중보기도의 경과로 주님을 앞으로 믿게 될 것이다. 이 사실은 요한복음 17장에 기록된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에 잘 반영되어 있다. 예수님은 열 한 제자들을 위해 기도했을 뿐만 아니라, 이 열 한 제자들을 통하여 믿을 자들을 위해서도 기도하셨다. 로마서 8장 33절에서 바울은 "누가 하나님의 택자들을 고소하리요?" 하고 반문했다. 이 택자들이 34절에 언급된 믿는 '우리' 이다.


셋째, 그리스도의 중보기도의 내용은 무엇인가?
택자들의 완전한 구원에 관련된 전부를 내용으로 한다.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십자가 부활의 공로로 말미암은 구원의 은택이 하나도 없이 택자에게 적용되게 해달라는 것이다. 그의 중보기도는 그가 구원을 위해서 십자가를 통해 택자들의 구원을 확보했는데, 그 구원의 은총이 계속적으로 그들에게 적용되어 그들이 거룩하고 흠없고 온전하게 해 달라는 것이다. 현제 믿고 있는 택자이면 그 속에 시작된 구원이 계속적으로 자라가 지속적으로 구원의 열매를 맺게 해 달라는 것이다. 그에게 닥친 모든 현실이 그의 온전한 구원을 이루는 방편이 되게 해달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머레이(Murray)가 그의 로마서 주석에서 지적한 대로 신자가 구원을 계속적으로 이루어가는 데 필요한 모든 영적인 필요와 모든 은택을 위해 중보기도 하시는 것이다. 택자이지만 아직 믿는 자가 아니면, 그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그가 구원에 이르게 되는 계기로 사용해 달라는 것이다.


넷째, 그리스도의 중보기도는 신자들의 섬김과 봉사가 하나님께 열납되게 한다.
그리스도는 중보기도를 통하여 하나님 앞에서 우리편에 서서 우리의 흠 있고 불완전하고 더러운 것이 섞인 경건, 헌신, 봉사와 기도를 그의 보혈로 정결케 하여 하나님께서 받아주라고 요청하신다. 우리의 봉사, 경건의 노력, 기도의 삶이 아무리 완전하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불순한 요소들이 섞인 불완전한 것들이다. 이러한 것들이 그 자체로는 그 공의와 거룩함에 있어서 완전하신 하나님앞에 그대로 열납될 리 없다.


17세기의 위대한 개혁주의 신학자 프란시스 투레틴(Francis Turretin)이 지적한 바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불완전한 봉사, 경건, 기도를 받아서 그의 십자가 공로롤 성결하게 하고 그것들을 하나님 앞에 완전한 것으로 봉헌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어찌 그리스도의 계속적인 중보기도 없이 우리의 기도와 섬김이 하나님 앞에 열납될 수 있기를 기대하겠는가? 우리의 기도 응답도 그리스도의 중보 때문에 가능하다.


**-**-다음은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중보기도" 입니다-**-**


-예수님의 기도로 돌아가자에서-


♡주의 사랑으로 오늘도 행복하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