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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주하시는 성령님의 중보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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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경에서 유일하게 성령님의 중보기도에 대하여 언급하는 곳은 로마서 8장 26절이다. 그 외에 어느 곳에도 성령님의 기도하는 것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신자 속에 영원히 내주하시는 성령님이 중보기도를 하고 계신다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은혜와 간구의 영' 을 부어주시겠다고 예언한 스가랴 12장 10절의 성취라고 볼 수 있다. 로마서 8장 26절의 말씀을 중심으로 성령의 중보기도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자 한다. 먼저 내용을 보자.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우리는 성령의 탄식하는 중보기도를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 성령님의 탄식 기도의 배경을 바로 이해해야 한다. 이것을 바로 이해하는 열쇠는 '이와 같이' (호사우토스 : wsautws) 표현에 있다. '이와 같이' 란 말은 이미 앞에서 말한 말씀과 관련되어 있다. 이것은 신자가 처한 고난의 상황과 이로 말미암은 두 가지 신음이다. 신자는 고난의 상황에 놓여 있다. 우리가 이러한 고난에도 불구하고 절망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비교할 수 없이 영광스러운 축복이 고난뒤에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롬8:18). 나타날 영광을 고대하면서 고난의 현장 속에서 두 가지 신음이 일어난다.
첫번째 신음은 22절에 언급된 피조물의 신음이다. 피조물이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썩어짐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언제 날이 올 것인가?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스런 구원이 완성되는 날이다. 바로 이때 모든 피조물(천사, 사탄, 귀신은 제외)은 하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스런 자유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피조물이 학수고대하는 것은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이 영광그런 구원에 이르는 것이다. 이날이 오기를 기다리며 신음하며 우리를 응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것이 첫째 신음이다.
둘째 신음은 성령의 첫 열매를 가진 믿는 우리의 신음이다. 23절은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 고 말한다. 이 구절에서 몸의 구속은 육체의 부활을 가리킨다. 신자의 육체가 부활을 하게 될 때 이미 시작된 신자의 구원이 최종적으로 완성된다. 이날이 우리가 완전히 하나님의 아들로 나타나는 날이다. 이날이 오기를 학수고대하며 신자들은 지금 고난의 현장에서 신음한다. 이 신음은 구원을 아직 받지 않았기 때문에 오는 것이 아니라, 신자들이 이미 성령의 첫 열매를 받았기 때문에 오는 신음이다.
신자의 몸은 아직도 죄의 몸, 죽은 몸이란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죄에게 지배되고 악용될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신자는 그의 몸과 마음의 기능에서 죄와 죄의 오염을 제거하려고 신음한다. 이 탄식과 신음은 구원의 결과로 말미암아 오는 신음이기 때문에 절망적인 신음이 아니고 복된고 소망이 넘치는 신음이다.
26절이 '이와 같이' 란 표현으로 시작하는 것은 우리가 지금까지 생각해 본 말씀대로 현재적인 고난의 상황에서 앞으로 임할 족히 비교할 수 없는 영광을 내다보고 온 피조물이 신음하고 성령의 첫 열매를 받은 우리가 신음하듯이. 성령님도 신자를 위한 기도를 통하여 이 신음에 참여한다는 것이다. 이 연결을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 바울은 '이와 같이' 란 표현을 사용했다. 이러한 상황에 성령께서 우리를 돕기 위해 동참하신다는 것이다. 성령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돕는다고 한다.
우리는 연약함이란 말을 병이란 말로 표현할 수 있다. 사실 헬라어 성경에 사용된 단어는 '우리의 병' 이란 말이다. 그러면 여기서 말하는 병은 무엇인가? 육체적인 병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신자의 영적인 병으로 구원 받은 신자 속에 거하는 죄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가 자녀답게 살아가지 못하게 되는 병을 말한다.
본문에서는 이 영적인 병의 증상이 구체적으로 신자의 기도생활과 관련되어 나타난다. 본문 중반 절은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하고 말한다. 이 중반 절은 성령이 왜 우리의 연약함을 돕는지를 설명한다. 이와 같이 성령이 신자의 연약함을 돕는 것은 마땅히(데이:dei) ,기도해야 할 신자들이 무슨 기도를 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의 영적은 연약함은 마땅히 해야 하는 기도를 바로 하지 못하는 증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기도의 병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 기도하는 방법을 모른다는 말인가? 이것보다는 기도를 하긴 해야 하는데 죄의 방해와 영향 때문에 무슨 기도를 해야 하는지 모른다는 뜻이다. 우리가 당한 상황에 적합하고 필요한 기도를 해야 하는데 이러한 상황에서 어떤 내용의 기도를 해야 하는지 모르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절망적 상황에서 성령께서 신자를 돕는다. 우리는 우리가 당하는 상황의 긴박함 또는 절박함 때문에 도대체 무슨 기도를 해야 할지 모를 때에 성령님께서는 우리가 당한 상황에 절실히 요구되는 기도를 우리를 위해 하시는 기도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신음의 기도이다. 이런 기도가 신자의 마음속에서 신자를 위해 일어나는 기도이다.
성령님의 기도는 형용될 수 없는 신음의 기도이다. 성령님이 하시는 중보의 기도는 신자의 영적인 수준과 신자가 처해 있는 상황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그 상황에서 하나님 아버지가 신자에게 요구하는 뜻을 바로 파악하는 가운데 진행되는 기도이다. 우리의 영적인 상황과 우리가 처한 현실과 하나님의 뜻에 대한 바른 이해네 근거한 기도를 성령께서 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성령님이 하시는 중보기도의 내용은 우리의 연약함을 해결한다. 이러한 기도의 내용을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신다고 27절에서 말한다.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롬8:27)
여기서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 는 하나님 아버지를 가르킨다. 성령님의 생각은 말할 수 없는 탄식의 중보기도로 표현되는 기도 내용을 말한다. 말할 수 없는 탄식의 기도를 통하여 성령님이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신자를 위해 기도하는 내용을 하나님께서 아신다는 것이다. 성령님이 이러한 기도와 관련하여 만일 우리가 성령의 기도 내용을 우리의 영이 밝아서 감지할 수만 있다면 우리의 기도생활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만일 우리의 기도를 성령님의 기도 내용에 근거한다면 우리의 기도가 얼마나 바른 내용의 기도가 되겠는가? 바른 기도는 성령이 우리 속에서 하시는 탄식의 기도를 반영할 때 가능하다. 성령님의 중보기도가 신자의 기도에 반영되면 될수록 그의 기도는 하나님의 뜻에 가까워지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 함께 하신 모든 지체님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기도로 돌아가자에서-
♡주의 사랑으로 오늘도 행복하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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